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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매번 도움만 받네요.]



[아니야.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하물며 타치바나 군의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보다 제대로 준비는 했어?]



[...사실 제대로 준비하지는 못했어요. 어떻게든 해 봐야죠.]



[...나한테 기획 아이디어 준 순간부터 계획해둔 거 아니었어? 이게 어떻게든이란 말로 될 일이라고 생각하니?]



[윽... 그러니까 그 부분을 어떻게든...]



[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



[네. 아는 선배가 있어서 도움을 좀 받으려고 해요.]



[그래. 미야미즈 양이라고 했던가...  정말로 내가 더 도와줄 일은 없는 거야?]



[게릴라로 행사를 진행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해야죠.]



[그래. 그 정도는 공식적으로 행사를 진행하기 전에 테스트 정도로 하면 되는 거니까 어렵지는 않아. 잘 해야 하는 건 타치바나 군 쪽이지.]



[...아마도 근 일주일 정도는 제대로 연락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 전에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자업자득이야. 그러니까 잘해.]



[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씨]



[그래.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지만 그런 바보 같은 점... 싫지는 않아.]



[아, ━━씨.]



[응? 무슨 일이야?]



[결혼... 축하드려요.]



[...고마워.]






1.



There'll be no strings to bind your hands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겠죠.


Not if my love can't bind your heart

내 사랑이 떠나는 당신을 붙잡지 못한다면요.


And there's no need to take a stand

그런 태도로 있을 필요는 없어요.


For it was I who chose to start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은 나 자신이니까요.


I see no need to take me home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필요는 없어요.


I'm old enough to face the dawn

나는 동이 트는 것을 마주할 정도의 나이는 되니까요.


Just call me angel of the morning, (angel)

천사 같은 당신. 나를 아침의 천사라고 불러주세요.


Just touch my cheek before you leave me, baby

나를 떠나기 전에 내 뺨을 어루만져 주세요.


Just call me angel of the morning, (angel)

천사 같은 당신. 나를 아침의 천사라고 불러주세요.


Then slowly turn away from me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서 돌아서세요.




"..."



요 며칠간 일본 전역을 달군 폭염에 말 그대로 찬 물을 끼얹어서일까. 카페의 창 너머, 비쩍 마른 흙내에 담뿍 배었을 달콤함이 눈을 빼앗았다. 길 한가운데에 고인 웅덩이. 높낮이를 따라 움직이는 흐름. 때로는 어딘가에 닿아 튀어 오르는 유리구슬들. 다양한 형태로 알려오는 장마의 시작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다만 우습게도. 평소와는 다른 비의 존재는 살갑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늘 즐기던 카페의 올드한 감성은 왜 이리도 아프게 박혀오는지. 비를 피하려 꽉 들어찬 사람들 사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쥬시 뉴튼의 청아한 목소리는 또렷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간만의 빗소리에 흠뻑 젖어나 볼 걸. 상념과 함께 입가로 옮긴 머그잔 속 향의 뒷맛이 꽤나 썼다. 뒤늦게 어른 입맛이라도 된 건지. 시럽 네 펌 이상의 달콤함을 도둑맞은 모카라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한 초콜릿 향만 풍겼다.



후- 얕은 한숨이 식힌 커피를 내려놓고선 테이블 귀퉁이의 휴대 전화에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시간 관념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는 하지만. 틀림없이 같이 주문한 커피일텐데. 정확히 언제쯤이란 말도 없이 금방 온다는 말만 믿고 시켜둔 아메리카노에선 어느 새 김조차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바보."



목소리에 절로 섞인 퉁명스러움의 뒤로 애꿎은 한숨이 따라붙었다. 바쁘다, 일이 있다, 나중에 연락하자, 교과서적인 대답만 듣다가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눈 거진 일주일만의 통화였는데. 조금이라도 기다리는 사람 생각을 더 해 줄 수는 없었니. 그것도 아니면...



