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라워라, 아야아야 바늘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이어 본들 속절없고 하릴없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제침문


마을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다. 연달아 번복된 방송에 혼란스러운 탓이다.
미야미즈 가문의 권위가 아니었다면 불만이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아직 조금 남아있다.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면 거대한 에메랄드빛 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재앙은, 여전히 아름답다.


무수히 반짝이는 빛이- 찬연한 빛을 뿜어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눈부신 광채를 보노라면, 이것이 몹시 뜨겁고, 위험하다는 사실 따위는 금방이라도 잊어버릴 것만 같다.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대피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그것은 분명 꿈속 풍경처럼 한 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더 지났을 뿐인데
두 갈래로 갈라진 별이 미친 듯이 덩치를 불려간다.


언젠가 떨어지는 모습을 봤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다음부터는 납작 엎드려 있었으니까.
어차피 자연의 폭거 앞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미래를 볼 줄 안다 하더라도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뭘 하든 위험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온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없다.


죽음을 거의 피했음에도 두려움으로, 무력감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온몸이 전부 심장으로 변한 것처럼 쿵쾅거린다.


나는 살고 싶어. 별이 떨어지더라도, 나는 살고 싶어.


이윽고
별이 떨어진다.


굉음이 울려 퍼진다.
폭음이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며 내려앉는다.


쿵.


갑자기,
잠에서 깼다.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침대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여전히 도시 생활이 익숙하지가 않다.


요츠하가 알면 또 놀릴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이곳에서 꽤 오래 살았는데 묘하게 익지 않는다.

좁은 방이 여전히 익숙지 않다.
전학 온 학교의 교복도, 새로 바른 서양식 벽지도...

모든게 여전히 설익은 채로 있다.


심장이 어딘지 모르게 답답했다.


아까는 역시 꿈인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감각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을이 눈앞에서 통째로 사라지는 일을 겪는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무심코’라기엔 너무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좋아해’


별이 떨어지던 날, 자신의 손에는 그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증표였다.


이미 지워진 지 오래건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선명한 글씨..


"좋아해..."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내뱉은 말이 어쩐지 부끄러워져 몸을 비틀었다.


어쩐지 그리운, 삐뚤빼뚤한 글씨.


좋아해.


어쩐지 그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속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남긴 유일한 것.


이것을 기억만 한다면 어쩐지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난다면 분명  알아 볼 것이다.


자신의 어딘가는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기억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만, 언젠가는...


갑자기 두려움이 솟구쳤다.
잊어버릴지도 몰라.


언젠가는 분명 잊어버리겠지.


불안해졌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글씨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종이에 써버린다면 잘못 외워버릴 것만 같았다.

 
온전히 따라 할 수 있을 리 없다.


좋아해.
그래 도 좋아해.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나랑 같이 있었어.
믿어.. 그러니 제발.


잊혀지지 말아줘.



좋아해.


이해가 가진 않지만, 누군가 내 손에 그 글을 썼어.
그런데, 잊어버린다면,



만약,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너를 어떻게 찾지?


혹시 나도 너에게 같은 글을 썼을까?
그래서 내가 잊더라도 네가 나를 찾아 줄까?


그것만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찾아야만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나는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뭔가를 찾아다녔다.


서랍 속 같은 곳에 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뭔가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한참을 찾아 헤매고 나서야 자신이 지갑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에?
 
물벼락을 맞은 듯 깜짝 놀라 부르르 떨었다.


 기후현으로 가는 최단 거리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기후현으로 갈만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풉.

하. 하. 하.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나올수 밖에. 나올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 간다고 만나질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가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만약 가서, 없다면?
혹시 있더라도 지나친다면?


사실 누군지도 모르는걸.


꿈일지도 몰라.
아니, 신님일지도 몰라.


