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이와의 결혼식은 청정한 구름과 더없이 푸른 하늘의 아래에서 올려졌다.

화창한 날씨와 밝은 분위기에 비해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혼식을 작게 올리자는 이야기가 오갔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자신이 있었다.

화려한 결혼식은 필요 없는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신부대기실에 앉아있자,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소리를 내며 어색하지만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정장을 입은 두 여자의 안내에 따라 복도를 걸었다. 11월의 서늘한 기온을 품은 복도의 냉기가 나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냉기조차도 내 행복감의 영일로 꽃처럼 화사하게 물든 마음을 식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빨리 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지려고 하지만, 에스코트에 맞추어 걸으니 속도가 나지 않는다.

영원하다고 느껴지던 대리석바닥에도 끝은 있어 커다란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는 한 남성이 서있었다.

미야미즈 토시키, 나의 아버지. 지금부터 나를 그가 있는 장소에 데려다줄 사람.

아버지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그 손은 생각보다 작았고, 따뜻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자 나를 데려다준 여성 두 분이 각자 문짝을 밀었다.

문이 열리면서 틈새로 빠져 나온 식장의 열기가 전신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저 앞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조용히 나를 기다리는 그를 향해 아버지와 발을 맞춰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갔다.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관객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도록 발밑을 조심스레 살피며 얼굴은 그를 향해 꼿꼿이 들고 걸었다.

경직된 내 모습을 본 것인지 그가 살며시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약한 미소로 그친 그 웃음에 나도 똑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어두운 식장의 조명이 그를 비추고 나를 비춘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아버지는 나를 그에게 데려다주고 조용히 퇴장했다. 무대 위에는 우리만이 남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본다. 주례에 맞춰 서로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식장의 열기와 무대 위라는 상황이 어우러져 복도의 냉기에 식었던 감정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손을 감싸기 시작한다. 슬쩍 곁눈질을 해보자 그의 손이 내 손을 잡아 감싸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길과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에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든든함을 느낀다.

나는 지금,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미야미즈를 나와 그의 가족이 된다.

앞으로의 인생을 그에게 바친다.

나의 남자, 나의 반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간 사람.

당신의 이름은――. 

#1

――너의 이름은.

흐르는 눈물이 가리는 시야 사이로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목소리, 표정,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어째서일까, 우리는 언젠가 이렇게 만난 적이 있었다고 생각해.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운 냄새, 조금은 거칠어진 감촉, 따스한 체온, 전해져오는 기억들.

아아.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비어있던 늦여름의 기억, 그날 내 손에 적혀있던 ‘좋아해’ 라는 메시지, 전부 너였어.

그래, 모두 다 기억났어. 너의 이름은…….


―뭐였지……?


왜, 어째서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너와 몸이 바뀌었던 것. 산 정상에서 너와 만났던 것. 너의 고백에 힘을 얻은 것. 모두 다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서로를 찾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너의 이름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당혹감에 눈물조차 멈췄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크게 뜨인 채 경직된 눈, 멈춰버린 눈물, 떨어지지 않는 입술까지 모두 나와 같았다.

그도 우리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너의 이름…. 뭐였지?”

하나 둘, 심판의 휘슬에 맞춰 달리기를 시작하듯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나는 미츠하, 미야미즈 미츠하!”

“나는 xx, xxxxxx”

그의 목소리가,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

―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는 다시 한번 동시에 말했다.

“미츠하, 미츠하! 내 이름은 미츠하!”

“xx, xx, 내 이름은 xx”

들리지 않아… 너의 이름이 들리지 않아…!

나의 독백은 음성이 되어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앞에서 들려왔다.

그가 말했다. 동시에 정확히, 나와 똑같은 것을.

나는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없었고 그는 나의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겨우 만났는데, 드디어 찾았는데. 소중한 사람.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잊고 싶지 않았던 사람인데.

드디어 떠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불어오기 시작한 봄바람이 우리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전신을 휘감는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에 네가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허리에 파고든 그의 팔이 나를 세게 조여온다.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아픈 건 아픈 것이라, 우리는 서로를 살며시 떨어뜨렸다.

비록 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그를 놓칠 수는 없어.

3년의 엇갈림으로부터 시작된 숨바꼭질에 끝을 고한다.

#2

벚꽃이 지고 푸르른 잎사귀가 가득한 4월의 마지막.