나도 모르게 꺼내려던 말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걱정이고 비약이야. 1년 하고도 근 4개월.  하다못해 내 주변에도 몇 년 단위로 연애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치는데... 우리가 쌓은 시간은 아직 햇병아리 수준밖에 안 되는 걸. 




...안으로 삼킨 말이 심장으로 가기라도 했는지. 조금씩 스미는 불안감을 고개와 함께 세차게 털어냈다. 그와 동시에 노리기라도 한 듯 더 선명하게 들려오던 쥬시 뉴튼의 목소리가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에 뭍혀 흐려져갔다.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여성 보컬의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미키는 별 일 아닐거라고 얘기했지만... 주문처럼 꽂히는 노래 가사들. 그 뻔한 암시가 현실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을 이렇게라도 떨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나란 여자는. 이렇게까지 줏대 없는 사람이었나.

그게 아니면 타키 군. 너의 존재가 커진 만큼 나 자신이 작아져버린걸까.




"저기, 실례합니다."



"아, 네."



상념을 깨운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실주름들이 옅게 핀 얼굴이었지만. 연분홍 단색의 원피스가 주는 포근한 느낌이 은근했던 목소리와 아주 잘 어울렸다. 따로 손대지 않아 어깨 밑으로 자연스럽게 뻗은 생머리나 흔한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수수하지만 그 수수함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여인의 입이 잔잔한 미소를 띄었다. 



"비를 피하려 잠깐 들렸는데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어서요.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다면 혹시... 합석을 할 수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요. 편하신대로 앉으세요."



친절하시네요. 그럼 부디. 그렇게 말해오며 휘어지는 눈매에 절로 눈길이 갔다. 행여나 물방울이 튈까 우산을 살며시 내려놓는 손길, 자그마한 소요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양 손으로 받친 머그잔까지. 어딘가 귀한 집의 사람일까 생각하던 것도 잠시. 다시금 꾸벅 숙여오는 고개에 나 역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젠 두 사람이 된 4인 테이블. 거기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서.



...기왕이면 타키 군이 오기를 바랬으니까. 평소처럼 칠칠치 못한 탓에 우산의 물이 튀어도. 늘 약속 시간에 조금씩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탓에 거친 숨소리로 만남의 인사를 대신한다고 해도. 대각에 앉은 낮선 여인의 기품보다는 나를 마주보며 멋쩍게 웃어줄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켜 본 스마트폰의 액정에는 예정보다 30분이나 흐른 시간만 무심히 숫자를 바꿔갈 뿐이었다.



같이 시킨 커피일텐데. 줄어들고 더 식어간 것은 어째서 내 것 뿐인지. 긁기라도 한 듯 머그잔의 내용물이 줄어들수록 점점 아려오는 속을 힘겹게 토해냈다. 뭔가가 곪아가는 그 느낌. 상처에서 피어나오는 열을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예상치 못한 물음에 들린 고개에 처음과 같이 잔잔한 미소가 잡혔다. 뒤늦게 집중한 탓일까. 그녀가 있는 방향에서 그 미소만큼이나 잔잔한 시트러스 향이 느껴졌다. 묵직하기 그지 없는 커피와는 다른 상쾌하고 시원한 과실의 내음. 속을 짓무르던 것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다시금 얕은 한숨을 토했다.



"그렇게 계속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답니다. 특히 본인도 모르게 계속 쉰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빠요. 오죽하면 제가 굳이 말을 걸었겠어요?"



"...그랬나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후훗, 아니에요. 그저 휴대전화에 집중된 시선이나 표정도 그렇고. 보고있자니 웬지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서...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처음 우산을 내려놓고 머그잔을 잡던 그 손 만큼.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시트러스 향에 녹아들었다. 혹시 노리고 시킨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평소였다면 낯선 사람에게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 약간의 남사스러움을 포근함이 덮어갈수록 내 입도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데이트... 일까요. 그게 아니면 오다이바까지 올 일이 없으니까요."