차라리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꿈만 꾼다면.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뭔가 혼란스러웠다. 마음이 아팠다.
뭔가 원인 모를 억울함이 마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쿠미히모를 꺼내 움켜쥐곤, 침대 위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이 녀석이라면 알까?
응?


너는 아니?


에게는 확신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끈에는 그날 밤과 전날 밤 사이의 알지 못할 공백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뭔가 일이 있었다. 기억하지 못한 사이에 뭔가 있었다.
이런 일은 전혀 모른다는 게 오히려 증거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 녀석은 모든 비밀을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끈만은 유일하게 모든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알아야만 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줬었고, 다시 돌려받은 것이어야만 했다.


이 끈은  뭔가와 이어져 있다.
이 끈이라면 그 사람과 이어져 있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
 
쿵,
하고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요츠하의 얕은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요츠하는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고작 그것뿐이라면 요츠하는 아마 다시 잠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요즘 들어 꽤 자주 일어났으니까.


그렇지만 요츠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어쩐지 눈이 말똥말똥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저 소리가 요츠하의 정신을 깨운 주범일 것이다.


뭔가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요츠하는 이런 종류의 소리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요츠하는 벽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목조건물의 벽 사이인가, 어딘지 모를 통로로 들리는 소리는 실낱같아서 금방이라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얼마나 들었을까, 요츠하는 드디어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여자애가 흐느끼는 소리다.




그러니까
분명 언니의 울음소리다.


 지금 이 집에 여자애라고는 언니와 자신뿐인데, 자신은 울고 있지 않으니 언니의 울음일 것이다.


이 결론은 요츠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결론이다.


언니가 울고 있다.


언니가 왜?

요츠하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기에 언니는 일단 잠들면 쉽게 깨어나지 않는다.
 
고작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울 언니가 아닌 것이다.

요츠하는  신사가 불타기전, 청소를 하기 위해 낮잠을 자던 언니를 깨우려 했을 때를 떠올렸다. 판단 완료.

언니는, 미츠하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새삼 솟구친다.


애초에 언니는 두들겨 패더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에. 생각보다 훨씬 더 수상쩍다.
그렇다면 언니는 왜 우는 걸까?


이런 것도 어른의 사정인걸까?
중학생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어른에 가까워지면,
그때는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초등학생에 불과한 요츠하로서는 알 수 없다

.

지금 달려들어서 위로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뭘 하지?


불행히도 이럴 때 어찌 대처하는가에 대한 지침은 여성지에서 본 일이 없었다.

남자 친구를 위로하는 팁은 충분히 많던데. 언니에게 써먹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실 친구였더라도 위로하는 일은 썩 편하지가 않은 일이다.



요츠하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다가가 맹장지문을 열었다.
울고 있을 때 들어가는 것이 뭔가 안 좋은 일을 일으킬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근본이 다소 희박한 걱정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맹장지문의 틈새로 언니가 살짝 보였다.


조금 더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내밀어 본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한 끝에 이미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확적하게 보였다.

언니가 쿠미히모를 쥔 체 잠들어 있었다.

 

왜 쿠미히모를 쥐고 잠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잠들어 있다.

대충 그런듯 하다.


요츠하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잘못 들은 거였나.


그런 거겠지.

요츠하는 대충 주장하고 대충 동조했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괜히 걱정이나 끼치고. 확, 몰래 아이스크림을 먹을까보다.


요츠하는 투덜거리면서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요츠하는 결국 문을 닫고 나가지는 못했다.


무슨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서 무슨 말인지 확적치가 않았지만.


분명 목소리였다.


요츠하는 다시 살며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아.


요츠하는 새삼 놀라 물러섰다


언니가 말을 했다.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기억나지.. 않아?”


무슨 말이지?

요츠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잠꼬대라고 넘기기엔 언니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혹시 언니가 깨어 있었나?
그렇다면 혹시 눈을 감고만 있는 건가? 도대체 왜?


