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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처럼 줄지어 늘어선 가로등이 불길한 오렌지빛으로 발광하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밝혔다. 만약 내가 여자의 몸을 하고 있었다면 대번에 불안감을 느끼고 도망치듯이 달려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리는 음침했다. 점포들은 대부분 문을 굳게 닫은 상태였고 아파트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도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집에서 고작 십 분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막상 밤이 되니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한참을 걸어 익숙한 교차로에 다다르고 나서야 스스로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시나노마치 역 앞. 여러 가지 추억이 얽힌 육교 위로 올라가 난간에 기대 섰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반대쪽 길로 가로질러 가지 않고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내려왔다.
검은 우산을 쓴 여자가 옆을 지나갔다. 비가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는데도 여자는 우산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밝은 핸드폰 불빛은 주변 풍경과 융화되지 못하고 아주 어색하게 빛났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안 자는 사람 있냐? | 타치바나 타키, 2021/12/31 02:34 a.m.
시간은 나의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흘러갔던 모양이다. 이제는 저녁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을 것 같은 시간이다. 누군가가 반응해주기를 기다렸지만 늦은 밤인데다 주말도 아닌 날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정확히 3분이 지난 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끝없는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유명 음식점 간판 따위가 그나마 공간 감각을 환기시켰다 한참을 걷다 보니 눈 앞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가게가 보였다. 처음 보는 편의점이다. 덕분에 여기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이 된 심정으로 편의점 안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큰둥하게 나를 맞았다. 이런 늦은 밤에 어째서 편의점 따위 장소에 오는 거냐는 원망이 담긴 눈초리를 받으며 나는 아무 목적 없이 편의점을 배회했다. 출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나가 버리자니 절도범으로 오해를 살 것이 염려되었다. 결국 마시고 싶지도 않은 캔 맥주를 하나 구입하고 말았다.
가게 내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맥주를 따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밝은 곳에서 평화롭게 술을 마시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부질없었다. 물론 아무 이유도 없이 사 버린 술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지만 그래도 이 곳은 싫었다. 술을 산 일과 마찬가지로 그 생각엔 인과라는 게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여전히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르바이트생의 인삿말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걸어나온 다음에야 내가 어디까지 온 것인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야 맥주를 마시기는 커녕 앉아서 다리를 쉬게 할 장소조차 찾을 수가 없다. 서른 걸음 정도를 걷고 나서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그 쪽이 더 수상해 보인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계속해서 걷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야심한 새벽에 집을 뛰쳐나와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걷고 있는 걸까. 현관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밤의 거리를 거니는 동안 그런 의식은 어둠 속으로 조용히 새어나갔다. 최대한 좋은 말로 포장해 봐도 배회, 사실상 방황 중이었다. 마치 나의 인생에서 결코 닿을 수 없는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또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감정. 그 불편함의 응어리가 내 가슴 속에 내려앉아 버린 것은. 스물두 살이 된 지금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인 츠카사와 신타에게도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이 없고 오직 아버지에게만 살짝 밝힌 적이 있는 나만의 고민은 정말 이상한 종류의 것이었다. 일종의 강박증이나 우울장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심리 검사를 받아 보아도 그런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는 소견은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의사들은 나의 내면까지는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한 명의 청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또한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지는 못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알고 있는 나의 지인 중에서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그렇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찾아야 할 그 누군가에게도.
'...이제 됐어. 끝.'
인파가 몰리고 시끌벅적한 곳에서 한참을 찾아다녀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런 밤에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하물며 오늘은 연말이다. 신년의 밤은 모두들 자정이 될 때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버티다가 새해를 축하하지만 그 전 날의 밤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억지로 그 미묘한 감정에 대해 신경을 껐다.
이제는 익숙한 건물이나 표지판도 완전히 사라졌다.. 완벽하게 낯선 세계에 접어든 것이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되는 찰나에 눈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이 단조롭기 짝이 없는 거리에서 무언가 흥미가 동하는 일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그 쪽으로 다가갔다.
앉아 있던 것은 단발 머리를 한 여자였다. 그것도 왜 이런 곳에 왔냐는 의문이 담긴 눈초리를 한.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와 최대한 떨어진 곳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이 세계를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펼쳐졌다. 깊은 새벽이니 버스가 올 리도 만무했고 그렇다고 아침에 오는 첫 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더욱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캔 맥주를 따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이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의 일에 괜히 간섭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미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기."
여자는 미동 없이 공허한 눈으로 앞에 펼쳐진 도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조등을 밝게 켠 승용차 한 대가 쌩 하고 지나갔다.
