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연인과 빛을 잃은 세상 : http://gall.dcinside.com/yourname/761247
비 내리는 날과 블랙 커피 : http://gall.dcinside.com/yourname/76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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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이 어둡던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더니 눈 앞에 고향의 정경이 펼쳐졌다.
감탄사를 내뱉을 새도 없이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 중 어느 하나도 자세히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이제 이 마을에 대해 거부감 따위의 감정을 가지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움이나 향수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아릿함에 가까웠다.
바다처럼 푸르고 넓게 펼쳐진 하늘에 구름 조각배가 떠다녔다. 하늘을 배경 삼아 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마을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소박한 시골의 풍경을 감상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밖에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던 2시간마다 한 번 기차가 오는 기차역과 9시가 되면 문을 닫아 버리는 편의점을 차례로 지나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낮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몽롱한 정신 때문에 시간 감각은 희미했지만 제법 오래 걸었다는 자각은 있었는데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우선은 내가 아는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미야미즈 신사까지는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어린 시절에 몇 번이고 오르내렸던 계단을 통해 저택에 다다르자 나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 만큼 독특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저택 안을 살폈다. 넓은 거실, 주인을 잃은 민속학 관련 서적들이 즐비한 서재,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내 방까지 모든 것이 희미한 기억 속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동생과 할머니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과 마주하지 못한 것이다.
저택 안은 새 소리와 바람 소리 정도를 빼면 완벽하게 고요했다. 마룻바닥을 지나는 발소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마치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나칠 정도의 적막에 질려 TV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TV가 켜지기는 커녕 버튼 누르는 소리도 어딘가로 새어나간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있던 침묵만이 가득한 장소에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나는 저택을 떠났다. 어디로 발길을 돌릴까 고민하다가 이토모리 고교 쪽 길로 향했다. 누군가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은 버리려고 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리를 건널 때쯤에는 저 멀리에서 자전거를 탄 사야와 텟시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주지 않을까, 하는 무의미한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운동장과 복도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고 1학년 교실과 교직원실 또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나는 분명히 혜성 참사로 사라졌어야 할 이토모리 마을에 있다.
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른 순간 창문에 짧게 깎은 헤어스타일의 소년과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비쳤다.
텟시와 사야는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들은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가며 인사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 둘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텟시는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잡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거 질리지도 않아?'
'뭘 새삼스럽게. 원래 이런 건 보는 사람은 계속 보니까 판매량이 유지되는 거다.'
'하여간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다. 오히려 그 점이 비현실적인 상황과 대비되어 적지 않은 위화감을 가져다주었다.
'가끔은 저녁은 밖에서 먹고 싶은데 이 마을엔 우르르 몰려가기 좋은 그런 데도 없잖아. 아, 도쿄에서 살고 싶다.'
'쓸데없이 술집 따위나 만들고 앉아 있고.'
'도쿄엔 우리 같은 고등학생들을 위한 예쁜 음식점도 많고 먹을 거리도 많겠지? 나중엔 도쿄... 적어도 시골에서 살진 않을 거야. 여기서 지내는 건 진짜 질려 죽겠다니까. 이런 마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난 이제 그 이야기 듣는 게 질려 죽겠다.'
어린 시절에는 그리도 싫어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저려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기억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을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가자. 여기서 할 거 아무것도 없다.'
'그럴까.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 마실래? 입이 심심한데.'
'일단 어디든 가자.'
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나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잠깐 동안 멍하니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둘을 쫓아갔다.
대화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텟시와 사야는 자신들 외의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세계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고등학생 시절에 흔히 나누었을 만한 평범한 대화를 계속할 뿐 위화감을 느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직 사귀기 전의 두 사람은 서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발을 맞추어 걸었다. 나는 세 발짝 정도 뒤에서 두 사람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버스 정류장의 자판기 옆이었다. 사야는 자연스럽게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넣고 캔 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텟시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탓에 나는 선뜻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자판기에 기대 섰다.
'진짜 카페에는 언젠가 꼭 가 보고 싶은데. 팬케이크 같은 것도 팔겠지?'
'가격이야 비싸겠지만. 게다가 그렇게 달달하기만 한 건 질색이다.'
'분위기 깨기는... 남자들을 이래서 눈치 없다고 부르나 봐.'
