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0님께서 보내주신 신청곡입니다. 이 곡을 마지막으로 듣고 싶네요. 항상 그리워하며 찾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어떤 사연이실까요, 이런 사연을 들을 때마다 참 안타까워요. 잘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끝 곡, 박효신의 좋은 사람 보내드리며 4월 29일 푸른밤 마치겠습니다. 저는 내일도 곁에 있겠습니다. 내일도 쉬러 와요.」
취업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공부나 면접 연습을 하거나, 서류를 몇 번이고 고쳐쓰다보면 외로움과 함께 자괴감이 엄습해온다.
그래서, 말을 걸 사람도, 말을 걸어줄 사람도 없어서 들인 습관이다.
단방향 통신이라도 그저 배경음처럼 흘러가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게 참 좋다. 편안해진다.
다른 시간대에는 그날 기분 따라 듣는 방송이 달랐지만,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이 시간에는 주파수를 항상 고정해두었다.
담담한 목소리를 가진 디스크쟈키의 저 클로징멘트가 너무도 좋다. 마음에 들었다. 내 곁에 있어주겠다는 말이.
내 가슴 한 켠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몇 년 째 자리잡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곁에 있어야 할 누군가가 그 심연 속에 잠들어 있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어도 그 공허감만은 채워지질 않았다.
대리만족일까, 그래서 나는 더더욱 저 클로징멘트에 집착하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을, 항상 이 시간에 내 곁에 있어주겠다는 말이 고마웠다.
좋은 사람 사랑했었다면 헤어져도 슬픈 게 아니야
이별이 내게 준 것은 곁에 있을 때보다 너를 더욱 사랑하는 맘
오래된 애상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4860, 이 방송에서 자주 들은 번호이다.
새벽 2시, 마지막 곡으로 저런 곡이 나오면 괜스레 슬퍼졌다.
청승맞게 옷을 대충 챙겨입고 아직은 추운 밤거리로 나서게 된다. 오늘 밤은 공친 것이다.
나는 도시의 풍경을 좋아한다. 특히 밤거리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어둠이 빛을 몰아내려 하지만 불 켜진 등불이 드문드문 세상을 밝히고 있는 풍경.
이 거리 어디선가 내가 잊은 그녀도 잠 못 이루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감상에까지 젖게 된다.
수많은 사람과 생각들이 녹아들어 있는 거리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압도되곤 한다.
이 도시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예전에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이토모리라는 작은 마을에 운석이 떨어졌을 때.
그래서 나는 모두가 알던 풍경을 지켜낼 수 있는 건축업계를 고집하고 있다.
아마 그 이토모리와 내 가슴속 어두움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 이토모리에 다녀온 직후부터였으니까.
그 공허함의 이유를 찾기 위해 기억을 뒤져보아도 내가 어째서 그 곳으로 향했고 무엇을 했는지가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거기서 분명 만나고 또 잊어버린 누군가의 이름도, 얼굴도.
남아있는 것, 비게 된 것은 가슴 한 켠과 공연히 오른손바닥을 쳐다보게 되는 습관뿐.
나는 분명 지금도 그 사람을 그리고 있다. 이 마음을 채워줄, 내 곁에 항상 있어줄 그녀를.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된 날에는 듣고싶어지는 노래가 있다.
맞아도 좋을 정도의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랜 습관으로부터의 귀갓길이다. 나는 예전부터 줄곧 밤을 좋아한다.
내 생활을 간섭하던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 학생 무렵부터 고요한 밤길을 혼자서 걷곤 했었다.
밤길을 걷다보면, 예전 그 사람의 향기가 공기에 묻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잊고 그 향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마음에 든다.
집앞으로 뻗은 골목길에 들어서, 문득 빈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는 빈 손바닥.
이 손으로 곧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사람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 무언가를, 누군가를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몇 년 째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결국 이름모를 그와의 이별이 내게 준 것은, 그를 더더욱 그리게 되는 마음뿐이었다.
남들과 똑같이 대학에 진학해, 사회 초년생이 되었지만, 혼자서는 버티기 힘든 시련들이 너무도 많았다.
내 버팀목이 되어줄 누군가를 원했다.
그 누군가는 찾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마음 속 공허함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한동안 가로등 밑에 서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아까 끄지 않았던 라디오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라디오는 참 좋다. 24시간 내 곁을 함께해줄 수 있는 존재니까.
수 년 간, 나를 계속 괴롭히던 상실감과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준 고마운 매체이다.