"저기, 죄송한데..."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는 말 없이 나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 버스 안 와요."
내가 내뱉은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그런 건 도쿄에 사는 사람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소녀다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앳된 목소리였다.
"알아요. 앉을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앉아있는 거지."
나와 비슷한 이유겠거니 하고 잠깐 동안 멍청한 생각을 했다.
"사실 바에 가려고 했는데 연말이라 그런지 문을 닫아 버려서...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어서 그냥 앉아 있어요. 뭐 그래요. 나도 맥주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저라면 몰라도 여자가 이런 데서 맥주 마시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러게요. 그래도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남자가 그러는 것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건 맞는 말이었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밖을 돌아다니다가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니. 성별과 관계없이 정신 이상자로 보이기 딱 좋은 행동이다.
"그 쪽도 혹시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나온 사람이신가요?"
"네, 뭐 비슷하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싶었는데 차라리 집에서 TV라도 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그나마 열린 가게라고는 편의점밖에 없던데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그냥 나와버릴 수는 없어서 맥주를 샀던 거고요."
"저쪽 길로 가면 나오는 거기요?"
그러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가 왔던 길을 가리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갈색으로 염색했고 짧게 깎았고... 뭐 그런 사람이었나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갈색 머리였던 것까지는 알겠는데 짧았는지는 모르겠다.
"네... 갈색 머리였는데 좀 짧은 것 같기도 했고요. 아시는 분인가요?"
"뭐... 안다면 아는 사람이죠. 신경쓰지 마세요."
그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다시 몸을 도로 쪽으로 돌렸다. 편의점 이야기는 그만두자는 신호라고 판단한 나는 입을 다물고 맥주를 입 안에 더 털어넣었다. 알코올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미각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거리를 두고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가끔 차가 지나가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보이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눈 앞의 어둠이 검은 아스팔트로 인한 것인지 지나치게 약한 달빛으로 인한 것인지도 헷갈렸다. 캄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무뎠던 시간 감각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해서 내가 얼마나 오래 여기 앉아 있었는지에 대한 자각도 희미했다.
그런데 그녀와의 짧은 대화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며 말투 따위가 묘하게 귀에 익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처음 보는 여자였고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전에 만났던 기억조차 없는데도. 그렇다고 해서 내 앞에 있는 이 여자가 내가 그동안 찾아다니던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정적을 깬 것은 상대 쪽이었다.
"저기, 혹시 우리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그 말에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과 마주친 적이 있다.
"아아... 아까까지는 몰랐는데 방금 떠올랐어요. 아마 스타벅스 서던테라스점에서..."
"아! 며칠 전이었는데, 오늘이 연말이니까 그 때는 21일이었나? 그 때였죠?"
"맞을 거예요. 옆에 남자 분과 같이 계셨던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여자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엷게 보였다.
"고향 친구에요. 그 날 그 녀석이랑 거기서 딸기 케이크 먹었었는데. 아마 비 오는 날이었죠."
그렇지만 내가 이 여자를 익숙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며칠 전 스타벅스에서의 우연한 스쳐지나감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도 훨씬 큰 이유가 있다.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게 이유는 아닌 것 같아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요."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했다.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몇 초 뒤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녀도 결국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자기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단지 내가 익숙하게 느껴졌을 뿐이라고. 당신이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넌지시 말을 건넸을 때는 역시 그렇겠죠, 하고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바에서 한 잔 할래요? 그 녀석한테는 대강 말해놓을 테니까."
"못 만난다면 그냥 이 정도의 인연이었던 걸로?"
"뭐, 그렇게 되겠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오히려 그 쪽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그런 예감도 있고. 여자의 감각이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내가 내밭은 말치고는 솔직한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대화가 끊겼다.
이 여자의 말처럼 당장 내일에라도 그 사람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그녀와 나는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이 정도의 인연이겠지. 그 말을 몇 번 곱씹어 보았다. 강하게 엮인 실이 잘 풀리지 않듯이 우리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직감했다. 내년, 아니면 내후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한 발짝씩 가까워지고 있다.
