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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타키랑은...'

'아, 그거라면 이제 신경쓰지 마. 타키랑은 얘기 끝났어.'

실제로 그 날 이후 타키와 히다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은 없지만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츠카사는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빗으로 머리를 대강 빗어 내리고 일부러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제 너도 일 주일만 있으면 어른이네?'

'고등학교 3년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아쉽긴 하지만, 그만큼 들뜨기도 하네요. 벌써 20대라니.'

'뭘. 이제부터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질 텐데.'

기껏해야 츠카사보다 세 살 정도 많은 나지만 그런 말을 하니 까마득한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츠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버터 쿠키를 한 조각 집어들었다. 나는 이유 없이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머릿결과 피부 상태를 체크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남녀 한 쌍이 거울에 비쳤다.

'선배도 이렇게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네요. 고등학생처럼 손거울 같은 거 항상 들고 다니고.'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 없다는 거 알면서도 괜히 혼자 신경쓰여서 머리 만지고 화장 고치고. 음, 이유는 몰라. 그냥 여자들만 아는 이야기야. 근데 그거 이전엔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보였다는 의미야?'

'조금은요? 워낙 미인이니까.'

'미인이라니, 너무 사탕 발린 말 아니야?'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 말을 건넨 뒤 일부러 츠카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꽤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이다운 면도 있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웃음이 살짝 섞인 미묘한 미소를 흘려 주고 쿠키를 바삭 깨물었다. 밀가루 조각이 부서지며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응. 맛은 어때? 처음 만들어본 건데.'

'단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괜찮아요. 이 가게에서 팔아도 되겠는데요?'

'인터넷에 나와 있던 레시피가 생각보다 괜찮더라. 커피랑 궁합도 좋고.'

그러고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쿠키는 커피 특유의 맛과 잘 어우러져 나쁘지 않은 풍미를 냈다.

토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카페 안은 사람들로 꽤 붐볐다. 대다수의 방문객들은 마주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커플들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츠카사와 나도 그렇게 보이는 걸까. 창문 너머에서 짧은 겨울 해가 비쳐 들어와 눈 앞 풍경의 단면을 밝게 비추었다.

'오늘 날씨 좋네요. 겨울치고는.'

'그러게. 올해 겨울은 생각보다 포근하려나.'

'올해 겨울이라면 포근할 거예요. 문제는 내년부터 갑자기 추워진다는 거지만.'

말장난 아닌 말장난에 피식 웃고 말았다. 츠카사의 표정은 농담을 한 사람치고는 진지했다.

'그거 농담이라고 한 소리야?'

'웃길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농담이라고 한 소리는 아니에요. 그렇게 들렸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세 조각 남은 채로 방치된 버터 쿠키를 두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나는 쿠키 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잠자코 커피를 홀짝거리기만 했다. 대화의 주제는 스스로도 따분하다고 느낄 만큼 상투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가 불러 놓고서는 말솜씨가 이렇게 없어서야.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에게 입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고 생각해 보면 츠카사와 나 사이에 타키와 히다에서의 일을 빼면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키...'

나는 어떻게 타키에 대한 연정과 쉽게 지워지지 않던 미련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데이트를 했던 날 저녁 육교에서 타키와 작별을 고했던 것 자체가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히다의 어느 여관 휴게실에서 츠카사에게 그 사실을 고백할 때까지도 나는 타키를 완전히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타키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는 것은, 따지고 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츠카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세 조각의 쿠키 중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제 두 조각이 남았다. 타키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끝나버린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으니까.

'건축에 관심이 있다고 했나?'

'아, 네. 친구들이랑 같이 카페를 돌아다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이 카페에도 와 봤었는데 건물의 전체적인 조형부터 세부적인 디자인까지 꽤 마음에 들어서 이후에도 몇 번 놀러오곤 했고.'

'음, 제법 전문가 티 나는데?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고 해야 되나? 그래 보여.'

'에이, 아직은 그냥 고등학생 수준이에요. 곧 더 자세히 배우게 되겠지만.'