그러고 보면 요츠하도 가끔 눈을 감고 가만히 있곤 했다. 명상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음. 어쩌면 명상이 별로 거창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요츠하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기기로 했다.


요츠하는  일단 기척을 최대한 줄였다.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으니, 좀 더 지켜볼 심산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가면 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아무튼 들키지 않고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느낌으로는 그렇게 한참은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


그렇지만 언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중얼거리지도 않는다.


단지 쿠미히모를 힘껏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언니는 여전히 잠든 채다.


그러니까, 아까 그건.
그냥 잠꼬대다.


그런 것이다.
언니는 결코 깨지 않는다.


요츠하는 잔뜩 긴장했던 게 허무해져 넘어질 뻔 했다.
그렇지만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언니는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를 것이다.


“언니.”


요츠하는 이불을 언니에게 덮으며 중얼거렸다.

언니가 들을 리가 없는데도.


“언니”

언니가 무슨 꿈을 꿔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우린 혼자가 아니야”


동쪽 들판에 서광이 비치고
돌아보니 서쪽 하늘에 낮게 뜬 하현달이 보이네


나는 달린다. 산짐승이 내어놓은 어두운 길을
그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그저 달린다.
--, --, -- ,
—걱정 하지 마, 기억하고 있어. 절대로 안 잊어버려.
거친 숲속을 헤치면서도 그렇게 중얼거린다.


펜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 --, 기억하고 있어. 하고 다독이며, 끝없는 터널을 달려나간다. 


이내 나무들 사이로  불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길도 짐승이 낸 길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낸 오솔길로 변모해 간다.


저 멀리서 이토모리가 보인다.


그 순간,
잠에서 깼다.


휴일이라고 지나치게 오래 잔 모양이다.
온 몸이 뻐근했다.


머리는 깨어났지만 몸은 거의 마비된 듯 움직여지지 않는다.
감촉조차 마비감을 느낀다.
온 몸의 신경이 꽉 닫혀있다 천천히 연결된다.


갑자기, 얇은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둔한 머리가 갑자기 요츠하를 떠올렸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나서야 간신히 요츠하와 이불의 인과 관계를 연결해 낸다.
요츠하가 왔었나.


머리가 아프다.
마치, 한참을 운 것처럼.


그래. 울었지.

...
나, 운거구나.
꼴사납게.


그렇지만, 나는 어쩌면 좋지?

미츠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차라리 꿈인 줄 알았다면 깨지 않았을 텐데.
좀 더 잠들어 있었다면, 좀 더 피곤했더라면 누군지 기억해 내었을지도 모르는데.
.
... 그렇지만 이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울어서인지, 마른 울음인지는 모르겠다.


****


사야는 결국  몇 번이고 걸려오는 낯선 전화번호를 받았다.

차단기능이 익숙핟지 않아 계속 수동으로 끊다보니 어쩌면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연락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예전에 살던 마을 사람들의 소식이라던가.


혹시 장례식?


 마을 사람들의 평균 연령대를 생각해보면 꽤 그럴듯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끊어버리기가 더 더욱 부담스러웠다.
사야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요츠하였다.



사야카는 긴장이 풀린 나머지 전화번호를 바꿨으면 진작 연락을 했어야지. 라고 말을 할뻔 했다.


사야카는 겨우 그 말을 씹어 삼키곤,  왜 그렇게 다급히 전화를 했냐고 물었다.


일단, 요츠하는 허튼 소리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뭔가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왜 찾았을까?


“우리 언니,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어?”
“갑자기 왜?”
“이상한 짓 안 해?”
“이상한?”“응”


“응, 그럼 사야도 잘 모르겠네. 그렇지만 혹시....”


요츠하는 언니가 온종일 울었다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하던데  혹시 짚이는 데가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걸 어떻게 알아.
 
사야는 참 요츠하답다고 생각 하면서도,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야는 전혀 모르는 일이였으니까.


