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의 밤
타키 씨. 머리 많이 기르셨네요. 잠깐 뒤 돌아봐요. 내가 예쁘게 잘라줄게요.
자, 봐봐요. 올해엔 이렇게 빗이랑 가위도 다 챙겨왔거든요. 걱정말구. 내가 언제 당신 다치게 한 적 있어요? ……. 음,
아프게 한 적은 있지만.
그는 말이 없다.
자, 다 됐다. 어때요? 괜찮죠?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어머닌 항상 내가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하시기도 했었는데. 참, 당신, 혹시 오쿠데라 언니한테 내가 예쁜 자수 놔준 거 기억해요? 이야, 참 오래전 일인데. 그땐 우리가 만나기 전이었죠?
그는 말이 없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거울을 안 보여줬네. 여기 손거울도 가져왔어요. 자자, 도쿄 최고의 미남인 타치바나 타키 씨의 예뻐진 얼굴입니다~.
그는 말이 없다.
아… 잠드셨구나. 그럼… 그…….
늙은 여인은 우큭,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제발 떠나지 마요…”
아직은 초가을이라 쌩쌩한 10월의 키 작은 풀밭에 처연한 것이 한 방울,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천히 흘러 내려와 적셨다.
늙은 여인은 구부정한 등을 한 채 땅바닥에 앉아, 말없이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는 노인의 몸을 뒤에서 한껏 움켜 안는다.
노인은 단 한 번도 잠들지 않았다. 그는 한참 전부터, 아니 올해 처음 그녀와 만나기 한 달 전부터 필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흩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말이 없는 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멀쩡한 상태로 연인과 함께 있으려 함이라.
아, 노인의 눈에도 뜨거운 것이 두 방울, 두어 방울, 또다시, 그렇게. 함께 저녁놀에 타들어간다.
자신의 어께를 짓누르는 앙상한 두 팔의 무게를 느끼며 노인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를 위로해줄 순 없었다.
그리고 무얼 해도 그녀의 인생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비일상적인 현상, 아니 매우 당연한, 그러나 둘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방식의 맺음말은. 무섭고, 천천히, 똬리를 틀 듯. 둘을 어떤 지점에 휘감아 잡아버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노인은 늙은 여인의 손을 어루만져주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이토록 힘이 들었던가? 위로라는 게.
연인을 향한 달콤한 속삼임 대신 한숨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게, 화목한 늙은 연인은 황혼에 물들어가며 남들처럼, 떠오르는 맑은 달빛을 받으며 저 멀리로, 훨훨, 덧없이 날아간다.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었어. 어쩔 수 없는걸.
난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 사랑 다 가져가세요, 내 사랑.
♬
18화 part 1
“좀 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걘.”
미츠하는 일부러 싱겁다는 티를 내며 볼멘소릴 냈다. 귀찮다는 듯 기지개를 펴는 시늉도 하면서 말이다.
저만치서 폴짝폴짝 뛰며 혼자서 신나게 산길을 걷고 있던 요츠하가 헤- 하고 빙그르르 언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다는 사람이 안하던 화장에, 새로 산 원피스 드레스에, 엄마가 쓰던 나비모양 머리장식에, 그리고ㅡ”
“얘는! 그래도 보통 자리가 아닌데 이런 자리엔 드레스 코드라는 게 있는 거야!”
네네 어련하겠어요.
요츠하는 키득키득 거리며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다. 미츠하는 혼자서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가 재빨리 진정하고는 조심히 동생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너는 어려서 의복 예절이라는 걸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번 기회에 알아둬. 예를 들어서 장례식 장이나 결혼식 장 같은데 하객으로 참여하게 되면 꼭 당사자를 안만나더라도 지켜야할 특정한 드레스 코드가.”
“근데 언니,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해도 산꼭대기에서 원거리 데이트 하는데 구두는 좀 아니지 않아?”
“요츠하!”
“꺄하핫, 미야미즈의 노처녀 무녀 귀신이다~!”
귀엽게 갈래 머리를 한 10살배기 꼬맹이는 언니를 잔뜩 놀리고선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언니는 분통이 터졌지만 행여 그 애에게 보여줄 옷에 먼지라도 묻을까 걱정이 되어 쫓아가질 못했다.
새삼 가방 뒤에 조심스레 상자 째로 넣어둔 구두가 덜그락 거리는 것 같다. 신체에 도착하기 직전에 운동화에서 갈아 신으려고 가져온 건데, 저 얄미운 동생은 언제 본걸까?
“대체, 걘 만나자고 해도 하필이면!”
미츠하, 진짜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호들갑 떨며 입고 온 건 너잖아.