평소보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아직 봄은 끝나지 않았다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새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 알록달록한 꽃들을 비추는 햇살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 중심에는 시계탑이 있었고 시계탑의 아래에는 세미정장의 한 남성이 서있었다.

아직 약속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을 텐데…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달려간다.

손을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음을 눈치챘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살며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다렸어?”

“아. 그게, 그러니까… 나도 이제 온 참이야.”

살짝 상기된 얼굴과 뒷목을 긁적이는 때묻지 않은 모습에서 이 사람이 정말로 내 연하임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자.”

당시의 기억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나는 10년, 저쪽은 7년만의 재회. 아직은 어색하기도 하다.

이 작은 어색함도 만남을 가지다 보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별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우리의 만남은 항상 카페에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가 카페에서 만드는 스위츠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 역시 다양한 인테리어를 관찰하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조 인테리어의 높은 천장을 가진 카페에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바깥은 봄 햇살의 따스함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곳은 에어컨의 시원함으로 가득해서, 그 상반됨 때문일까? 약간은 춥게도 느껴졌다.

우리는 점원의 안내를 받아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나는 평소대로 내가 좋아하던 팬케이크를 시켰고, 그는 쇼트케이크를 주문했다.

“쇼트케이크? 너, 그런 거 좋아했었나?”

“맛있잖아? 언제부터더라… 괜찮더라고. 너 때문에 입맛이 바뀐 거 아니야?”

“그런가? 잘됐네!”

“잘되다니?”

“반씩 나눠 먹으면 같은 돈으로 둘 다 먹어볼 수 있잖아?”

“너도 참, 대단한 생각을 하는구나.”

어색하다고는 해도 그것은 조용할 때 잠시뿐. 대화가 트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카츠히코와 사야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오쿠데라 선배와 츠카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타카기는 아직도 연인이 없다는 둥의 주변인물 이야기를 주로 한다.

“텟시 걔 이름이 카츠히코였구나… 매번 텟시라고 부르니 이제야 알았어. 관심이 없어서 까먹었던 걸까?”

“분명히 그럴 거야. 당시의 우리는 그 상황을 잘 넘기는데 급급해서 정신이 없었잖아.”

“그건 그러네. 당장 우리 사이의 3년이라는 시간차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지금은 웃으며 넘길 수 있는 3년의 시간차. 그 엇갈림 덕분에 나와 이토모리 주민들은 그에게 구원받았다.

그를 찾아 헤매던 10년을 떠올리면 마냥 편하게 웃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그가 내 옆에 있으니 괜찮았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3

공원으로 가기 위해 카페의 문을 열자 실내와는 다른 따스한 바람이 에어컨에 차가워진 피부를 살며시 감싸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스팔트를 걸었다. 아스팔트의 끝이 보이자 보도블럭이 길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는 공원의 문이 있었다.

문을 지나 공원의 입장티켓을 끊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민머리의 서양인들. 젊은 커플에서 노부부까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날씨가 좋아서 그런 걸까?”

“우리도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서 만난 거잖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역시 그런 건가?”

“그렇겠지.”

내가 말을 건네자 그가 곧바로 맞받아친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길었던 줄은 금새 사라지고, 우리는 매표소에서 입장권 2장을 끊었다.

개찰구에 티켓을 찍고 공원에 들어서자, 오른쪽 자그마한 건물에는 매점이 보였고 주변에는 울창한 녹림이 펼쳐져 있었다.

도시를 이루는 빌딩숲, 그 중심의 진짜 숲.

나무 사이사이로 높게 튀어나온 시계탑과 빌딩들은 신기하게도 어우러져 있었다.

“일단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볼까?”

모순적인 조화를 갖춘 풍경에 푹 빠져 있을 무렵, 그에게 같이 한 바퀴 돌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흔쾌히 승낙하고 싶었지만, 입은 이미 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가볍게 돌기에는 공원이 너무 크지 않아?”

“뭐… 단순한 동네 공원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이 주변에 아르바이트 했던 곳이 있어. 나중에 같이 가보자.”

“네가? 어떤 곳인데?”

“내가 아니라 우리가 아르바이트 했던 곳이야.”

“아… 확실히 이 주변이지. 조만간 같이 가보자. 셰프님을 제외하면 이제 아는 선배는 없지만 말이야.”