전화를 걸려고 SNS를 한참 뒤적거렸다기에 텟시의 연락처를 준 것이 나토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미츠하의 상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사야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미츠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극도로 적다는 것도.


자신이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왔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미츠하의 진짜 가족은 아닌 것이다.


미츠하의 성격이라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숨죽이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미츠하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자신에게도. 어쩌면 가족에게도.


눈치 챘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위로 했어야 했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한참을 노력해 보았지만, 사야는 끝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텟시 인가? 살짝 걱정해 보지만 미츠하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텟시는 미츠하에게 남자애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사야는 요츠하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누군가를 계속 찾고 있었다고...
잊어버렸다고. 언니가 말했노라고.


누군가..

누군가...


“아.”

뭔가 생각이 났다.


나토리는 텟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적절한 타이밍에 전화가 끝났다.
도쿄로 오고나서부터는 하교중인 사야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운이 좋았다.


요츠하는 비척비척 걸어오는 언니를 바라보며 다소 안도했다.

어쩐지 사야카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요츠하는 자존심이라는 것에 묘한 속성이 있어서, 마음을 크게 상처 입힐 수도 있다는 것쯤은 벌써 알고 있었다.


만약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언니가 괜히 걱정한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풀에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상처 입을 것이다.  언닌 평소 무심하게 구는 사람치고는 마음이 지나치게 여렸다.

어쩌면 마음이 여려서 보호할 것이 필요해서 무심하게 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들이 들킨다면 언니는 “어른의 문제거든” 같은 말이나 하고 마음의 문을 딱 닫아버릴지도 모른다.

평소는 뒤끝없이 금방금방 넘어가는 성격이지만, 어느 선을 넘는다면 영원히 말을 섞으려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츠하는 언니와 사이가 갈라지는 게 무서웠다.

 

요츠하는 어른의 문제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심각한가 고민에 빠졌다.


언니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본능적으로 화제를 돌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츠하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잖아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어른의 문제…. 그것이 어떤 문제들이기에 언니가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 걸까?

언니는 어떻게 그런 비밀을 터득한 걸까?



눈에는 보여도  손으로는 잡지 못할  달 속의 계수나무처럼  그녀를 어쩌면 좋으리

  (만요슈 4·632)



텟시는 끊고 나서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온 사야의 전화가 다소 놀랍긴 했지만,
나름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아무 이유없이 전화할 리 없다는 사야카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울먹이는 사야카를 달래느라 왜 다시 전화 했는지 이상함을 느낄 시간이 없었기 때문도 있었다.

이런 보모 일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인데...
하면서도 결국은 받아주고 마는 것이다.


텟시는  본론은 듣지도 못한 채 한참을 어르고 달랜 끝에야  겨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혹시 미츠하가 이상한 일 하거나 한 적 없어?”

아니,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사야카가 다시 울먹였다.


아마도 무녀님(웃음)에게 뭔가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텟시는 이거 야단 낫군. 하고 생각하면서 다음 말을 경청했다.


사야의 말은 의외로 심각했다.


미츠하가 집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다는데, 자신은 미츠하의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학교에서 밝아져서 이토모리를 벗어나면서 다 끝난 줄 착각했었다고. 


요츠하가 언니가 울면서 누굴 찾더라는 데,  혹시 너는 누군지 아느냐고.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어서...


어디선가. 어디선가 뭔가를 들었던 것 같긴 하다.

텟시는 잘 모르겠지만 짚이는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말하곤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끊어진 다음, 한숨을 쉬기도 전에  곧장 요츠하의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요츠하도 대략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 내에 알 수 있을 리 없다.

텟시는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요츠하가 사야가 같은 전화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텟시는 이번에도 잘 모르겠다고, 기억나면 연락하겠다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려는데 돌연 어떤 생각이 났다.


함수폭약을 터트리고 나서였나?

아니면 터트리기 전이였던가?


그때 미츠하가 갑자기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사람이 달라진것 같았는데...