또 그 쪽 이야기냐며 발끈하는 텟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부터 마을에 만들어져 있던 간이 카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난 살면서 또래 남자라고는 우리 학교 애들밖에 못 봤으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여자의 시선이란 건 그런 거야. 남자 애들이 완전히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그런 걸 일반화라고 하지.'
'진짜 재미없다.'
두 사람은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에 가시를 담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뭐가?'
'정말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나한테서 그런 걸 바라면 어떡하냐.'
'그건 그렇네.'
늘 그렇듯이 둘은 또 티격태격거렸다. 나중에 서로 연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 둘 다 반발하려 하면서도 얼굴을 붉히겠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둘은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전혀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언제나 세 명이 함께 모여 다녔으니 내가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나눌 법도 한데. 지금 있는 세계에서는 '미야미즈 미츠하'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학교에 제법 괜찮은 남자 애들도 있잖아.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애들.'
'글쎄... 그런 놈들도 보통 남자들끼리 있을 땐 썩 어른스러워 보이진 않는데.'
'그런가... 남자들끼리는 뭐 하고 노는데?'
'게임 얘기 하거나, 여자 연예인 얘기 하거나. 난 연예인에 관심 없으니까 잘 끼진 않고.'
'심심하겠네. 주변에 너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약간? 그래도 인터넷 게시판 같은 데서 얘기하면 되니까 심심하다는 느낌은 없다.'
둘은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나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장이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만약 혜성이 내 목숨을 앗아갔더라도,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나 없이도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겠지.
캔 커피를 눈 깜짝할 새에 다 마셔 버린 텟시가 쓰레기통에 캔을 던져 넣었다.
'이것도 이제 지루하다. 하도 카페 얘기 들었더니 나도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있잖아, 고등학교 졸업하면 같이 상경하자.'
'...'
텟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야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도 맨날 나한테 그런 소리 하잖아. 회사 별로 안 잇고 싶다든가 하는 거.'
'...그게 좀 표현하기가 애매한데.'
'뭐야, 그게. 이참에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무슨 생각 하는지.'
사야의 눈이 초롱초롱거렸다. 텟시는 일부러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 마을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을 떠나기보다는 내 손으로 바꿔버리고 싶다. 아빠 밑에서 자라면서 별의 별 이상한 꼴을 다 봤고, 뭐. 난 어차피 내 의지랑은 별 상관없이 회사를 이어나가야 되고 그럼 이 마을에서 살 수밖에 없잖냐.'
'그렇구나... 그동안 내가 너무 가볍게 이야기했나. 미안.'
'사과할 건 없고...'
대화가 잠시 끊기고 나에게도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고등학생 때 듣지 못했던 텟시의 진심을 알게 되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미래에 이 마을은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니까.
꽤 오랫동안 유지되던 정적을 사야가 먼저 깼다.
'텟시, 만약에 이 마을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리면 어떡할 거야?'
'아마도... 일단은 기분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 아무리 썩어빠졌다 해도 태어나서 자란 마을인데 홀랑 사라져 버리면...'
'뭔지 알 것 같아.'
떨어진 초록색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갔다. 해가 지고 있는지 하늘은 점차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다음 이야기를 듣기가 두려웠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넌 어떤데.'
'나? 음... 나도 마냥 들뜨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을이 싫긴 하지만, 매번 욕하면서 미운 정 들었다고나 할까... 몰라.'
'...그렇구만.'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던 몸이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지구의 중력 자체가 점점 강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마치 이제는 이 마을과 다시 작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쨌든 지금은 마을이 싫지만 미래에는 이 이상한 마을을 그리워하기도 하겠지. 향수병이란 것도 있잖아.'
'난 일단 미래에 이 마을을 떠날 수 있을 지부터가 의문이다만.'
'그럼 텟시 네가 이 마을을 바꿔버려.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럴 수 있었음 여한이 없겠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자판기와 그 자판기에 기대어 있는 내 몸을 떨리게 했다. 텟시와 사야가 앉은 벤치 주변의 풍경들은 조각 퍼즐이 부서지듯 점점 희미해져갔다.
'이대로 떠나고 싶지 않아...'
내 의지와는 반대로, 세계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그 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야가 입을 뗐다.