원래는 신주쿠 쪽에 있거든요. 말을 마치고 난 시선이 저절로 창 밖의 풍경을 향했다. 뉘엿뉘엿 져가는 석양을 품은 채 주홍빛으로 빛나는 레인보우 브릿지의 정경. 그 석양이 도쿄 만 너머의 도심에 잠길 즈음. 어스름한 단말마와 함께 불빛을 환하게 밝힐 모습이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어머나... 여자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나쁜 사람이네요."



"...그럴지도요."



느릿하게 열린 대답 대신. 변함 없이 창 밖을 향해 던진 시선에 모순을 담았다. 얼핏. 아니, 틀림없이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방금 전 까지 스스로도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었으면서 다른 사람이 그의 험담을 하는 건 또 싫다는 걸까.



중증이야 정말로.

어쩌면 그 정도로. 내 안에서 타키 군의 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얘기겠지. 정말로 바빠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주일의 공백에 온갖 의미를 담아 떨면서도. 그와 함께 몇 번이고 봐왔던 오다이바의 정경에 감상적이 되어버리는걸 보면. 



...그래도 매일 상실감과 공허함을 품은 채 지내야했던 그 때 보단. 차라리 한 치 앞의 감정도 종잡을 수 없는 지금의 내가 더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 까지.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를 기다림에 익숙해지게 만든다는건 정말 잔인한 일이에요."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와는 달리 살포시 띈 미소. 그 형언하기 힘든 불협화음의 마력인지 어느 새 내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몸. 그 뒤로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이나 눅눅하게 물기 어린 카페의 전경.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덧없는 미소가 왠지 낮설지 않았다.



"재미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옛날 얘기를 좀 해도 될까요?"



네. 부디. 홀린 듯 열린 입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녀의 시선이 내 스마트폰을 향했다. 30분을 넘어 40분을 향해 가는 시간. 어느 때라면 고작 10분이라고 넘길 법한 일일 텐데. 다시 침울해지려는 속내를 털어내고픈 마음에 살짝 종용의 시선을 보냈다. 



"어린 시절엔 이런 편리한 물건들이 없었어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철저하고,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죠. 가령... 차마 발걸음으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떠난 친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의 위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반질반질한 백색의 코팅 위에서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나아가는 흐름이 멈출 즈음. 나즈막한 그녀의 목소리도 그 흐름 만큼이나 느릿하게 퍼져나갔다.



"상상도 못했겠죠. 한 송이, 두 송이 내릴 줄 알았던 눈이 그렇게나 많이 올 줄은. 얼마나 슬프고 막막했을까요.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외지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에 멈춰버린 전차 안에서. 작고 연약한 몸과 기다리고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친구의 존재 하나만 의지한 채 버틴다는게."



스르륵, 스르륵,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손가락. 왠지 모르게 그 움직임이 멎을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먹먹해져왔다. 틀림없이 창 밖의 비는 기세를 죽여가고 있었을텐데. 손가락 주변의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눈이 흩날리고 있을까. 마치 테이블을 가득 덮은 채 일말의 온기도 품지 않은 흰 코팅처럼.



"오래, 예정보다 아주 오래 걸렸어요. 얼마나 걸렸었는지. 이제는 시간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결국 만났다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작게나마 온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만으로. 그때만큼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죠."



약간의 기다림은, 끝에 가서는 그보다 더한 기쁨이 되었으니까요.



말을 마치는 그녀의 얼굴이 피어날 때를 잘못 찾은 벚꽃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처음 봤을 때 부터 주름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잔잔한 물결처럼 휘어진 입술 위로 수줍게 피워낸 벚꽃에서 앳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는 걸까.

때때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나와 타키 군의 관계처럼.



"저는 그쪽 분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혹시라도 이런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해 본 이야기에요. 조금 주제넘은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걱정되네요."



"아, 아니에요! 정신 없이 듣고 있었는걸요!"



"후훗,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살짝 웃어주고선 목이 타는지 머그잔을 들어올리는 손가락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정확하게는 왼손의 약지 위. 세공이나 장식 대신 심플함을 택한 듯 수수하지만 빛이 나는 반지가. 