괜히 아무런 죄도 없는 생명의 은인에게 투덜거리다가 마음 한 켠에 있는 그녀의 양심이 스스로의 정곡을 찔렀다.
흐유, 내가 대체 왜 이런담.
알면서 그런다.
마지막까지 그 양심이란 것이 한 마디를 지지 않고 던져댔다.
열여덟 살 소녀는 애써 그 소리를 못들은 척 하며 열심히 동생을 쫓아갔다.
신체에 오르자 약속된 시간에서 30분 정도가 남았다. 아까부터 폰은 쉴 새 없이 알람 소리를 울려댔다. 전부 ‘그 애’에게서 온 메시지 수신 알람과, 그녀가 보낸 송신 완료 알람이었다. 호오, 역시 두 사람, 흐음 흐음… 요츠하는 능글맞게 웃다가 이번엔 기어코 언니에게 꿀밤을 한 대 맞았다. 학교에서는 얌전하다고 하던데, 집에만 돌아오면 애가 왜 이러는 걸까. 잠시 엄마의 모드에서 동생을 걱정하던 미츠하는 머뭇머뭇 거리며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저기… 요츠하. 잠깐…”
“응? 언니 오줌 마려워? 저기서 그냥 싸.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야, 너 좀.”
미츠하가 흘끗 눈치를 주자 요츠하는 그제서야 참, 그렇지 하곤 옆에 섰다.
미츠하는 등에 매는 가방에 넣어둔 상자에서 구두를 꺼내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았다.
반짝거리는, 예쁜 보랏빛 구두였다.
요츠하가 가방을 대신 집어 들고, 미츠하는 바로 선 자세에서 한 짝씩 조심스레 운동화를 벗어 구두로 갈아 신었다.
이정도 굽 높은 것은 그녀도 처음이라, 약간은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옷이랑 장신구랑 잘 어울려서 미츠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챙겨온 손거울로 화장을 고쳤다. 음, 준비 완료야!
“근데 언니, 그 구두 얼마야? 브랜드인 것 같은데.”
“음…”
“비싸?”
“응, 조금.”
“얼마길래?”
미츠하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중얼거렸다.
“…2천엔.”
“2천엔?”
“2만 2천…”
“에에에에에에에?”
가난뱅이 언니가 그만한 돈이 대체 어디서 나왔어? 라는 동생의 불같은 득달이 쏟아졌지만 죽어도 할머니 몰래 알바를 했다고는 밝힐 수 없었다.(히토하는 손녀들이 공부에만 집념하길 바라서 단속이 엄했다) 미츠하는 괜히 솔직하게 밝혔다고 생각하며 입에 지퍼를 채우고는 가방에서 미리 써온 편지를 꺼냈다. 좀 있다 할 1주년 기념 영상통화에서, 자신과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 ‘그 애’에게 전하고픈 말들이었다.
너무나 말하고 싶은 건 많은데, 이런 기념일이 아니면 평소에 말하긴 너무 부끄러운 것들이라, 하고픈 말들을 정리하려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는지.
지금 대충 훑어봐도 낯 뜨거운 말들이 잔뜩 이었지만 이런 특별한 걸 기념하는 날에는 항상 우리들이 모르는 마법이 숨어있지 않던가. 평소보다도 100배쯤 용기를 키워준다거나, 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500배쯤 더 절실하게 전해진다든가 뭐 그런.
아이 같이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미츠하는 그걸 믿었다. 아니, 아니다. 말하고 난 뒤에 따라올 부끄러움을 외면한다는 게 더 맞겠지. 그래도, 그래도 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ㅡ고마웠어. 그 날 날 보러 와줘서. 날 구하러 와줘서. 정말 어떻게 뭐라 해야 네 용기에 내가 느끼는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리고… 응, 저기, 있잖아. 우리는 앞으로도 다시는 못 만나잖아. 하지만 우리 둘의 전화기로는 서로를 향해 말할 수 있으니까……. 아직도 나도 이 마음을 잘 모르겠고, 너도 갑자기 내가 이래서 당황스럽겠지만… 어쩌면 난, 널
“언니! 듣고 있어? 그래서 남은 돈은 얼마야? 나한테 뭐 안사주면 할머니한테 이를지도…”
“땡 전 한 푼도 없다 이 말씀. 대신 말 안하겠다는 약속 지키면 이 착한 언니가 네 용돈은 조오금 올려줄 의향은 있다.”
그건 한 순간이었다.
마치 하얀 포말과 함께 바닷물에 스르륵 쓸려나가는 해변가의 모래사장 같은. 귀를 간질이는 풍경 소리가 약간은 따스한 기운과 같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차갑게 식어 쌀쌀한 가을의 공기가 왠지 모르게 정겹게 몸을 뎁혀주었다.