“그건 좀 아쉽다.”

나의 아쉽다는 말에 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쿠데라 선배와는 연락이 된다고 하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쿠데라 선배를 제외하면 다른 선배들과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으니 나는 상관 없다.

이제는 미키 씨라고 불러야 할까? 츠카사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지만, 카츠히코와 사야가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서 뭐해? 빨리 가자!”

그의 목소리에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자, 그는 혼자서 홀연히 앞으로 가버린 채 나를 부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여자를 두고 홀랑 가버리다니, 남자로서 어떨까 싶을 지경이다. 여자를 잘 대하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어도, 배려심 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걸까?

“미안해! 금방 갈게!”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자 활짝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미소에 방금까지 쌓여있던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진다. 정말 반칙적인 웃음이다.

재회한 뒤로 시간이 될 때마다 만나왔지만 날 잡고 데이트를 즐길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그렇기에 그 역시 나처럼 조금은 신이 났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생각이 잠시 짧아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 증거로 지금은 내 보폭에 맞추어 걸어주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산책로에 들어서자 흐르는 물 소리와 지저귀는 새들의 하모니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의 산책로를 지나자 이번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호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다. 못이라고 해야 할까? 거대한 물웅덩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그 주변을 채우는 들판.

들판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주변의 벤치에서는 그 부모님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대로 다리를 건너자 정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정자에는 사람이 두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발걸음을 정자로 옮겼다.

“어? 미츠하 아니야?”

“미츠하~”

정자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에 신경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조금 더 다가가서 보자 정자의 두 사람은 두 남녀가 되었고, 나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카츠히코? 사야? 이런 데서 다 만나네! 반가워.”

“테… 텟시에 사야카?”

그 역시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란 모양이다. 실수로라도 이미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우리가 다가가자 카츠히코와 사야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조금 올라간 목소리로 외쳤다.

“미츠하? 옆의 남자분은 누구야?!”

그럼 그렇지… 27년간 남자에게 눈길도 안주던 내가 낯선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 소꿉친구인 둘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내가 소개해줄 수도 없는 상황인데….

나는 은근슬쩍 그의 팔을 툭툭 쳤다.

“아, 음… 처음 뵙겠습니다. xxxxxx입니다.”

역시, 들리지 않는다.

“반가워요. 테시가와라 사야카예요.”

“테시가와라 카츠히코다. 너, 미츠하랑 무슨 관계야?”

“잠깐! 카츠히코!”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카츠히코의 질문에 사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죄송해요. 이 사람이 사람은 좋은데 조금 거친 면이 있어서….”

“괜찮아요. 흠… 그러네요. 아직은 친구라고 생각해요.”

그는 사야의 사과에 흔쾌히 웃으며 답변했다.

‘아직은 친구’. 맞는 말이다. 우리는 혜성이 떨어진 그날 이후 단 한마디의 고백조차 하지 않았으며, 만나긴 하더라도 사랑을 속삭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말하자면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아마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동안은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도 ‘아직은’ 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은 무슨 일로 여기에 있는 거야?”

“나야 사야카랑 오랜만에 산책 좀 하러 왔지. 그런데 남자와 단 둘이 있는 미츠하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걸?”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나한테도 개인의 사생활이 있는 법이야.”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능글능글한 표정을 짓는 카츠히코에게 살짝 질색하고 말았다.

“카츠히코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얘는 아직도 초등학생 같은 면이 있다니까? 내가 얼마나 시달리는지… 그래도 미츠하, 지금까지 남자라면 벽부터 치고 봤던 네가 우리 몰래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데, 관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건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언제나 신경 써줘서 고마워.”

내가 테시가와라 부부와 대화에 빠져있을 때, 사야의 시선이 내 옆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xxxx씨? 미츠하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 초면에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어디서 만났었나요?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그래, 너 분명히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전혀 낯설지가 않네. 편하게 말 놔도 돼. 우리 둘 다 테시가와라니까 이름으로 불러라. 나도 xx라고 부를게.”

“네? 아, 그럼… 카츠히코에 사야카. 나도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가 않네.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은 느낌이다. 잘 부탁해.”

처음이 아닌 주제에. 속으로 생각해봐도 별수 없다. 자기 몸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 맞을 테니까.