생각해보면 초대면의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비록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이지만. 아마도, 저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준 사람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그녀의 성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반지처럼. 오랜 시간 속에서 서로의 모습에 대해 가졌을 확신이. 



"그러면... 그 반지도 그 분이 끼워주신 건가요?"



"글쎄요. 어땠을 것 같아요?"



되물으며 살짝 묻어난 장난기가 입술 주위에 옅게 펴졌다. 그냥 이런 면도 있었구나 하고 기분에 따라 웃음짓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흘러간 10분 사이. 힐끗 힐끗 출입문에 쏟던 신경이 헛수고로 끝나지만 않았더라도 그럴 수 있었을텐데.






"아마도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고들 하니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입 밖으로 던지고 나서야 붙잡은 정신이 뒤늦게 경종을 울렸다. 따지고보면 실례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내 마음이 조금 어지럽다고 다른 사람의 신경조차 써 주지 못할 만큼 설익은 사람이었니? 고등학생때도 안 했을 짓을 하물며 초면의 사람에게...



"저, 저기..."



"제가 누군가를 기다림에 익숙하게 만든다는건 정말 잔인한 일이라고 했었죠?"



내가 말할 것을 알고있던 듯. 못난 다급함보다 더욱 나즈막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살짝 흔든 잔에서 퍼지는 시트러스 향과 함께. 가늘지만 흡입력 있는 미성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손가락을 거친 반지는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이 반지가 제 자리를 찾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답니다. 정말 과분하게도. 그리고 잔인하게도."



흰 테이블 위에서 유난히 빛을 뽐내는 반지인지, 아니면 시트러스 차 위로 비춰지고 있을 자신의 가라앉은 표정일지. 살짝 내리깐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거울을 보듯. 그 안에서 뭔가를 더듬어보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섣불리 말을 붙이기 힘든 분위기 속. 스피커의 간주와 간주 사이의 공백 동안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가 창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그 때의 저는, 또래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었고 조금 더 냉정했으니까요. 아니면 그저 겁이 많았던걸지도 몰라요. 서로 같이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서 애태워야 하는 시간이 더 길 것을 알았으니까. 차마 그 시간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도망쳤을지도 모르죠."



"그런, 그런 건..."



"잔인한 이야기지요? 어째서 사람은━━"



━━좋아하는 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걸까.



서로 다른 말과 마음의 접점에서 아릿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처음으로 그와 만났던 날. 내게 주어졌던 의무도, 일정도 다 팽개쳐둔 채 정신없이 찾아나선 끝에 마주한 신사의 계단. 틀림없이 그 순간의 우리 두 사람은 현실의 제약을 초월해 있었다. 


오랜 시간을 쌓아온 애틋함의 폭발 앞에서 앞으로의 일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은 없었으니까. 타키 군이 내가 찾던 사람이라고. 내가 타키 군이 찾던 사람이라고. 그 순간의 감정에 오롯이 충실했을 뿐. 


다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애틋함이 사랑으로 진화했다는 내 확신 만큼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타키 군과의 연락이 뜸해진 근래의 7일간. 어느 새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불안감이 미웠다. 



...미워하면서도 털어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도. 




"좋아하니까 불안해하고,  좋아하니까 미안해하고, 좋아하니까 아파하고... 바보같죠? 그 때는 그저 아이답게 행동했으면 됐을 텐데.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물론 이건 아이였던 시절의 이야기고 아이에게는 아이의 방식이, 어른에게는 어른의 방식이 있는 것 처럼. 아가씨의 사정을 제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기다리지만 말고 직접 연락을 해 보는게 어떨까요?



아가씨도 그걸 원하고 있네요. 

어느 새 손에 쥐어진 휴대 전화를 보며 살포시 웃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금방이라도 타키 군에게 전화를 걸려던 손을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통성명도 제대로 못하고 얘기하고 있었구나.



"저. 미야미즈, 미야미즈 미츠하에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이름도 말 안하고 뭐라도 되는 듯이 떠들었으니..."



