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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방향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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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군….’


미야미즈 토시키는 어느새 맺혀 있던 식은땀을 남몰래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익숙한 손길로 땀을 다 닦아낸 그는 다시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이토모리 정사무소가 위치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완고한 정장을 상대하기 위해 토시키가 오늘 선택한 수법은 도박수였다. 최소한 보편적으로 쓸 만한 방법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승부수를 냈고, 장장 2시간 가까운 실랑이 끝에 어떻게든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비리로 흥한 자, 비리로 망하게 마련이지.’


만고의 진리를 떠올리며 토시키는 입가를 조금 비틀었다.

사실, 이런 권모술수 같은 건 그에게도 꽤나 익숙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어릴 적부터 민속학에 관심이 있었고, 박사 학위까지 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왔다고는 했지만 역시 대학 교수가 되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치력과 인맥 기름칠이 필요했고, 임용되고 나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실을 운영하고 학계에 논문을 내며 그 필요성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

따라서 뒷구멍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약간의 공작을 하는 정도는 그에게도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었다.

후타바와 결혼하고, 시골 마을 이토모리에 정착해서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 믿었었다. 결과적으론 인생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진리를 재확인하는 데 그쳤지만.

토시키에겐 얼마 전 뒷조사의 결과로 얻어낸 몇몇 유착의 증거들이 있었다. 그리고 십 년이 넘게 지켜본 결과도 그렇고, 얼마 전에 재확인한 바도 그렇고 정장의 성격은 그렇게 굳센 편이 못 되었다. 오히려 남에게 쉽게 휘둘리는 타입이었고, 그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도박수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렇게까지 을러댔으니 아마 두 번 다시 다른 생각은 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토시키는 정말로 그렇게 확신했다.

승전을 했으면 승전보를 전해야겠지. 조금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생각이 그쪽으로 흘렀다. 그는 기분 좋게 전화기를 꺼내들고는 익숙한 단축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어, 나야. 집이야? 잘 쉬고 있어?”


오늘의 계획이 계획이었던지라, 아내와 장모가 같이 있었다면 오히려 성공률이 떨어졌을 게 자명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슬슬 쉬라는 핑계로 떨어트려 놓고 혼자 정사무소를 찾아 담판을 지었다. 그러고도 혹시나 몰래 따라오기라도 할까봐 속은 좀 태웠지만 말이다. 이상한 데서 고집불통이 되는 아내의 성격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모든 일이 끝났으니 굳이 마음 졸일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토시키는 안부를 물었다. 요즘 바쁘게 지냈던 그녀가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심정만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기대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뇨, 혼자 쉬려니 조금 좀이 쑤셔서 지금 나와 있어요.”

“나와 있다고? 혼자?”

“네.”

“어딘데?”


전화기를 든 채로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본 후타바의 눈에 이토모리 소방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보이는 대로 기분 좋게 답을 했다.


“지금 소방서 앞을 지나고 있네요. 곧 집에 가요.”

“소방서? 어쩌다?”


그녀가 딱히 소방서를 들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졸지에 호기심을 자극당한 토시키가 잔뜩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후타바는 여전히 여유롭고 기분 좋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뭐, 오랜만에 집에만 있으려니 좀도 쑤시고, 저녁거리도 좀 살까 해서 나왔죠. 편의점에서 장 좀 보고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토시키는 아내 몰래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저 정도라면 오늘 하루는 평화롭게 지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아내가 짐을 내려놓을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만족했다. 마음을 놓아가며 그의 말투 또한 후타바처럼 조금은 가볍고 유쾌해져 갔다.


“그래? 뭐 무거운 거 들고 있거나 한 거 아니지?”

“굳이 안 오셔도 돼요. 저 혼자만으로 충분하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리가 거의 없다는 걸 토시키 또한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굳이 물어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타바 또한 남편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답해주었다.