그 순간 츠카사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고등학생들은 칭찬해주면 좋아하는구나.'

'예?'

'아, 아니야.'

놀려 줄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괜히 얼굴만 화끈거렸다. 무의식적으로 쿠키에 손이 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입 안에서는 버터 맛이 나고 있었다. 남은 쿠키가 하나인 것을 확인하고 최대한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커피를 다시 들이켰다. 종전의 그것보다 조금은 쓰게 느껴졌다.

츠카사는 나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창 밖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꽤 춥긴 하지만 롱 코트를 꺼내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 애매한 날씨. 맑게 갠 12월의 푸른 하늘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어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물든 세상을 품고 있었다.

'평화롭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정말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아마 나의 감정이 확실히 정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츠카사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끊기자 나는 핸드백에 넣어 두었던 소설책 한 권을 꺼냈다. 꺼내기만 하고 펼치지는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 고등학생 때부터 눈도장을 찍어 두었던 책이다. 실제로 읽게 된 것은 몇 년 뒤가 되고 말았지만.

츠카사는 몇 분 뒤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더니 다시 나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내 손에 들려 있는 소설 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책이에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요즘 읽고 있는 소설. 너도 들어봤을 거야.'

'아, 들어보긴 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늘 베스트셀러니까. 어떤 소설이고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직접 설명하기보단 읽어보는 게 좋아. 음, 난 고등학교 때부터 읽어보고 싶었거든. 대학 합격하자마자 서점에서 이 책부터 샀지. 근데 왜인지는 몰라도 3년 정도 집 책꽂이에 처박아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어.'

'왜요?'

'...글쎄. 왜일까. 그렇게 읽고 싶었던 책인데 말이야.'

일부러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려주고 싶어도 스스로도 정말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지금은 시간 날 때마다 읽고 있어. 가을부터 읽었는데 거의 끝나 가니까 아마 내년이 되기 전까진 다 읽지 않을까.'

'느긋하네요. 전 책 같은 건 웬만해서는 하루만에 전부 읽어버리는 편이라.'

'그 쪽이 편한 사람도 있지. 사람마다 읽는 방식이 다르니까.'

단 한 조각만이 남아 있는 쿠키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는 쿠키를 마저 먹는 대신 서로의 음료를 천천히 마시기만 했다. 별 생각 없이 커피 하나를 마시려던 나와는 다르게 츠카사는 녹차를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히다에서도 녹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츠카사, 혹시 녹차 좋아해?'

'네. 정말 좋아해요. 타키나 신타는 이해 못 하는 것 같지만 여행갈 때도 생수 대신 매번 녹차 들고 다녀요.'

'남자 고등학생이 녹차를 그렇게 좋아하는 게 별로 흔한 일은 아니잖아.'

'같이 편의점에라도 가면 그 둘은 콜라나 초코 우유 같은 거 사 오는데 저만 혼자 녹차 마시고 있긴 하죠.'

'흐음, 신기하네.'

문득 커피 대신 녹차를 쿠키와 함께 먹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차 좋아하게 된 이유는 있어?'

'아뇨. 특별히 맛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냥 마음에 들어서 마신다고 해야 되나. 별 이유는 없네요.'

'내가 책 안 읽는 이유랑 비슷하네. 그것도 별 이유 없잖아.'

'세상엔 가끔 그렇게 아무 이유 없는 일도 있는 법이죠.'

아무 이유 없는 일이라, 나에게는 읽고 싶었던 소설을 3년 동안이나 책꽂이에 처박아 둔 일이나 타키에 대한 감정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일 정도가 해당되려나. 그밖에도 몇 가지 짚이는 것들이 있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저 아이도 혹시 나와 같이 아무 이유 없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다시 끊어졌다. 츠카사는 핸드폰 디스플레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간간히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특별히 할 이야기는 없었기에 테이블에 놓여 있던 책을 다시 집어들고 폈다. 책갈피 삼아 쓰던 은행잎과 함께 기억에 희미하게 남은 익숙한 문장들이 보였다.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편한 자세로 앉아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카페를 찾아 시간을 보내다 떠났고 하늘은 어느새 저녁 특유의 오렌지빛 색조로 물들어 있었다. 남은 쿠키에 대해서는 둘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 때 카페 문이 잠깐 열린 틈을 타 강한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은 테이블 위의 은행잎을 쓸어가 버렸다.