마치 영원히 기억될 작년 이 날처럼.
“요츠하…? 어디 갔어?”
방금까지만 해도 조잘거리던 동생이 온데간데없었다.
미츠하는 당황해서 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이런걸로 장난치는 애가 아닌데… 어떻게 된 거…
내 자식처럼 돌봐온 동생이 사라지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던 미츠하가 갑작스레 동생을 찾는 걸 멈추었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래, 저기 왼편 멀리에서.
아, 이건, 설마…….
그 애가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집에 갈 때면 흥얼거리던 뜻 모를 팝송.그 애의 핸드폰에 가장 많이 저장되어있던 가수의 사운드트랙.
이건, 그 애의, 그 애의…….
갈색의 삐죽머리를 한 또래의 남자애가 경사면에 걸터앉아서 자신이 흥얼거리는 노래에 맞춰 손바닥으로 땅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남자의 오른편엔 맥주 두 캔이 놓여있었다. 소년은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장 같기도 했고, 다시 들여다보면 아직도 꿈에 가득 차 있는 어린애 같이 보이기도 했다. 몸짓에선 어른 같이 여유가 흘러나왔지만 목소리엔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거짓말 같은 문자를 주고받고, 가끔은 서로 어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기도 했던. 꿈에서 매번 그리던, 한 남자아이의 모습이 망막에 맺히는 건 어젯밤을 설렘으로 설쳐서일까? 그렇지만 한순간의 환상으로 치부하기엔 저 아인 너무나도 건강하게 빛나고 있었고, 온 몸에서 입체적인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미츠하는 천천히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온 신경이 그 아이에게로 향해있어 저벅거리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그 아이의 목소리가 커져와,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가가기가 겁났다. 작년의 기적 같은 일도 너무나 감사한데, 딱 한 번뿐이라지만 직접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기뻤는데,
나 같은 여자가 이런 기적을 또다시 누릴 자격이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두려움도 그 아이와 열 발자국 떨어진 곳으로 오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미츠하의 마음속엔 오로지 그 아이 뿐이었다.
그리고 너무 가슴이 떨려 다섯 발자국 더 가서 입을 열었다.
“타키 군……?”
땅바닥을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남자는 그대로 몇 초 동안은 정지한 듯이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황혼의 노을빛이 드리워져서 꼭 불타는 것만 같았다. 미츠하를 발견한 남자는 처음엔 놀란 건지 눈이 커졌지만, 이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날’처럼. ‘그 때’처럼.
“내가 그새 낮잠이라도 잔걸까?”
남자가 중얼거리더니 일어나 미츠하에게 다가왔다. 일 년 사이 머리 하나만큼 더 키가 커진 소년은 이제 성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미야미즈, 아니 미츠하.”
그는 눈앞의 여인을 힘껏 부둥켜안았다.
“감사합니다. 다시 저에게 와줘서.”
소녀는 소년에게 안긴 채로 울고 말았다.
그리고 소녀도 펑펑 울며 속삭였다.
“저도 감사해요. 날 잊지 않아줘서.”
황혼의 시간이 부둥켜안은 둘을 감쌌다. 아이들은 존대가 절로 나올 만큼 서로에게 기꺼워했다. 둘에겐 돌과 흙밖에 없는 산꼭대기가 낙원이 되었다. 행복한 시간이 영원히 이 어린 청춘들에게 임할 것이다. 어딘가에서 두 어린 영혼을 내려다보고 있을 신께서 영원히 이들을 축복할 것이다.
둘은 눈물을 흘렸지만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연인이었다.
18화 part 2에서 계속.
살다보니 저도 if를 쓰게 됐습니다. 통화도 되고, 전화도 되었고, 1년동안 둘이 일부러 피했지만 영상통화도 된다는 화목한 세계관이네요.
원랜 3월달에 나왔어야 한 글인데 말이죠. 이야, 저도 정신을 차려보니 달력이 어느새 5월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이번 글은 이전과는 다르게 10화에서 12화정도로 장편이 될 것 같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의 여정동안 잘부탁드립니다.
+)
이전작 번외편들도 계속 작업중입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대로 올라갔어!
아저씨 연재주기 생각하면 이거 완결나기 전에 느갤이 먼저 망하겠다
또 뭔 짓을 저지를 지 몰라
일단 잘봤어요. 그럼 미츠하가 18살이고 타키는 현재 15살인건가요?
그리고 3년후 미래에서 신체에 와있던 타키가 카타와레도키때 18세 동갑 미츠하를 만난거고?
으아아ㅏ악
지금 79+18=97화니깐 100화에서 끝내겠네요
그래서 다음 편 언제 나와요 도댜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