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연인과 빛을 잃은 세상 : http://gall.dcinside.com/yourname/76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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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블랙 커피가 머그잔에 가득 담겼다. 컵을 입에 가져가려고 하자 순간 열기가 확 올라와 눈가의 피부에 닿았다. 젠장, 방금 내린 커피는 정말 불필요할 정도로 뜨거웠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입바람을 불자 커피의 표면이 미세하게 찰랑거렸다. 간신히 한 모금을 들이켰지만 입천장을 데기만 했고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마셔, 미츠하. 커피는 여유잖아.'
커피 포트를 다시 부엌에 가져다놓고 온 사야가 건너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가볍게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커피는 역시 충분히 따뜻할 때 마셔야 되는 법이라고.'
'이건 충분히 따뜻한 정도가 아니잖아? 방금 끓인 건데 엄청나게 뜨거울 수밖에 없지.'
'에이, 몰라. 알았어. 커피는 여유!'
다분히 과장된 태도로 이마에 손을 댄 채 한숨을 쉬는 사야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맛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커피를 테이블 한 쪽 구석 으로 밀어내 버리고 고개를 한 바퀴 돌려 목 근육을 풀었다. 반듯하게 진열된 가구와 전자 기기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지런히 꽂힌 책들과 그보다는 덜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사진 액자들. 그 나름대로 도시적이라면 도시적인 풍경이었다.
'나 머리 자를까 생각하고 있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야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너도 2년 전에 단발로 잘랐을 때 왜 잘랐는지 우리한테 얘기 안 해 줬잖아? 그러니까 비밀. 끝.'
일부러 미간을 최대한 찌푸렸다. 돌아온 것은 더 능글맞은 대답이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신경써줘야 될 남자가 하나 생긴 것 때문이려나. 아무튼 남자는 정말 귀찮은 생명체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문자 메시지를 통해 두 사람이 기어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평생 친구로만 지낼 것 같았는데 이제 와서 연애라니,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니까. 나는 자기 남자친구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한 사야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 녀석이랑 별의 별 못 볼 꼴 다 봤을 텐데 연애할 생각이 들었어?'
'에이, 그건 별개의 이야기지.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별로 상관없어.. 알고 지낸지도 벌써... 몇 년이지. 어쨌든 엄청 어렸을 때부터 몰려 다녔으니 그런 이상한 꼴 많이 본 건 신경쓰이지도 않아.'
'그런가...'
일부러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나에게 불리할 것 같은 주제의 대화는 어서 피하는 게 상책이다. 커피는 방금 전에 비해 확실히 온도가 내려가 있었다. 컵을 집어들자 손바닥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집에서 내린 커피치고는 그런 대로 마실 만했다.
'그래서 머리 자르려는 이유가 그게 끝이야?'
'아니. 생각해봤는데 이 헤어스타일 아무리 생각해도 촌스러워. 무슨 빨강머리 앤도 아니고. 게다가 이제 곧 대도시 도쿄의 여대생이 되는데 좀 세련되게 해서 다녀야지. 헤어샵 주인 언니도 단발로 자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어.'
'진짜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해보는 건 어때.'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강머리 앤은 자기 놀리던 애랑 결혼까지 했잖아.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텟시는... 아니, 오히려 내가 맨날 텟시 놀렸잖아. 이 쪽은 다른 얘기네. 아무튼 단발로 자를 거야.'
'네. 네.'
사야는 말 없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자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갤러리에서 연예인 사진을 하나 찾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 예쁘잖아. 예쁜 거 보면 자기도 똑같이 해보고 싶은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결혼은 필요없지만 드레스는 입어보고 싶은 거.'
'남자의 시선은 싫지만 짧은 치마 입고 다니고 싶기도 하지. 그렇지?'
내가 공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은 말투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닫혀 있던 거실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랑비였던 것이 어느새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겨울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웬 장대비람. 세차게 내리는 비는 제법 거친 소리를 냈지만 나에게는 마치 평화로운 느낌의 배경 음악처럼 들렸다.
'우산은 가져왔어?'
'우산이야 있지만... 저렇게 비가 많이 오면 우산도 별로 소용없지 않을까.'
사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야가 커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면서 기운 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지난 겨울에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거의 1년 만이네.'
'뭐, 더 이상 집이 가깝다거나 한 게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이사왔을 때는 셋 다 다른 섬으로 흩어진다거나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도쿄로 간다는 말 들었을 땐 그래서 기분 좋았지만 고등학교가 달랐던 건 아쉽네.'