우산을 집어들던 손을 멈춘 채 겸연쩍게 웃던 그녀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자로 잰 것 마냥 반듯하게 선 모습이 부담이 아니라 그녀다운 모습이란걸 알게 된 탓인지. 새로운 인연에 대한 설레임과 기쁨만을 품은 채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시노하라... 아니━━ 토오노 아카리에요"



재혼이지만 저, 다음 주에 결혼하거든요.





2.



우산을 두드리는 비의 진동이 걸음의 보폭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뤘다. 땅거미가 진 세상 위로 은하수가 흐르듯. 셀 수 없는 불빛으로 치장된 레인보우 브릿지의 정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걸음이 느려졌다.  



정말로 온전히 그 광경을 즐기고 싶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차마 아직 다 없애지 못한 불안감이 발목을 잡고 있는 건지. 어느 쪽으로도 답을 내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저 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에도 들어오지 않은 채. 먼저 전화를 걸려고 했던 듯. 내 전화에 오히려 조금 놀라면서도 굳이 덱스 비치까지 나와달라는 그의 진의가 무엇일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만나게 될 거라면 해변 공원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에 녹아들고 싶어. 도시의 밤거리가 필연적으로 이면을 비출 수 밖에 없다면. 빛을 피해 쓸쓸하게 떠나기보단 같은 것을 보면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타키 군.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여기야 미츠하!"



날씨 때문인지. 인적 하나 없는 덱스 비치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려퍼졌다. 가로등 몇 개가 밝힌 원형 광장의 빛 사이에서 느릿하게 흔드는 손이 보였다. 



...일이라도 하고 온 걸까. 주말일텐데 정장 차림이라니. 기합이 들어간 모양새에 걱정부터 하는 모습이 좀. 아니, 꽤나 우스웠다. 방금 전 까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은 다 했으면서 타키 군이라면 그저 좋은 모양이구나. 나란 여자는.



"웬 정장이야? 무슨 일 있었어?"



"아... 별 건 아니고. 회사 일 때문에."



응. 그래. 예상대로의 대답에 아쉬움을 느껴야할지. 아니면 다행이라고 여겨야할지. 혼란스러운 머리를 애써 정리했다. 지금은 눈 앞의 타키 군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조금 더 생각하게 되면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거나 의심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조금 더 날 봐줬으면 하는 마음 대신 내가 조금 더 지금 순간에 집중하면 돼. 



...왜 이렇게 추해졌을까.



"밥은 먹었어? 배고프지 않아? 뭐 먹으러 갈래?"



"아냐, 괜찮아. 음..."



━━사실 오늘은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서.



애써 텐션을 끌어올리며 해 온 물음들이 한 순간에 차갑게 식는다. 틀림없이 우산을 쓰고 있을텐데. 물에 젖은 듯 무거워지는 몸이 천천히 밑바닥으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유난히 우산을 깊게 눌러쓴 탓에 잘 보이지 않는 그의 표정이 못내 궁금했다. 어째서 보여주질 않는 걸까. 무엇 때문에? 오다이바에 만연한 불빛들로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꼭 지금 해야 해? 나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어. 사실 배도 고프고. 여기서 비 맞는 것 보다는 빨리 어딘가라도 들어가고 싶어."



"...그건 미안해.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안 돼."



"타키 군. 제발."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에 비참함이 어렸다. 내 마음과도 같이. 지금 내 말이나 그의 옷깃을 잡으려는 행동이 임시 방편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 사무치게 야속했다. 일주일 전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던 간에 그저 일주일 전의 우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멍처럼 피어올랐다.



"내가 원하는건 그냥 예전같은 관계야. 같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하며 거리를 걷다가 미리 알아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야경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나는, 나는... 오늘 하루가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게 없잖아. 조금은... 조금은 더 신경 써 주면 안 돼? 일주일만이잖아. 아니면 타키 군은... 내가 보기 싫었던거야?"



"아니야 미츠하! 나는...!"