요츠하가 말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아마 미츠하가 그때 잊은 그 사람일 것이다.

 


텟시는  어쩌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TSD…. 잘은 모르지만, 사람은 갑작스런 일을 겪으면 마음이 다칠 수도 있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도 자주 나오는 일이다.

 

텟시는 요츠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려다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텟시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으니까.


“혹시 어디 아파?”


수화기에 들려오는 요츠하의 말에 텟시는 기억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노라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라고.


◆◆◆◆◆◆

텟시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딱히 별다른 이야기가 돌아오진 않았다.


건진것도 신통치는 않았다.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요츠하는 당시 언니가 했다는 말을 몇 번 중얼거려 보았다.


햐.


이런 말을 언니가 했다고?


솔직히 말해서,
확실하게 말하자면,
엄밀하게,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대사다.


오, 좀 오글거렸어.

요츠하는 부르르 떨었다.


뺨을 철썩철썩 때려보지만 여전히 좀 그렇다.


정말 언니가 이런 말을 했단 말이지....
믿음이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믿기지는 않지만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 덩치만 큰 남학생은 쩨쩨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언니는 그때 조금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걸까?


텟시 주장과 내가 본 것을 종합하면...


1. 미츠하는 사랑을 했음이 틀림없다.
2.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잊어버렸다.
3. 그래서 슬프다.



1.번과 2번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2번이 일어난단 말인가.
3번은 무슨 드라마인가.


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요츠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야. 아프다.


요츠하는 괜히 뜯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우선 1번부터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2번은 1번이 있어야 성립된다.
그리고  그 사이, 1.5번으로 추정되는 뭔가는 숫제 마법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3번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3번이 해결되려면 1.2. 그리고 1.5가 해결........


그런데, 그렇고, 그리고...
아-복잡해.


괜히 부담을 줬던 것 같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요츠하는 차라리 말하지 않을 걸 하고 후회했다.
조금은.


이런.
뒷감당 안 되는 일을 저지른 모양이다.
물론 이미 엎지른 물이지만 서도.


... 이럴 때 요츠하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다.
요츠하는 아직 어리니까.


요츠하는 이불을 푹 덮어썼다


아-몰라.

짜증 나는 일이다.


스산함이 가슴을 채우고  가없이 넓은 하늘에서  시우가 후드득 후드득  내리는 것을 보노라면

  (만요슈 1·82)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들릴 리 없는 짐승의 숨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듯하다.

한참을 달린다.


가시덤불이 붙잡아 옷의 올이 풀리다 못해 뜯겨나가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달려야만 한다. 시계 따윈 보지 않아도 시간이 없음을 안다.


그러니까, 나는 달린다.

어서 가야만 한다. 아까부터 누군가가 속삭였다.


나는 화답하듯 중얼거릴 뿐이다.

-걱정하지 마, 도착할 수 있어. 나는 아버지를 설득할 거야.


...미츠하
-미츠하!


어떤 목소리가 뚜렸해지고 그것을 기점으로 뚜렷하던 초점이 흐려진다.
이윽고, 별이 떨어진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꿈.
꿈이라면 꿈이다.


미츠하는 가슴을 움켜쥐고 벌벌 떨었다.
붉은 덩어리가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느샌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지금 당장 소리치고 싶은데.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목에서는 바싹 마른 숨결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꽤 오래전 일임에도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원래는 알았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미츠하는 비틀거리면서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목이 말라.


갑자기 갈증이 났다.


냉장고 문을 겨우 열어 보리차 한 컵을 벌컥 들이켰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


갈증.

타는 듯 한 갈증이 미츠하를 괴롭혔다.

물.
물.


목이 탔다.
불에 타는 것만 같아.


미츠하는 문득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별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


미츠하가 쓰러졌다.
오늘. 어쩌면 어제부터 아팠다는 모양이다.


전혀 몰랐는데.