사실 뭔가 살 것이 많다면 마을에 딱 하나 있는 편의점을 가느니 토시키가 차를 타고 이토모리 밖으로 나가서 사 오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문답을 통해 서로에 대한 관심을 확인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두 사람은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실없는 대화 또한 두 사람만의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조금 더 계속된 대화는 언제나처럼 가벼운 웃음과 함께 끝났다. 기분이 좋아진 토시키는 전화를 끊고 빨리 집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후타바의 눈치는 그렇게 우습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남편의 실수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나저나, 당신, 저한테 뭐 더 할 말 없나요?”


핵심을 날카롭게 찔리고 난 뒤에야 토시키는 원래 전화의 목적을 잊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얼마 전의 생각을 떠올렸다.


“아, 맞아. 이야기는 성공했어. 다시 계획대로 도와주겠다는군.”

“정말요? 어떻게?”


후타바의 목소리가 궁금증에 물들어갔다. 당장의 기분을 굳이 우중충한 이야기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토시키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나중에 말해 줄게, 이야기가 좀 길어지기도 하고.”

“이따가 저녁 먹고 천천히 이야기해 줄 거죠?”

“그래, 당연하지. 숨길 건 없어.”


솔직히 말하면 아마 한 소리 들을 것 같다곤 생각하지만, 그래도 숨겼다가 괜히 더 바가지 쓰느니 차라리 맞을 매는 빨리 맞는 게 낫다는 것이야말로 오랜 부부생활이 가르쳐준 진리였다. 뭐라 말해야 조금은 바가지를 덜 긁힐까 생각하며 토시키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녁에 모든 걸 말해주겠다는 남편의 약속을 재확인하며 후타바는 슬쩍 웃으며 왼팔을 기분 좋게 흔들었다. 그 팔 끝에는 봉투가 잡혀 있었다.

토시키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종류의 봉투였지만.


# # #


‘왜?’


모든 게 엉키고 설킨 것만 같다.

오늘도 뭐, 그리 특별한 하루의 시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제 타키로부터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연락은 받았지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사실은 내심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데….


“대체 갑자기 뭐냔 말이야…. 그 녀석….”


힘없이 뇌까리며 미츠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평소라면 와도 진즉에 와서 하다못해 잡소리라도 늘어놔야 했을 테시가와라는 자기 자리에서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달라진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괜찮냐며 안부를 묻곤 했지만 그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테시가와라에게서 정보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다음 목표는 미츠하가 되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냐는 질문을 오늘만 벌써 몇 번을 받았는지 세어 보기도 솔직히 이젠 좀 지쳤다.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질문에, 말해주기 곤란하다는 식으로 일일이 어색하게 손을 가로저어 줄 때마다, 미츠하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싸운 거였으면 훨씬 나았겠다고!


점심 때, 테시가와라는 갑자기 그녀를 불러냈었다. 뭐, 흔히들 있던 일이라 그때는 별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사야카도 같이 데려가려 했던 미츠하였지만, 테시가와라는 그걸 단호히 가로막았다. 이건 반드시 너와 둘이서만 해야 할 이야기라면서.

솔직히 무슨 일인가 싶었다. 뭔 얘기가 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게끔 나름 마음의 준비는 해 두었던 미츠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게 그런 용건이라고는 아무리 미츠하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너, 미츠하를 좋아한다.

테시가와라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꿈도 아니었고 잘못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엄연히 그녀의 앞에 던져진 선택지였다. 받아들이고 사귈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

얼핏 간단해 보이는 선택지였지만,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테시가와라가 어떤 남자인지에 대해서라면, 솔직히 미츠하는 그리 할 말이 많지 않았다. 남자로서의 테시가와라가 그렇게 그녀의 마음속에 강하게 남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싫으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미츠하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츠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 사야카가 저 멍충이 테시가와라를 좋아해 왔다는 것을.

심지어 타키에겐 저 둘을 엮어줘야 하니까 텟시에게는 너무 접근하지 말라고까지 말한 적도 있다. 두 사람이 잘되었으면, 하고 미츠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으니까.

또 그와는 별개로, 두 사람과는 언제까지나 친구이고 싶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두 사람에겐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말할 만큼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이 모든 것을 단숨에 박살낼 수도 있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미츠하의 얼굴 가죽이 두껍지도 않았다.