싫어. 차라리 홱 돌려버린 시선에 도쿄 만의 어둠이 가득 찼다. 어리광에 가까운 내 마음이 저 색과 같을까. 쉼 없이 수면을 두들기는 빗방울들이 앗아간 고요까지도.



어쩌면 오늘은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나이에 안 맞는 치기를 부릴 주제도 아닌 몸이잖아. 하루 정도 집에라도 박혀 있었으면 알아서 추스를 수 있었을텐데.   



말이 없는 타키 군의 모습이 마치 나를 잊은 것 같았다. 이제는 시선을 돌려 마주할 용기 대신에 슬픔과 분함만이 코끝을 찡하게 울렸다. 그저 조용히, 빛을 피해 일렁이는 도쿄 만의 바다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삼켰다. 



어느 새 목까지 차오른 벅찬 것을 끅끅거리며 억누르던 그 때.




If I should stay

내가 만약 당신 곁에 머무른다면



I would only be in your way.

나는 오직 방해밖에 되지 않겠죠.






솟아오르는 여덟의 물줄기가 바다 위를 빛으로 수놓는다. 이제는 전설이 된 디바의 목소리가, 그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노래와 함께 오다이바의 정적을 쫓아냈다. 마치 반주라도 된 듯 여전히 규칙적으로 울리는 비의 소리. 지휘자 하나 없이 어우러진 하모니 속에서 천천히 몸을 눕히던 물줄기가 빠르고 유려한 원을 그렸다.



  


So I’ll go, but I know

그래서 난 떠나요. 하지만 알아줘요.



I’ll think of you every step of the way

모든 순간 속에서 당신을 생각할 거라는 걸.




방금까지의 복잡했던 심경이 거짓이었던 듯. 차오르던 것 조차 잊어버린 채 집중하게 된 풍경이 네 쌍을 이룬다. 서로 천천히 겹쳐가던 물줄기들이 다시금 멀어지고.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올곧게 위를 향해서만 몸을 세워갔다. 서로 겹쳐지지 않는 평행선.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같은 동작으로 다시 천천히 회전하던 물줄기가 디바의 목소리와 함께 뚝 끊겼다.




And I will always love you.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거에요.



I will always love you.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거에요.




와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감탄사를 따라 셀 수 없는 분수가 빛의 파도를 그렸다. 마치 어제까지 알던 오다이바의 모습이 아닌 듯. 먹처럼 검었던 가슴을 간질이는 몽환적인 감각이 노래 가사에 젖어들어갔다. 

 


"━━미츠하."



꿈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방금 전 까지도 그를 외면하고 있었단 사실이 가슴에 박혔다. 깨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심스레 올려다본 시선에━━우산을 곧게 세운 채 살짝 미소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타키... 군?"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 매일 서로의 생각밖에 안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반대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Bittersweet memories

달콤쌉쌀한 추억들은



that is all I’m taking with me.

항상 간직하고 있어요.





디바의 목소리가 열차가 된 듯. 기억을 거스르는 흐름 안에서 바라본 창 밖으로 수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났다. 처음으로 그를 만났던 순간부터 번호를 나누고. 서로 이성에게 익숙하지 못한 탓에 쭈뼛거리다 두 달이 되서야 단골 데이트 코스가 생기는. 그런 햇병아리 커플이 언성을 높이고 서로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익숙함이란 왜 이다지도 가까이에 있는 걸까.

그가 없던 10년. 내가 없던 7년.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은 그 시간들에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뿐인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왔고, 기다리게 만들었는걸. 익숙함의 무게에 가려서 어느 새 잊혀져 버렸지만.





So, goodbye. Please, don’t cry.

그러니 우리 이별하더라도 울지 말아요.



We both know I’m not what you, you need.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걸 우린 알잖아요.




"...누가 봐도 내가 많이 부족하니까. 미츠하에 비하면 사회 경험도 짧고.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다 성격도 다혈질이고. 사실 믿는 거라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건지. 아니면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던 건지. 되든 안 되든 해 보는 정신밖에 없지만 말야."



어쩌면 나는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닐 지도 몰라.