'미츠하는 이 마을을 어떻게 생각할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이 세계에도 미야미즈 미츠하는 존재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마 너랑 비슷하겠지. 아니, 미츠하는 신사 일도 있으니 어쩌면 진심으로 마을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미츠하는 우리보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아니야... 나는 이 마을을 다시...'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반대로 눈 앞이 점점 칠흑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미츠하라도 이 마을에서 힘든 일만 겪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잖아.'
'당연하지. 그 녀석도... 나중엔 이 마을을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우리도 더 나이를 먹어 보면 알게 되겠지.'
'멋있는 척 하긴.'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이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 하늘과 이토모리 호수와 미야미즈 신사가 차례로 검은 빛이 되었고 어둠은 사야와 텟시마저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얼마 뒤 눈 앞은 무채색으로 가득 찼고 마을의 풍경은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그 검은색의 물결 속에서 홀로 발버둥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빨간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채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
그네가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래도 깜빡 졸아 버린 것 같았다.
서쪽 하늘로 사라져 가는 해가 모래 바닥 위에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놀이터는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했다. 나는 앉아 있던 그네에서 몸을 일으킨 뒤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 때문에 몸의 기운이 전부 어딘가로 새어나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비틀거리며 출구 쪽으로 걸었다.
이제는 모두 과거의, 꿈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분명히 어린 시절 내내 싫어해 마지않는 마을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 때의 추억이 이렇게 아련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모든 기억들이, 아픈 기억들마저도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토모리 마을은 티아매트 혜성의 파편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해 지도 상에서 사라졌고 지금 그 장소에는 거대한 호수만이 남아 있다.
모든 마을 주민들은 그 날 대피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마음 속에 각자 큰 구멍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내 마음 속의 구멍 또한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나를 허무감 속에 구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 구멍을 메꾸어 줄 사람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놀이터를 떠나며 고개를 들어 석양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떠난 장소에는 빨간 그네 하나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 내리는 날과 블랙 커피 : http://gall.dcinside.com/yourname/76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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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이 어둡던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더니 눈 앞에 고향의 정경이 펼쳐졌다.
감탄사를 내뱉을 새도 없이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 중 어느 하나도 자세히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이제 이 마을에 대해 거부감 따위의 감정을 가지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움이나 향수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아릿함에 가까웠다.
바다처럼 푸르고 넓게 펼쳐진 하늘에 구름 조각배가 떠다녔다. 하늘을 배경 삼아 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마을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소박한 시골의 풍경을 감상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밖에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던 2시간마다 한 번 기차가 오는 기차역과 9시가 되면 문을 닫아 버리는 편의점을 차례로 지나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낮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몽롱한 정신 때문에 시간 감각은 희미했지만 제법 오래 걸었다는 자각은 있었는데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우선은 내가 아는 장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미야미즈 신사까지는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어린 시절에 몇 번이고 오르내렸던 계단을 통해 저택에 다다르자 나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 만큼 독특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저택 안을 살폈다. 넓은 거실, 주인을 잃은 민속학 관련 서적들이 즐비한 서재,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내 방까지 모든 것이 희미한 기억 속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동생과 할머니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과 마주하지 못한 것이다.
저택 안은 새 소리와 바람 소리 정도를 빼면 완벽하게 고요했다. 마룻바닥을 지나는 발소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마치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나칠 정도의 적막에 질려 TV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TV가 켜지기는 커녕 버튼 누르는 소리도 어딘가로 새어나간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있던 침묵만이 가득한 장소에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나는 저택을 떠났다. 어디로 발길을 돌릴까 고민하다가 이토모리 고교 쪽 길로 향했다. 누군가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은 버리려고 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리를 건널 때쯤에는 저 멀리에서 자전거를 탄 사야와 텟시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주지 않을까, 하는 무의미한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운동장과 복도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고 1학년 교실과 교직원실 또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나는 분명히 혜성 참사로 사라졌어야 할 이토모리 마을에 있다.
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른 순간 창문에 짧게 깎은 헤어스타일의 소년과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소녀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비쳤다.
텟시와 사야는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들은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가며 인사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 둘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텟시는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잡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거 질리지도 않아?'
'뭘 새삼스럽게. 원래 이런 건 보는 사람은 계속 보니까 판매량이 유지되는 거다.'