거짓말은 그다지 섞지 않았지만 앞에서 했던 대화들의 가벼움 때문에 사야는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지내?'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었다.
'무슨 의미에서?'
'마음대로.'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가장 피곤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헤어 샵 주인에게 '자기한테 가장 어울릴 만한 스타일로 부탁한다'는 귀찮은 주문을 하는 짓궂은 고객처럼.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너부터 얘기해. 궁금한데'
'나? 난 말할 거 진짜 없어. 우리 가족은 바로 도쿄로 올라와서 이 집을 구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지. 그게 끝이야. 굳이 할 이야기가 더 있다면 언니가 최근에 독립했다는 것 정도. 곧 결혼할 거래.'
'혹시 지금도 방송국 같은 데서 일하셔?'
'음, 아니. 방송이랑 별로 관련 없는 직장이야.'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도 사람들은 완전히 꺾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상하게도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창 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쉼없이 쏟아져 내리던 소나기의 기세가 한 풀 꺾여 있었다.
'자, 그럼 미야미즈 씨도 이야기를 해 주실까요.'
'나도 너랑 똑같지. 도쿄에 올라와서 할머니랑 요츠하랑 살고 있어. 대학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서 거기서 살까도 생각 중이고.'
'아... 근데 혹시...'
사야는 입을 떼긴 했지만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사야가 그러는 이유를 바로 눈치챘다.
'아빠...라면 우리랑 같은 집에 살지는 않아. 가끔씩 만나서 얘기하거나 하는데 아마 도쿄에 살고 있긴 한 것 같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
'미안. 말 안 해도 되는데.'
미안할 건 없잖아. 반 정도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직까지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잠깐 대화가 끊기고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나의 시간을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데 소비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눈에 띄게 가늘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랑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전부 물에 잠기게 하겠다는 의지로 내리더니.
서늘한 날씨 때문에 커피는 빠르게 식어 있었다. 아까 마셨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어른스러운 씁쓸함이 입 안에 감돌았다.
'텟시는 뭐 하고 지냈대? 넌 잘 알 거 아냐.'
자칫 분위기가 무거워질까봐 다시 말을 걸었다. 멍하니 있던 사야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말 걸어서 놀랐잖아. 텟시랑은 고등학교 같이 다녔는데 들리는 말로는 건설사 관련 일로 여러 가지로 바빴다나 봐. 마을이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긴 했겠지만 어쨌든 자세히는 몰라.'
'그 녀석도 어쩐지 꿈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
'맞아. 가업을 잇기보다는 공학 관련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 일 때문에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야.'
텟시 역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가고 있었다. 혜성 참사는 분명히 나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사람들은 그 아픔에 맞서서 굳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사야의 언니일 수도, 텟시일 수도, 어쩌면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야일 수도 있었다.
...왠지 기분 나빠.
나 자신만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상실감,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소외감이 느껴졌다.
'부럽네... 다들.'
머그잔을 일부러 소리 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사야는 바로 나 쪽을 돌아보았다.
'그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뭐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다시 도약한다고 해야 되나, 그런 거 말이야. 나도 솔직히 말해서 그런 걸 아직 찾지를 못했거든. 그래서 언니나 텟시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나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던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덧붙였다.
'뭐,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기계 오타쿠랑 같이 살면서 집안일이나 하고 지낼 수도 있겠지.'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동안 밝은 분위기가 지속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창 밖에는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샐러리맨 한 명이 비를 맞으며 어딘가로 바쁘게 뛰어가고 있었다. 주말 오후인데 어딜 저렇게 바쁘게 뛰어가는 걸까. 부주의하고 성실한 샐러리맨이 방금 지나쳐 간 바깥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다면 좀 유감이겠는걸.'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되기 전에 빨리 이것저것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대학에서 방송부에 지원해서 화재 대피 훈련 안내 방송이라도 할까?'
사야가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괜찮겠네. 그럼 나는 신사나 신악무 같은 걸 연구해볼까나. 좋아.'
분명히 농담으로만 이루어진 대화였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다.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무심코 앞쪽을 돌아보았다. 사야는 방금 전 내가 하고 있던 것처럼 비 내리는 오후의 세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고 반 정도 남은 커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썼다. 사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난 건 아니잖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러고는 나를 따라 커피를 홀짝거렸다.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흘려 주고 다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짙게 감싼 먹구름이 하나 둘 사라지며 비가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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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블랙 커피가 머그잔에 가득 담겼다. 컵을 입에 가져가려고 하자 순간 열기가 확 올라와 눈가의 피부에 닿았다. 젠장, 방금 내린 커피는 정말 불필요할 정도로 뜨거웠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입바람을 불자 커피의 표면이 미세하게 찰랑거렸다. 간신히 한 모금을 들이켰지만 입천장을 데기만 했고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마셔, 미츠하. 커피는 여유잖아.'
