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4편

5편




11.

 

타키군의 입에서 ‘그 년’ 에게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날, 갑작스럽게 회식이 결정되어 저녁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의 앞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의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식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당연하게도 술도 함께 마셨다. 취기가 올라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귀여웠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연애를 하고 프로포즈를 했는지 물어봤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 년’ 과 만나게 됐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그 년’ 이 만나고 사랑했던 과정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막을 지나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는 ‘그 년’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그 년’ 과 운명처럼 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토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옆에있던 눈치 없는 동료가 ‘그 년’ 의 사진을 보고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타키군은 거리낌없이 둘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행복하게 웃고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취기가 올라온 타키군은 옛날엔 더 예뻤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대학생 시절의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면서 내가 구토감을 느끼고 잠시 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나를 따라와서 내 몸상태를 걱정해주었다.

그의 호의가 기뻤다.

그 시절 나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잊었지만 그는 나에게 호의를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그와 함께 식당 밖으로 나왔다. 타키군의 ‘그 년’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감을 느꼈지만 바깥바람을 쐬고 나니 진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타키군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몸 상태가 괜찮은지 계속해서 체크하고 혹시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차편을 알아봐 준다고 해줬다. 그 시절 틱틱대는 그는 이렇게 상냥한 사람으로 변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타치바나씨.”

 

10년 전처럼 허물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성만으로 그를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회식자리에서 빠져나와 둘만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말씀하세요.”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식당 안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 뒤 사라졌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혹시 카타와레도키를 기억하나요?”

 

이토모리 지방에서만 전해지는 말. 황혼의 시간을 의미하는 이토모리의 방언이지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단어였다. 3년전의 타키 군과 내가 만났었던 기적의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는 잊어버린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깨진… 시간인가요? 실례지만 업무에 관련된 내용인가요?”

 

아쉽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질문했던 카타와레도키에 대해서 단어가 의미하는 말 그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였고 내가 질문했던 카타와레도키를 업무의 연장선으로 판단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가장 소중한 것을 놓고 와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지금의 그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걸 알고 난 뒤 나는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고 갑작스러운 나의 눈물에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주말은 언제나처럼 찾아왔다.

 

신을 저주하고 운명을 저주하며 주말을 보냈다. 주말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식사도, 세탁도, 청소도, 취미생활도, 얼마 안되는 친구들과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날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뿐이었다.

 

혜성이 떨어지던 날을 기점으로 나에게 ‘사랑’ 이라는 감정을 알게 해 준 그이는 나에 대한 감정을 잃어버린 체 다른 여자와 미래를 약속했다. 신사의 계단에서 그와 교차한 후 기억을 되찾은 나는 혹시라도 그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많이 그의 눈에 띄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의 눈에 내 모습은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사실 그에게 내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부정했지만 다른 여자와 장래를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티없이 맑은 미소를 띄며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가 웃는 모습은 10년 전 카타와레도키에 서로 티격태격했던 그 때의 웃음과 똑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던 그 시간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시간이 지나고 변함없는 그때의 웃음은 나를 향한 웃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웃는 웃음이지만 그의 환한 웃음에 다시금 반해버리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 그에 대한 감정이 점점 차오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있는 ‘그 년’ 이 부러웠다.

 

회식 날 ‘그 년’ 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구토감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소름이 돋았었다. 소름이 돋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재 그녀의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고 과거의 사진을 보면 볼수록 내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학시절을 사진을 본 후에 구토감을 느꼈었다.

 

그녀의 대학시절 사진은 내가 예전에 했던 단발머리와 똑같았다. 타키군은 운명처럼 그녀에게 끌렸다고 이야기했었다. 마치 옛날부터 그녀를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아 그녀에게 다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당신이 찾고 있던 운명의 상대는 지금 여기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문득 연애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첫사랑의 모습을 연인에게 투영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타키군은 나에 대한 기억을 잃었지만 내 모습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고 ‘그 년’ 과 만났을 때의 기시감으로 그녀에게 다가갔고 결국 그녀와 이어지게 됐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빨리 찾아 나섰다면 그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억을 전부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잊어버리고 10년간 살았다는 것에 자기혐오를 느끼는 한편 ‘그 년’ 만 없었더라면 그와 나는 어떻게 되던 만나게 되어 이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화가 났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그 년’ 에게서 그를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그 년’ 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2.

 

꿈을 꾸었다.

나는 이 꿈을 알고 있다.

예전부터 계속해서 반복해서 꿨던 소중한 사람의 꿈.

잠에서 깨고 나면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꿈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을 꿈에서나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오늘도 반복되는 꿈 속에서 나는 한 명의 소녀를 만났다.

서로 티격대고 별 것 아닌 일에 웃고 그녀에게 닥친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흘러 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한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 그녀에게 마음을 직접 전해줄 수 없었다.

단지, 그녀의 손에 내 감정을 담았을 뿐이었다.

이 꿈은 언제나 여기에서 끝나게 된다. 흐릿해지는 단발머리의 그녀를 보면서

꿈에서 깨어나면 예전처럼 모두 잊어버리게 되겠지.

하지만 기뻤다.

꿈에서라도 잠시나마 그녀를 만날 수 있으니

꿈에서라도 잠시나마 그녀를 기억할 수 있으니

꿈에서나마 이 감정을 전해줄 수 있으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는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전해줄 것이다.

 

 

 

 

매 번 이렇게 다짐만 했을 뿐이다.

 

 

 

 

 

“타키군? 괜찮아?”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고 말았다.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지만 꿈의 대한 기억은 곧바로 하얀 도화지 위에 검은색 물감을 엎어 버린 듯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예전부터 이런 느낌을 자주 받았었다. 눈을 뜨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어린시절 소중히 여기던 야구팀의 선수카드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감정도 이윽고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빠르게 사라져갔고 남은 것은 공허함 뿐 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거의 매일 겪었던 이 느낌.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는 뜸한 이 느낌을 요즘 자주 느끼고 있다.

 

“타키군?”

 

옆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목소리를 들으니 우울했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몸을 돌려 나를 걱정스럽게 부르는 내 약혼자. 오차노미즈 아야세를 보았다.

 

“괜찮아.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아.”

 

그녀에게 악몽을 꿨다는 변명을 하면서 왼손을 들어 그녀의 풍성한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타키군은 무서운 꿈을 꾸면 언제나 울어버리네. 정말 울보라니까.”

 

머리를 스치는 내 손길이 기분 좋은지 그녀는 눈을 감고 마치 주인의 손길을 갈구하는 듯한 강아지처럼 계속해서 쓰다듬어 달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이런 점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랑 같이 자면서 무서운 꿈을 꾸는 일은 이제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은 체 이야기 하는 그녀를 보며 나도 그러게 말이야. 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그녀와 만나면서 악몽을 꾸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대학생이 되고 그녀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을 땐 이런 꿈을 꾸는 일이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어린 시절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워서 엄마와 함께 자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아야세는 박장대소하면서 자지러지게 웃었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짐을 챙겨온 후 2주간 같이 생활했던 기억이 났다. 그 당시에는 부끄러웠지만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오늘은 내 드레스 정하는 날 이잖아.”

 

아야세는 이렇게 말하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다시 나에게 돌려준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얇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에 그녀의 분홍색 얇은 잠옷 사이로 비치는 몸의 굴곡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는 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힘껏 기지개를 펴고있던 무방비한 그녀를 다시 침대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