'하여간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다. 오히려 그 점이 비현실적인 상황과 대비되어 적지 않은 위화감을 가져다주었다.
'가끔은 저녁은 밖에서 먹고 싶은데 이 마을엔 우르르 몰려가기 좋은 그런 데도 없잖아. 아, 도쿄에서 살고 싶다.'
'쓸데없이 술집 따위나 만들고 앉아 있고.'
'도쿄엔 우리 같은 고등학생들을 위한 예쁜 음식점도 많고 먹을 거리도 많겠지? 나중엔 도쿄... 적어도 시골에서 살진 않을 거야. 여기서 지내는 건 진짜 질려 죽겠다니까. 이런 마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난 이제 그 이야기 듣는 게 질려 죽겠다.'
어린 시절에는 그리도 싫어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저려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기억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을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가자. 여기서 할 거 아무것도 없다.'
'그럴까.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 마실래? 입이 심심한데.'
'일단 어디든 가자.'
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나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잠깐 동안 멍하니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둘을 쫓아갔다.
대화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텟시와 사야는 자신들 외의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세계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고등학생 시절에 흔히 나누었을 만한 평범한 대화를 계속할 뿐 위화감을 느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직 사귀기 전의 두 사람은 서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발을 맞추어 걸었다. 나는 세 발짝 정도 뒤에서 두 사람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버스 정류장의 자판기 옆이었다. 사야는 자연스럽게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넣고 캔 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텟시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탓에 나는 선뜻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자판기에 기대 섰다.
'진짜 카페에는 언젠가 꼭 가 보고 싶은데. 팬케이크 같은 것도 팔겠지?'
'가격이야 비싸겠지만. 게다가 그렇게 달달하기만 한 건 질색이다.'
'분위기 깨기는... 남자들을 이래서 눈치 없다고 부르나 봐.'
또 그 쪽 이야기냐며 발끈하는 텟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부터 마을에 만들어져 있던 간이 카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난 살면서 또래 남자라고는 우리 학교 애들밖에 못 봤으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여자의 시선이란 건 그런 거야. 남자 애들이 완전히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그런 걸 일반화라고 하지.'
'진짜 재미없다.'
두 사람은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에 가시를 담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뭐가?'
'정말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나한테서 그런 걸 바라면 어떡하냐.'
'그건 그렇네.'
늘 그렇듯이 둘은 또 티격태격거렸다. 나중에 서로 연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 둘 다 반발하려 하면서도 얼굴을 붉히겠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둘은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전혀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언제나 세 명이 함께 모여 다녔으니 내가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나눌 법도 한데. 지금 있는 세계에서는 '미야미즈 미츠하'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학교에 제법 괜찮은 남자 애들도 있잖아.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애들.'
'글쎄... 그런 놈들도 보통 남자들끼리 있을 땐 썩 어른스러워 보이진 않는데.'
'그런가... 남자들끼리는 뭐 하고 노는데?'
'게임 얘기 하거나, 여자 연예인 얘기 하거나. 난 연예인에 관심 없으니까 잘 끼진 않고.'
'심심하겠네. 주변에 너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약간? 그래도 인터넷 게시판 같은 데서 얘기하면 되니까 심심하다는 느낌은 없다.'
둘은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나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심장이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만약 혜성이 내 목숨을 앗아갔더라도,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나 없이도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겠지.
캔 커피를 눈 깜짝할 새에 다 마셔 버린 텟시가 쓰레기통에 캔을 던져 넣었다.
'이것도 이제 지루하다. 하도 카페 얘기 들었더니 나도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있잖아, 고등학교 졸업하면 같이 상경하자.'
'...'
텟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사야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도 맨날 나한테 그런 소리 하잖아. 회사 별로 안 잇고 싶다든가 하는 거.'
'...그게 좀 표현하기가 애매한데.'
'뭐야, 그게. 이참에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무슨 생각 하는지.'
사야의 눈이 초롱초롱거렸다. 텟시는 일부러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 마을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을 떠나기보다는 내 손으로 바꿔버리고 싶다. 아빠 밑에서 자라면서 별의 별 이상한 꼴을 다 봤고, 뭐. 난 어차피 내 의지랑은 별 상관없이 회사를 이어나가야 되고 그럼 이 마을에서 살 수밖에 없잖냐.'