커피 포트를 다시 부엌에 가져다놓고 온 사야가 건너편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가볍게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커피는 역시 충분히 따뜻할 때 마셔야 되는 법이라고.'
'이건 충분히 따뜻한 정도가 아니잖아? 방금 끓인 건데 엄청나게 뜨거울 수밖에 없지.'
'에이, 몰라. 알았어. 커피는 여유!'
다분히 과장된 태도로 이마에 손을 댄 채 한숨을 쉬는 사야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맛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커피를 테이블 한 쪽 구석 으로 밀어내 버리고 고개를 한 바퀴 돌려 목 근육을 풀었다. 반듯하게 진열된 가구와 전자 기기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지런히 꽂힌 책들과 그보다는 덜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사진 액자들. 그 나름대로 도시적이라면 도시적인 풍경이었다.
'나 머리 자를까 생각하고 있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야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너도 2년 전에 단발로 잘랐을 때 왜 잘랐는지 우리한테 얘기 안 해 줬잖아? 그러니까 비밀. 끝.'
일부러 미간을 최대한 찌푸렸다. 돌아온 것은 더 능글맞은 대답이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신경써줘야 될 남자가 하나 생긴 것 때문이려나. 아무튼 남자는 정말 귀찮은 생명체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문자 메시지를 통해 두 사람이 기어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평생 친구로만 지낼 것 같았는데 이제 와서 연애라니,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니까. 나는 자기 남자친구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한 사야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 녀석이랑 별의 별 못 볼 꼴 다 봤을 텐데 연애할 생각이 들었어?'
'에이, 그건 별개의 이야기지.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별로 상관없어.. 알고 지낸지도 벌써... 몇 년이지. 어쨌든 엄청 어렸을 때부터 몰려 다녔으니 그런 이상한 꼴 많이 본 건 신경쓰이지도 않아.'
'그런가...'
일부러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나에게 불리할 것 같은 주제의 대화는 어서 피하는 게 상책이다. 커피는 방금 전에 비해 확실히 온도가 내려가 있었다. 컵을 집어들자 손바닥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집에서 내린 커피치고는 그런 대로 마실 만했다.
'그래서 머리 자르려는 이유가 그게 끝이야?'
'아니. 생각해봤는데 이 헤어스타일 아무리 생각해도 촌스러워. 무슨 빨강머리 앤도 아니고. 게다가 이제 곧 대도시 도쿄의 여대생이 되는데 좀 세련되게 해서 다녀야지. 헤어샵 주인 언니도 단발로 자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어.'
'진짜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해보는 건 어때.'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강머리 앤은 자기 놀리던 애랑 결혼까지 했잖아.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텟시는... 아니, 오히려 내가 맨날 텟시 놀렸잖아. 이 쪽은 다른 얘기네. 아무튼 단발로 자를 거야.'
'네. 네.'
사야는 말 없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자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갤러리에서 연예인 사진을 하나 찾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 예쁘잖아. 예쁜 거 보면 자기도 똑같이 해보고 싶은 게 여자의 마음이라고.'
'결혼은 필요없지만 드레스는 입어보고 싶은 거.'
'남자의 시선은 싫지만 짧은 치마 입고 다니고 싶기도 하지. 그렇지?'
내가 공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은 말투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 닫혀 있던 거실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랑비였던 것이 어느새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겨울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웬 장대비람. 세차게 내리는 비는 제법 거친 소리를 냈지만 나에게는 마치 평화로운 느낌의 배경 음악처럼 들렸다.
'우산은 가져왔어?'
'우산이야 있지만... 저렇게 비가 많이 오면 우산도 별로 소용없지 않을까.'
사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야가 커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면서 기운 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지난 겨울에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거의 1년 만이네.'
'뭐, 더 이상 집이 가깝다거나 한 게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이사왔을 때는 셋 다 다른 섬으로 흩어진다거나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도쿄로 간다는 말 들었을 땐 그래서 기분 좋았지만 고등학교가 달랐던 건 아쉽네.'
거짓말은 그다지 섞지 않았지만 앞에서 했던 대화들의 가벼움 때문에 사야는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지내?'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었다.
'무슨 의미에서?'