받아들이면, 스스로의 손으로 사야카의 사랑을 뺏게 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테시가와라와는 다시 서먹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이 되었든, 세 사람의 관계도에 변화는 불가피했다.


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미츠하는 또다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사야카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안녕?”

“히익!!”


방과 후, 사야카는 집을 향하여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던 미츠하의 어깨를 툭 쳤다. 갑자기 들어온 예상치 못한 자극에 엄청나게 놀라버리는 친구를 보며 사야카 또한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이내 털어내 버렸다.

나도 너 때문에 좀 많이 놀랐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사야, 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아, 미안. 미안.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네.”

“한창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깨에 손이 턱….”

“으, 생각해보니까 그럼 나도 좀 무서울 것 같아…. 미안.”

“아니야, 괜찮아. 나도 좀 지나치게 엄살 핀 것 같으니까.”


언제나처럼, 두 사람은 서로 별거 아닌 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놀고 있었다. 평소의 모습과도 완벽히 같았다. 사이에 있어야 할 한 사람이 지금은 빠져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사야카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들어왔다.


“텟시는?”


역시나 미츠하로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특히 사야카에게는 더. 같은 질문을 이미 지겹도록 들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혹시나 그가 고백했다는 사실을 들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마조마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미츠하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까 배가 좀 아파서, 먼저 들어가 본다 그랬어.”

“흐음~”


미츠하의 대답에 사야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까지 맑았던 하늘을 구름이 조금씩 덮어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서서히 움직이는 구름에서 눈을 떼지 않던 사야카가 갑작스럽게 폭탄을 던졌다.


“역시, 너 오늘 텟시한테 고백 받았구나?”


능글맞은 투로 툭 던진 한마디에, 이번에야말로 미츠하는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튀어올랐다. 경악에 차 말조차 더듬거리는 미츠하.


“어, 어, 어, 어떻게 그걸?!”

“바람에 귀를 기울여 보니 나한테 슬쩍 알려주고 가더라.”


여전히 능글능글한 얼굴을 하며 사야카는 말을 슬쩍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 의심을 확신으로 돌린 미츠하가 언성을 높였다.


“말 돌리지 마. 역시 텟시가 다 불었지?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놔둬, 진짜로 내가 알아서 알아낸 거니까.”


막 화를 내 보려던 미츠하를 사야카가 타이밍 좋게 말렸다. 미츠하가 놀라 되물었다.


“진짜?”


어떻게 보면 천진하기까지 한 질문, 어쩜 저리 사람이 순진할까? 더 이상 장난칠 생각은 접고, 사야카는 피식 웃으며 솔직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너희들 얼굴만 몇 년을 보고 살았는데, 뭐 그 정도야. 너도 내가 텟시 좋아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잖아? 그런 거지 뭐.”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미츠하 또한 이젠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뭐, 확실히 사야카는 평소부터 눈치 하나는 백단에 가깝던 애였으니까 눈치껏 알아내도 이상하지는 않았으니까. 조금은 안심하려던 미츠하.

하지만 사야카의 폭로 아닌 폭로는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넌, 사실 텟시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지?”


연달아 들어온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만 미츠하의 말문이 또 막히고 말았다. 그래도 잠시 후, 입을 막고 있던 손의 깍지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문은 막혔어도 이것만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속이 쉽게 보이는 사람이었어?”

“응.”


1초의 고민조차 없는 즉답에 미츠하는 순간적으로 쓰러질 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나, 나름대로 열심히 감추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렇게까지 소용없는 거였나.

순간적인 충동에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진지한 자리에 장난치곤 좀 너무했나 싶기도 했던 사야카는 황급히 장난기를 거두고 미츠하를 다독여 주었다.


“농담이야. 그냥 내가 눈썰미가 좀 좋은 것뿐이지. 텟시를 봐. 몇 년을 좋아해 놓고 이제야 고백이라니 얼마나 둔해빠진 남자니.”

“몇 년을? 날?”


사야카의 다독임에 막 진정되려던 미츠하의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 년을 좋아해 왔을 거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평소 화통하고 단순한 성격답게 테시가와라는 고백조차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건 미츠하 또한 처음 듣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다시 찾아온 충격에 멍해진 미츠하를 보며 사야카는 가볍게 한 손으로 입을 막고는 피식 웃었다.