짐짓 불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잃지 않는 미소에 놀랍도록 마음이 평온했다. 어쩌면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는 이 상황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산을 두드리는 비의 재롱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디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꿈이라고 착각해버렸을지도.




I hope life treats you kind

나는 희망해요. 삶이 당신에게 친절하기를.



And I hope you have all you’ve dreamed of.

그리고 당신이 꿈꾸는 모든 것을 이루길 바래요.




기다림으로만 쌓아온 17년. 그리고 이제 쌓아가기 시작한 시간이 1년 남짓. 작다면 작은 시간이지만 앞으로 쌓아 나갈 시간이 기다림의 시간보다 많아질 것을 믿었다. 몇 번이고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바보 같이. 쭉 타키 군이 없으면 쌓을 수 없는 그 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멋쩍게 뒷머리를 긁고 있는 그의 모습에 조금씩 심장이 떨려왔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겸연쩍음을 감추기 위해 머리를 긁는 습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설레이는 소년같다고. 나 역시 방긋 웃게 되던 그 모습이 지금만큼은 한층 더 무게감있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나다울 수 밖에 없잖아.  좋아해 좋아해 말하는 것도 이젠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고. 내 감정을 속이고 싶지는 않아. 차라리 뻔뻔해질거야. 대등한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게 사랑이라면 너랑 나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너 말야. 너무 티나잖아."



"어, 어떤게 말야?"



"연상이니 누나니 엄청 강조하면서. 쓸 데 없는 걱정하면서 겁내고 있는 거. 도대체 맨날 얘기하는 연상의 여유는 어디로 간 거야.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먼저 얘기할 수 밖에 없잖아."





And I wish to you, joy and happiness.

그리고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바래요.



But above all this, I wish you love.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래요.





후읍-들이킨 숨을 거칠게 내뱉은 그의 입이 지체하지 않고 열렸다. 떨어지는 우산. 품에서 꺼내지는 자그마한 상자.

그리고 열려진 상자 안에서 영롱함을 뽐내는 반지까지.


보컬도, 악기도 없이 정적만이 들어찬 5초 간의 간주. 그 사이에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나 반지의 빛이 비정상적으로 또렷했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아.

사랑해 미츠하. 나와━━결혼해줄래?









━━And I will always love you.

그리고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 거에요.









몸을 앞질러 간 마음이 디바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뒤늦게 달음박질친 몸이 한 점 사양도 없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비어버린 두 손에 그를 한껏 담는 동안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하늘을 뚫을 듯 세차게 원을 그리며 터져나오는 물줄기들이 내 마음과 같아서. 그저 그 몸을 꽈악 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타키 군, 타키 군, 흐느낌이 섞여 엉망이 된 목소리를 도무지 추스를 수가 없었다. 태엽이 고장난 인형처럼 그의 이름을 반복할수록 좀 더 안아오는 그의 손길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길 바랬다. 



빗줄기에 몸이 점점 젖어가고 디바의 노래가 절정에 달해갈수록 이 환상적인 시간의 끝도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어.

그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의 시작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피날레의 순간이라는걸. 



말 대신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의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몸을 뗐다. 조금은 낮은 나를 위해, 천천히 숙여오는 고개를 맞이하는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살포시 감은 눈.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을 담은 입술. 그 위를 금새 덮어오는 따뜻한 느낌을 따라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비에 젖어가는 몸이 무색하게,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따뜻함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이 노래가, 그가 나를 위해 준비한 이 시간이 끝날 때 까지.

아직 우리가 나누지 못한 마지막 말이 오다이바에 울려 퍼질 때 까지



"미츠하."



"...타키 군"




━━I will always love you.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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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쇼 참고영상. 실제로 두바이에서 이뤄지는 쇼임.



더 이상 지체하면 해야 할 일을 못해서 일단 올리게 됐음.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마트를 가야하기 때문에.



한번 본 갤럼은 영상 재생하고 음악 나오는 부분부터 다시 봐도 좋을 것 같다.



인슐린 왜이리 많아. 좀 달달한것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