'마음대로.'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가장 피곤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헤어 샵 주인에게 '자기한테 가장 어울릴 만한 스타일로 부탁한다'는 귀찮은 주문을 하는 짓궂은 고객처럼.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너부터 얘기해. 궁금한데'
'나? 난 말할 거 진짜 없어. 우리 가족은 바로 도쿄로 올라와서 이 집을 구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지. 그게 끝이야. 굳이 할 이야기가 더 있다면 언니가 최근에 독립했다는 것 정도. 곧 결혼할 거래.'
'혹시 지금도 방송국 같은 데서 일하셔?'
'음, 아니. 방송이랑 별로 관련 없는 직장이야.'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도 사람들은 완전히 꺾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상하게도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창 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쉼없이 쏟아져 내리던 소나기의 기세가 한 풀 꺾여 있었다.
'자, 그럼 미야미즈 씨도 이야기를 해 주실까요.'
'나도 너랑 똑같지. 도쿄에 올라와서 할머니랑 요츠하랑 살고 있어. 대학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서 거기서 살까도 생각 중이고.'
'아... 근데 혹시...'
사야는 입을 떼긴 했지만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사야가 그러는 이유를 바로 눈치챘다.
'아빠...라면 우리랑 같은 집에 살지는 않아. 가끔씩 만나서 얘기하거나 하는데 아마 도쿄에 살고 있긴 한 것 같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
'미안. 말 안 해도 되는데.'
미안할 건 없잖아. 반 정도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직까지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잠깐 대화가 끊기고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나의 시간을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데 소비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눈에 띄게 가늘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랑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전부 물에 잠기게 하겠다는 의지로 내리더니.
서늘한 날씨 때문에 커피는 빠르게 식어 있었다. 아까 마셨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어른스러운 씁쓸함이 입 안에 감돌았다.
'텟시는 뭐 하고 지냈대? 넌 잘 알 거 아냐.'
자칫 분위기가 무거워질까봐 다시 말을 걸었다. 멍하니 있던 사야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말 걸어서 놀랐잖아. 텟시랑은 고등학교 같이 다녔는데 들리는 말로는 건설사 관련 일로 여러 가지로 바빴다나 봐. 마을이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긴 했겠지만 어쨌든 자세히는 몰라.'
'그 녀석도 어쩐지 꿈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
'맞아. 가업을 잇기보다는 공학 관련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 일 때문에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야.'
텟시 역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가고 있었다. 혜성 참사는 분명히 나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사람들은 그 아픔에 맞서서 굳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사야의 언니일 수도, 텟시일 수도, 어쩌면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야일 수도 있었다.
...왠지 기분 나빠.
나 자신만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상실감,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소외감이 느껴졌다.
'부럽네... 다들.'
머그잔을 일부러 소리 나게 식탁에 내려놓았다. 사야는 바로 나 쪽을 돌아보았다.
'그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뭐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다시 도약한다고 해야 되나, 그런 거 말이야. 나도 솔직히 말해서 그런 걸 아직 찾지를 못했거든. 그래서 언니나 텟시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나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던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덧붙였다.
'뭐,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기계 오타쿠랑 같이 살면서 집안일이나 하고 지낼 수도 있겠지.'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동안 밝은 분위기가 지속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창 밖에는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샐러리맨 한 명이 비를 맞으며 어딘가로 바쁘게 뛰어가고 있었다. 주말 오후인데 어딜 저렇게 바쁘게 뛰어가는 걸까. 부주의하고 성실한 샐러리맨이 방금 지나쳐 간 바깥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다면 좀 유감이겠는걸.'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되기 전에 빨리 이것저것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대학에서 방송부에 지원해서 화재 대피 훈련 안내 방송이라도 할까?'
사야가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괜찮겠네. 그럼 나는 신사나 신악무 같은 걸 연구해볼까나. 좋아.'
분명히 농담으로만 이루어진 대화였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다.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무심코 앞쪽을 돌아보았다. 사야는 방금 전 내가 하고 있던 것처럼 비 내리는 오후의 세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고 반 정도 남은 커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썼다. 사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난 건 아니잖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러고는 나를 따라 커피를 홀짝거렸다.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흘려 주고 다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짙게 감싼 먹구름이 하나 둘 사라지며 비가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굳굳
저번에 올리신 단편이랑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네요. 타키를 만나기 전의 미츠하의 일상을 계속 써 주시는데 이렇게 써 주셨던 분이 없으셔서 정말 새롭고 좋습니다. 필체도 정말 좋으시구요
잘 봤습니다 타키하고 만나기전에 미츠하의 일상 소재가 새롭고 좋네요
숨어있는 고수들이 이렇게...
정말 일상적인 소재라서 좋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