달이 서쪽 하늘로 기울었다. 가로등이 만들어낸 그녀의 '낯선' 그림자가 도로 위에 길게 새겨졌다. 새해까지는 이제 스무 시간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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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처럼 줄지어 늘어선 가로등이 불길한 오렌지빛으로 발광하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밝혔다. 만약 내가 여자의 몸을 하고 있었다면 대번에 불안감을 느끼고 도망치듯이 달려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리는 음침했다. 점포들은 대부분 문을 굳게 닫은 상태였고 아파트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도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집에서 고작 십 분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막상 밤이 되니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한참을 걸어 익숙한 교차로에 다다르고 나서야 스스로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시나노마치 역 앞. 여러 가지 추억이 얽힌 육교 위로 올라가 난간에 기대 섰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반대쪽 길로 가로질러 가지 않고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내려왔다.
검은 우산을 쓴 여자가 옆을 지나갔다. 비가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는데도 여자는 우산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밝은 핸드폰 불빛은 주변 풍경과 융화되지 못하고 아주 어색하게 빛났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안 자는 사람 있냐? | 타치바나 타키, 2021/12/31 02:34 a.m.
시간은 나의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흘러갔던 모양이다. 이제는 저녁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을 것 같은 시간이다. 누군가가 반응해주기를 기다렸지만 늦은 밤인데다 주말도 아닌 날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정확히 3분이 지난 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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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유명 음식점 간판 따위가 그나마 공간 감각을 환기시켰다 한참을 걷다 보니 눈 앞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가게가 보였다. 처음 보는 편의점이다. 덕분에 여기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이 된 심정으로 편의점 안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큰둥하게 나를 맞았다. 이런 늦은 밤에 어째서 편의점 따위 장소에 오는 거냐는 원망이 담긴 눈초리를 받으며 나는 아무 목적 없이 편의점을 배회했다. 출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나가 버리자니 절도범으로 오해를 살 것이 염려되었다. 결국 마시고 싶지도 않은 캔 맥주를 하나 구입하고 말았다.
가게 내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맥주를 따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밝은 곳에서 평화롭게 술을 마시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부질없었다. 물론 아무 이유도 없이 사 버린 술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지만 그래도 이 곳은 싫었다. 술을 산 일과 마찬가지로 그 생각엔 인과라는 게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여전히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르바이트생의 인삿말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걸어나온 다음에야 내가 어디까지 온 것인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야 맥주를 마시기는 커녕 앉아서 다리를 쉬게 할 장소조차 찾을 수가 없다. 서른 걸음 정도를 걷고 나서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그 쪽이 더 수상해 보인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계속해서 걷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야심한 새벽에 집을 뛰쳐나와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걷고 있는 걸까. 현관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밤의 거리를 거니는 동안 그런 의식은 어둠 속으로 조용히 새어나갔다. 최대한 좋은 말로 포장해 봐도 배회, 사실상 방황 중이었다. 마치 나의 인생에서 결코 닿을 수 없는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또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이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감정. 그 불편함의 응어리가 내 가슴 속에 내려앉아 버린 것은. 스물두 살이 된 지금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인 츠카사와 신타에게도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이 없고 오직 아버지에게만 살짝 밝힌 적이 있는 나만의 고민은 정말 이상한 종류의 것이었다. 일종의 강박증이나 우울장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심리 검사를 받아 보아도 그런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는 소견은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의사들은 나의 내면까지는 꿰뚫어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한 명의 청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또한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지는 못했다. 적어도 아버지가 알고 있는 나의 지인 중에서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그렇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찾아야 할 그 누군가에게도.
'...이제 됐어. 끝.'
인파가 몰리고 시끌벅적한 곳에서 한참을 찾아다녀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런 밤에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하물며 오늘은 연말이다. 신년의 밤은 모두들 자정이 될 때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버티다가 새해를 축하하지만 그 전 날의 밤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억지로 그 미묘한 감정에 대해 신경을 껐다.
이제는 익숙한 건물이나 표지판도 완전히 사라졌다.. 완벽하게 낯선 세계에 접어든 것이다. 슬슬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되는 찰나에 눈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이 단조롭기 짝이 없는 거리에서 무언가 흥미가 동하는 일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그 쪽으로 다가갔다.
앉아 있던 것은 단발 머리를 한 여자였다. 그것도 왜 이런 곳에 왔냐는 의문이 담긴 눈초리를 한.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와 최대한 떨어진 곳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이 세계를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펼쳐졌다. 깊은 새벽이니 버스가 올 리도 만무했고 그렇다고 아침에 오는 첫 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더욱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캔 맥주를 따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들이켜 목을 축이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의 일에 괜히 간섭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미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기."
여자는 미동 없이 공허한 눈으로 앞에 펼쳐진 도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전조등을 밝게 켠 승용차 한 대가 쌩 하고 지나갔다.