“어머, 미츠하 너도 몰랐니? 너희 둘 은근 어울린다 얘, 서로들 둔해빠져가지고는.”

“…둔해서 미안하네요. 사야카 씨.”


조금씩 느껴지는 가시의 존재를 파악한 사야카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무튼 화를 내는 자리가 되어서는 곤란했다. 아직 그녀는 미츠하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화났어?”

“아니. 그건 아니야.”


다행히도 미츠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사야카는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게 속으로 조심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래도 내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니야. 텟시 그 녀석, 분명 엄청 예~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그랬구나.”


미츠하는 생각에 빠졌고, 사야카에겐 당장 더 할 말이 없었다. 또는 아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츠하가 사야카의 말을 인정한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적한 이토모리의 길을 걸었다. 비록 있어야 할 한 사람은 빠져있었어도,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셋이 있을 때처럼 가까웠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먼저 침묵을 깬 건 사야카였다.


“저기, 혹시 어떻게 생각하니?”

“뭘?”

“…텟시 말야.”


약간씩 있던 장난기마저 모두 벗어버리고 순수한 소녀의 모습으로 묻는 사야카. 그 모습 앞에서 미츠하는 어떠한 거짓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솔직하게만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좋다고 하면 생각이 없는데. 그래서 싫으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야. 단지…”

“단지?”

“뭔가 자꾸 마음에 걸려.”


그랬다. 테시가와라와 사귄다는 생각만 했다 하면, 그녀의 마음속에선 무언가 알 수 없는 저항감이 계속 일었다. 이게 대체 뭔지 스스로도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루 종일 가슴에게 물어봐도 마땅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야카 또한 미츠하와 같은 것을 시도했다.


“뭐가?”


궁금하다는 물음표 이외에,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 또한 사야카의 말에는 함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의미를 미츠하는 집어내지 못했기에, 그녀는 순수하게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해주었다.


“뭔지 알았으면 내가 설명을 했겠지. 나도 몰라. 그래서 혼란스러워.”

“그래?”


설마, 하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던 최악의 대답이 돌아오자 사야카 또한 침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것이 슬슬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상태가 조금씩 심각해져 간다는 걸 깨달은 미츠하가 먼저 사야카를 불렀다.


“사야?”

“솔직히 혹시나 이렇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해 봤는데, 역시나….”

“뭐가 이렇게 됐다는 거야?”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사야카를 미츠하가 다급하게 채근했다. 그러자 사야카의 눈이 부릅떠지더니 미츠하를 정면으로 향했다. 피할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는, 강한 의지가 담긴 눈에 미츠하는 조금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의 자신은 저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눈과 눈이 마주친 채, 사야카는 무겁게 선언했다.


“너, 또 나와 텟시를 생각하고 있지?”

“뭐?”


미츠하는 그녀의 말이 담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조금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야카 또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자기 말이 조금 어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말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만에 하나라도 헷갈리지 않도록, 의미를 확실하게 좁혀서.


“미츠하 네가, 또다시 자기 마음보다 나와 텟시와의 관계를 우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야. 맞아?”


이제 미츠하의 눈 또한 크게 부릅떠졌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뜬 채 잠시간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그리고 먼저 눈을 피한 건 미츠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사야카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역시나.”


- 24화. '자각'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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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바가 살아있는 세상의 이야기.


후반부 중에서는 그나마 쉬어가는 부분입니다만, 여전히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조금씩 바빠지고 있고, 다음달 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바빠지기에 더 이상은 장편을 잡고 있을 처지가 아니게 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다음달 초까지 낙엽 시리즈는 어떻게든 완결을 낼 예정입니다. 최대한 작업 속도를 당겨서요.


연재가 장기화되다 보니 예전에 뿌려둔 떡밥의 존재를 가끔 까먹을 때가 있어서 죽을 맛입니다. 쩝.


다음화는 정말로 꼭 주말 내로 올리겠습니다.


감평 및 지적 항상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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