의사는 기력이 떨어진 모양이라고, 별로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자신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갑자기 너무 많이 받으면 간혹 이런 경우가 있다는 의사의 말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스트레스.


나는 그런 거 전혀 몰랐는걸.


응.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어.


몸이, -어쩌면 마음이- 그렇게 아픈데.
너는 왜 말하지 않은 거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너는 뭘 바라는 거니.


마음이 복잡했다.

너는 왜.


그렇지만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다.

철저한 무능감만이 남았을 뿐이다.


히나 선생은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미츠하의 친구들이 보였다.


히나는 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야 간신히  미츠하가 이토모리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패기넘치는 선생 좋아하네.
자신은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무심했다.


단지 위장해왔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격이 없음이 명명백백해 졌는데도..


문득 한 가지 말이 입안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도 거기에 낄 수는 없을까?

차마 입으로 옮기지 못한 말.


히나는 그런 질투심을 속으로 삭혔다.

그런 질투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고 느껴졌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무슨 자격으로.

만약 이 아이들이 나를 용서해 준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히나는 쓸쓸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화 바구니를 침상 곁에 억지로 내려놓았을 뿐이다.

발이 너무 무거워서 들고 갈 수 없다는 핑계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그리운 목소리와 사랑스러운 온도.
나는 소중한 누군가와 찰싹 달라붙어 있다. 떨어 질 수 없게 묶여 있다.
젖무덤에 안긴 젖먹이처럼, 불안이나 쓸쓸함은 티끌만큼도 없다.
아직 잃어버린 것도 하나 없고. 무척 달콤한 기분만이 온몸에 가득 퍼진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문득 눈을 뜬다.
약품냄새.
손에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든다.
병원복.
음.

쓰러졌었나.


그럼 그건.. 꿈이었구나.

미츠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느새 달려든 요츠하를 쓰다듬었다.


요츠하는 울먹이며, 선생님이 다녀갔고, 사야와 텟시는 조금 전에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날, 어쩐 일인지 요츠하에게 비슷하게 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모르겠다.


“어쩌면 그 사람은,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언니?”


요츠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미츠하도 자신의 말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상한 꿈.

조금 전에 깨었음에도 이번에는 꿈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미츠하는 그렇지만 이번에는 뭔가 소중한, 그런 것을 꿈에서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꿈에서나마 자신은 뭔가를 찾았다. 


어쩐지 헤매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을 것 같았다.


쿠미히모가 길을 찾아 준 것일까?


설마.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미츠하는 아직 하나도 손에 넣지 못했다. 아직 만나지 못했다.


영화나 소설과는 달리 현실은 삭막하기만 하다.
평생 기적은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미 별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평생치의 운을 모조리 쓴 셈이라 쳐도
별로 억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미츠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저 빗방울 수만큼 찾으면 만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미츠하는 열 밤만 기다리면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언니?”


요츠하가 다시 환자복을 붙잡았다.
더 이상 요츠하를 봐 주지 않으면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츠하는 요츠하를 꼭 안아주었다.


요츠하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마 요츠하도 그럴것이다.


그렇다고 혼자인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요츠하도 마찬가지였다.


미츠하는 입을 열었다.
언젠가, 오래전에 요츠하가 해준 말을 돌려줄 참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해결된 일은 없다.
여전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모든 것이 몽땅 뒤죽박죽에 순 엉터리다.

나는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이 원래 그런걸.

그렇다면, 남은 것. 이 감정만을 가지고서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한다.
이 감정을 가지고.. 언젠가 이 감정조차 잊어버리더라도.

이 갈망을 가졌다는 사실 조차 희석되어 버릴지라도.
언젠간 그런 것을 가졌다는 것만 남더라도.


그러니... 이 말만큼은 꼭 해야만 했다.
요츠하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
“그래, 우리는 고독 하지 않아”


창 밖에서는 작은 별이 하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