"저기, 죄송한데..."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는 말 없이 나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 버스 안 와요."
내가 내뱉은 말은 고작 이것이었다. 그런 건 도쿄에 사는 사람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소녀다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앳된 목소리였다.
"알아요. 앉을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앉아있는 거지."
나와 비슷한 이유겠거니 하고 잠깐 동안 멍청한 생각을 했다.
"사실 바에 가려고 했는데 연말이라 그런지 문을 닫아 버려서...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어서 그냥 앉아 있어요. 뭐 그래요. 나도 맥주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저라면 몰라도 여자가 이런 데서 맥주 마시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러게요. 그래도 굳이 여자가 아니라도 남자가 그러는 것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건 맞는 말이었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밖을 돌아다니다가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니. 성별과 관계없이 정신 이상자로 보이기 딱 좋은 행동이다.
"그 쪽도 혹시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나온 사람이신가요?"
"네, 뭐 비슷하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싶었는데 차라리 집에서 TV라도 볼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그나마 열린 가게라고는 편의점밖에 없던데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그냥 나와버릴 수는 없어서 맥주를 샀던 거고요."
"저쪽 길로 가면 나오는 거기요?"
그러고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가 왔던 길을 가리켰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갈색으로 염색했고 짧게 깎았고... 뭐 그런 사람이었나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갈색 머리였던 것까지는 알겠는데 짧았는지는 모르겠다.
"네... 갈색 머리였는데 좀 짧은 것 같기도 했고요. 아시는 분인가요?"
"뭐... 안다면 아는 사람이죠. 신경쓰지 마세요."
그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다시 몸을 도로 쪽으로 돌렸다. 편의점 이야기는 그만두자는 신호라고 판단한 나는 입을 다물고 맥주를 입 안에 더 털어넣었다. 알코올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미각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거리를 두고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가끔 차가 지나가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보이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눈 앞의 어둠이 검은 아스팔트로 인한 것인지 지나치게 약한 달빛으로 인한 것인지도 헷갈렸다. 캄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무뎠던 시간 감각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해서 내가 얼마나 오래 여기 앉아 있었는지에 대한 자각도 희미했다.
그런데 그녀와의 짧은 대화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며 말투 따위가 묘하게 귀에 익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처음 보는 여자였고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전에 만났던 기억조차 없는데도. 그렇다고 해서 내 앞에 있는 이 여자가 내가 그동안 찾아다니던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정적을 깬 것은 상대 쪽이었다.
"저기, 혹시 우리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그 말에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과 마주친 적이 있다.
"아아... 아까까지는 몰랐는데 방금 떠올랐어요. 아마 스타벅스 서던테라스점에서..."
"아! 며칠 전이었는데, 오늘이 연말이니까 그 때는 21일이었나? 그 때였죠?"
"맞을 거예요. 옆에 남자 분과 같이 계셨던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여자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엷게 보였다.
"고향 친구에요. 그 날 그 녀석이랑 거기서 딸기 케이크 먹었었는데. 아마 비 오는 날이었죠."
그렇지만 내가 이 여자를 익숙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며칠 전 스타벅스에서의 우연한 스쳐지나감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도 훨씬 큰 이유가 있다.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게 이유는 아닌 것 같아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요."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말했다.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몇 초 뒤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녀도 결국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자기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단지 내가 익숙하게 느껴졌을 뿐이라고. 당신이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넌지시 말을 건넸을 때는 역시 그렇겠죠, 하고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바에서 한 잔 할래요? 그 녀석한테는 대강 말해놓을 테니까."
"못 만난다면 그냥 이 정도의 인연이었던 걸로?"
"뭐, 그렇게 되겠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오히려 그 쪽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그런 예감도 있고. 여자의 감각이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내가 내밭은 말치고는 솔직한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대화가 끊겼다.
이 여자의 말처럼 당장 내일에라도 그 사람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그녀와 나는 이후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이 정도의 인연이겠지. 그 말을 몇 번 곱씹어 보았다. 강하게 엮인 실이 잘 풀리지 않듯이 우리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직감했다. 내년, 아니면 내후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한 발짝씩 가까워지고 있다.
달이 서쪽 하늘로 기울었다. 가로등이 만들어낸 그녀의 '낯선' 그림자가 도로 위에 길게 새겨졌다. 새해까지는 이제 스무 시간도 남지 않았다.
유동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미츠하로 추정되는 여자의 인상이 조금은 희미하네요
ㅓㅜㅑ..... - dc App
사야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