귀에 익은 디스크쟈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280님 신청곡입니다. 밤거리를 홀로 걷다보면 듣고싶어지는 노래입니다. 잊어버린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밤이네요. 라고 보내주셨는데요, 잊어버린 그녀라, 멋진 표현이네요. 헤어진 그녀, 예전 그녀라는 표현은 들어봤어도 잊어버린 그녀라는 표현은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잊어버린 기분은 어떨까요, 꼭 그녀와 다시 만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신청곡, 윤하의 그 거리.」
참 얄궂은 사연이다. 얄궂다고 믿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과 똑같았다.
웃음까지도 그댈 따라 가버린 거리 찬비가 내리는 그거리를 따라
어느사이에 들어선 까만 골목길엔 그대가 없어도 그대의 향기가 나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는 이미 알고있었다. 사무치는 슬픔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잊어서는 안 될 사람. 잊고싶지 않은 사람.
누굴까, 어디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0년 가까이 나오지 정답이 나오지 않고 있는 대답없는 질문이 계속된다.
한두번도 아닌 이별이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걸
알고 있는데 난 어떡해야 할지 몰라 그거릴 혼자 걷는 나를..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를 다시 만나,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묻고싶다.
너도 나를 그리고 있었냐고, 너도 나를 사랑했었냐고. 이제 앞으로 영원히 함께하자고.
창밖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이 도시 어디엔가 있을 그 사람을, 나는 아직도 그리고 있다.
잠와서 읽지를 못하것다 일단 개추 - dc App
날아라 - dc App
와 미친;; 글 너무 잘쓰신다...
아 왜케 글이 세련됐냐 와... 너무 좋아요... 역시 재야의 고수다
잠이 덜 깼는데도 술술 읽히네
단어선정도 그렇고 가요 두개를 섞은 것도 그렇고 멋지군요 - dc App
아아........... 난 망했다...
이거 완전 반칙아닙니가 글 존나 잘쓰는 반칙 - dc App
라디오.. 여태까지 보지 못한 소재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이런 멋진 글을 써오시다니... 잘 봤습니다!
후편 보고 싶네 퍄...
아닛 언제 나왔지
잘 쓰셨네요 설정도 그렇고 그에 따른 전개가 좋습니다
군더더기 없네요 잘 봤습니다.
라디오라니 소재 선정이 탁월하다. 단방향 통신인 것 같지만 또 둘이 알게 모르게 이어져있는 게 좋네. 깔끔한 문장과 잔잔한 느낌 덕에 읽기 편하다 잘 봤어
이건 진짜 잘적으셨네요. 너무 짧은게 아쉬울뿐 ㅠㅠ 라디오라는 소재로 이렇게 세련되게 표현하실 수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ㅎㄷㄷ
핫산하시던 실력 어디안가네요. 세련되고 간결한 문장 매우 좋아요... 이건 태클걸데가 없어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새벽감성 터졌을때 쓱 써내린거라 분량이 짧은게 저도 걸리네요..
정신 차리니까 다 읽었네... 짧은 것도 이유겠지만 흡입력이 좋은 것도 한몫 하는 듯. 타키미츠에게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라 더 재미있게 봤네요. 타키가 잃어버린 것이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유는 이토모리에 다녀온지 얼마 안 된 시점이려나요?
본편에서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찾고 있다고 했지만, 이 단편에서 타키와 미츠하에게 결여되어 그리고 있는 것은 잊어버린, 버팀목이 되어줄 누군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썼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정말 세련됬다는 말밖에 안나오네요. 잘 버무려진 연출과 주인공의 독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밤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집에 돌아와서 듣는 라디오 노래가 정말 공감되네요. 덕분에 끊기지 않고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라. 감상평 남긴 줄 알았는데 빼먹었었네요... 뒤늦게나마 남기자면, 상당히 문체가 세련되고 간결한 편이라 읽기가 편했습니다. 그 점은 매우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미지의 나열과 감정의 서술이 거의 전부인지라 좋게 말하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시같은 인상이 들고, 나쁘게 말하면 소설로써의 서사 구조는 조금 빈약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몇 자 되지도 않는 짧은 문인지라 그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ㅠㅠ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초속 느낌나는 현실적이 타키를 만나기전에 미츠하를 볼수있어서 좋네요!
깔끔하면서도 과장되지 않고 절제된 느낌이 좋습니다. 박효신과 윤하가 다 일본 활동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어색함이 좀 덜하네요. 서로가 그, 그녀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리움과 애절함을 더하는 것 같네요
라디오라는 어떻게보면 이제는 좀 아날로그적인 장치를 사용해 더욱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적으로는 라디오에 성시경의 너는 나의 봄이다를 신청해 나왔던게 생각났어요 이게 그냥 나올때와 신청곡이 나올때의 느낌이 또 다르더군요 .. 주변 배경과 노래 가사 그리고 글자 크기를 조절해 강조한 연출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비교적 길진 않지만 글이 참 진국이라고 느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