'아.'

츠카사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는 눈짓을 보냈다.

'방금 바람이 불었잖아. 책갈피로 쓰던 은행잎을 이 위에 올려놨었는데 바람 때문에 날아가버렸어.'

나는 조금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츠카사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내가 지었던 것과 비슷하게, 비웃음을 약간 섞어서.

'선배도 아직 여고생같이 감성적인 면이 있네요. 은행잎을 책갈피로 쓰다니.'

'좀 웃기긴 하지? 그래도 낭만적이고 좋잖아. 문학 소녀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의외네요?'

'마음대로 생각해. 은행잎 끼워 두면 벌레도 안 꼬인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어.'

내 말을 들은 츠카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심으로 납득한 건지 놀리려는 의도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1980년대 배경의 삼류 청춘 소설에서나 쓰일 법한 소재가 아닌가. 게다가 요즘 세상에 벌레 때문에 은행잎을 책갈피로 쓴다는 말은 더더욱 괴상했다.

'그나저나 이젠 은행잎이 없으니 새로 책갈피 구하기가 어렵겠네. 그냥 서점에서 받은 걸 써야 되나.'

'이제 겨울이니까요... 은행잎을 다시 구하려면 내년 가을은 되어야겠죠. 아마.'

내가 겨우 은행잎 하나에 아쉬움을 느낀다는 사실마저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츠카사의 말대로 아직은 감성이란 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아 안도하기도 했고 반대로 민망하기도 했다. 나는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시곗바늘은 쉼없이 달려가 7시가 되기 몇 분 전의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저녁이네. 저녁은 어떡할래?'

'아,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요. 이만 가봐야겠네요.'

'그래...'

그 말에 뜬금없이 타키와 했던 데이트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 날에는 반대로 타키가 육교 위에서 나에게 그렇게 질문했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겠냐고. 또 타키의 마음이 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나는 저녁 식사 자리를 피하고 그에게 작별을 고했었다. 그에 대해서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믿기로 했다.

츠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갈 채비를 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 아, 이거 마저 먹을래?'

불현듯 머릿속에 쿠키가 하나 남았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나는 마지막 쿠키 한 조각을 집은 뒤 팔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가볍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선배가 만든 건데 마지막은 선배가 먹는 걸로 끝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논리야. 그냥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 말에 츠카사가 다시 웃었다. 웃는 모습만큼은 꽤 어른스러운 아이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럼 반반 나눠 먹어요.'

'그럴까... 앗.'

쿠키는 도저히 반으로 쪼개졌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조각과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나는 일부러 작은 조각을 건넸다.

'큰 건 안 먹을 거지?'

'아마도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녁 맛있게 먹어.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선배도요. 메리 크리스마스.'

잠시 뒤 카페 문이 잠깐 열렸다 닫혔다. 차가운 바깥 공기도 바람을 타고 잠깐 동안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그가 남긴 그림자를 몇 초 동안 눈으로 쫓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입 안에 가득찬 공기를 한숨 쉬듯이 빼내고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내가 만든 자리인데 너무 책만 읽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계속 먹어 보라고 했던 쿠키가 사실은 별로 맛없었던 게 아닐까. 혼자 남은 테이블에서 남은 쿠키를 깨작거리며 조금의 후회감이 들었다.

얼마 전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타키와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념했다. 히다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게 뻔했고 따지고 보면 우리가 특별히 불편한 관계인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평소대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타키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지금도 찾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약간의 고독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타키처럼 나도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나는 외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느껴졌던 고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래, 괜찮아. 이걸로 됐어. 다시 사랑이라는 걸 하고 있으니까. 나는 타오르는 저녁 노을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다시 책을 펼쳤다. 끝까지 스무 페이지 남짓이 남은 소설이, 서서히 대단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