'그렇구나... 그동안 내가 너무 가볍게 이야기했나. 미안.'
'사과할 건 없고...'
대화가 잠시 끊기고 나에게도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고등학생 때 듣지 못했던 텟시의 진심을 알게 되어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미래에 이 마을은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니까.
꽤 오랫동안 유지되던 정적을 사야가 먼저 깼다.
'텟시, 만약에 이 마을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리면 어떡할 거야?'
'아마도... 일단은 기분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 아무리 썩어빠졌다 해도 태어나서 자란 마을인데 홀랑 사라져 버리면...'
'뭔지 알 것 같아.'
떨어진 초록색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갔다. 해가 지고 있는지 하늘은 점차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다음 이야기를 듣기가 두려웠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넌 어떤데.'
'나? 음... 나도 마냥 들뜨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을이 싫긴 하지만, 매번 욕하면서 미운 정 들었다고나 할까... 몰라.'
'...그렇구만.'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던 몸이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지구의 중력 자체가 점점 강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마치 이제는 이 마을과 다시 작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쨌든 지금은 마을이 싫지만 미래에는 이 이상한 마을을 그리워하기도 하겠지. 향수병이란 것도 있잖아.'
'난 일단 미래에 이 마을을 떠날 수 있을 지부터가 의문이다만.'
'그럼 텟시 네가 이 마을을 바꿔버려.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럴 수 있었음 여한이 없겠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자판기와 그 자판기에 기대어 있는 내 몸을 떨리게 했다. 텟시와 사야가 앉은 벤치 주변의 풍경들은 조각 퍼즐이 부서지듯 점점 희미해져갔다.
'이대로 떠나고 싶지 않아...'
내 의지와는 반대로, 세계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그 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야가 입을 뗐다.
'미츠하는 이 마을을 어떻게 생각할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이 세계에도 미야미즈 미츠하는 존재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마 너랑 비슷하겠지. 아니, 미츠하는 신사 일도 있으니 어쩌면 진심으로 마을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미츠하는 우리보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아니야... 나는 이 마을을 다시...'
처음 눈을 떴을 때와 반대로 눈 앞이 점점 칠흑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미츠하라도 이 마을에서 힘든 일만 겪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잖아.'
'당연하지. 그 녀석도... 나중엔 이 마을을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우리도 더 나이를 먹어 보면 알게 되겠지.'
'멋있는 척 하긴.'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이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 하늘과 이토모리 호수와 미야미즈 신사가 차례로 검은 빛이 되었고 어둠은 사야와 텟시마저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얼마 뒤 눈 앞은 무채색으로 가득 찼고 마을의 풍경은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그 검은색의 물결 속에서 홀로 발버둥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빨간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채 나에게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
그네가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래도 깜빡 졸아 버린 것 같았다.
서쪽 하늘로 사라져 가는 해가 모래 바닥 위에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놀이터는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했다. 나는 앉아 있던 그네에서 몸을 일으킨 뒤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꿈 때문에 몸의 기운이 전부 어딘가로 새어나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비틀거리며 출구 쪽으로 걸었다.
이제는 모두 과거의, 꿈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분명히 어린 시절 내내 싫어해 마지않는 마을이었을 텐데 어째서 그 때의 추억이 이렇게 아련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모든 기억들이, 아픈 기억들마저도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토모리 마을은 티아매트 혜성의 파편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해 지도 상에서 사라졌고 지금 그 장소에는 거대한 호수만이 남아 있다.
모든 마을 주민들은 그 날 대피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마음 속에 각자 큰 구멍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내 마음 속의 구멍 또한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나를 허무감 속에 구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 구멍을 메꾸어 줄 사람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놀이터를 떠나며 고개를 들어 석양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떠난 장소에는 빨간 그네 하나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IP가 바뀌어 있지만 글 최상단에 소개된 두 단편을 쓴 사람과 동일인이 맞습니다.
유동추
열일하네
좋네요. 사실 비슷한 주제로 단편을 계획중이었어요. 대부분 파괴된 이토모리엔 그닥 관심을 안 주더라구요.. 잘 봤습니다 - dc App
ㅗㅜㅑ....
글 되게 좋다. 내가 꿈꾸는 것 같이 멍해지네
잘봤습니다 이런 소재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