그 뒤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직업과 같은 단순한 질문부터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까지. 그는 테시가와라 부부와 예상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친해졌고, 사야까지 그에게 완전히 말을 놓는 경지에 이르렀다. 주를 이룬 것은 역시 나와 그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뭐? 너 24살이라고? 우리보다 세 살이나 어릴 줄이야… 동갑이라고 생각했어.”

“그러게, 나도 동갑이라고 생각했어. 잘 보니 우리보다 어린 것 같기는 한데 왜 그랬을까?”

“그렇지? 나도 얘랑 동갑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3년이나 차이 나더라고.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사이 좋게 대화를 나누는 셋의 모습을 나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몸이 바뀌었을 때, 내 안에 있던 그와 내 친구들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조금은 친구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미츠하, xxxx. 조금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눈썹이 쳐진 사야의 물음에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급격하게 식어버린 분위기에 사야는 잠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금방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너희는 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우리를 꿰뚫었다. 간이 정말로 떨어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당혹감을 선물한 그 물음에, 나는 어떻게 답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너. 야. 임마.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게 편해서 그래. 서로에게 예의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허물없는 느낌이라 좋잖아. 안 그래?”

내 사고가 정지되어 있을 때 그가 재빠른 임기응변과 함께 팔꿈치로 나를 툭툭 치며 지원을 요청했다.

“아, 응! 맞아. 얘랑은 왠지 이런 게 편하더라고. 역시 좀 이상한가?”

“아니 이상할건 없지만…”

그와 나의 임기응변에 사야는 탐탁지 않아 보이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냥 넘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것은 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4

공원에서 꽤 오래 있던 우리는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다함께 공원을 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는 게 어떠냐는 둥의 즐거운 이야기에 심취한 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은 채 왁자지껄 떠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재미있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다.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그를 보는 것이 즐겁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세 명의 모습은 이토모리에서 웃고 떠들던 고등학교시절 우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운데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닌 그라는 점일까.

오늘 사야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는 적잖게 놀랐지만 어떻게든 넘겨낼 수 있었다.

몸이 뒤바뀌는 상황도 우리는 넘겨냈다.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이 비극적인 상황도 우리가 함께 있는다면 넘겨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도 슬슬 저물어 하늘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점심보다 조금은 늘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 동시에 피부를 쓸어 내리는 찬바람에 조금은 쌀쌀해졌다는 느낌도 받았다.

우리는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아스팔트를 내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우리의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신호가 바뀌고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사야가 제일 앞에 서고 그 뒤로 카츠히코와 그가 뒤를 따랐다. 맨 뒤에는 내가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왼쪽에서 아스팔트를 내달리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어 소음이 들리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는 자동차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카츠히코와 사야는 신호를 거의 건넜다. 그가 신호를 절반보다 조금 더 건넜을 때, 도로를 내달리는 고속의 고철덩이가 그를 향해 닥쳐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느긋하게 걷고 있다.

내가 구해야 한다. 그에게 위험을 알려야 한다. 그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위험해?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

도망쳐? 마찬가지겠지.

그를 불러서 위험을 알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부를 수 없었다.

야! 같은 호칭으로 그가 눈치를 챌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냥 하면 된다. 그가 눈치채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믿고 외치면 된다.

그런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움직여!

이러는 중에도 도로를 달리는 쇳덩이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를 다시 한번, 영원히 잃을지도 몰라.

내가 구하기엔 늦었어.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그를 살려줘!

“xx! 위험하잖아!”

어…?

고속의 자동차는 나와 그의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자동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건너에 카츠히코의 손에 이끌린 그와 놀란 눈의 사야가 있을 뿐이었다.

“미안. 조금 생각 좀 하고 있었어.”

“생각도 좋은데 도로에선 위험하잖아! 너 방금 죽을뻔했다고?”

“아하하하…”

그가 살았다. 카츠히코가 그를 구했다. 그런데 난? 나는 뭘 했지?

“미안. 나 급한 볼일이 생겨서 돌아가봐야 될 거 같아.”

“잠깐, 미츠하?”

“너 왜 그래?”

나는 급하게 방향을 틀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그가 죽을 뻔했다. 카츠히코가 없었다면 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깟 이름 하나 모른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달려 그를 밀치는 것도, 그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소리치는 것도 하지 못했다.

나로는 안 됐던 것이다.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었던 거야.


#5

시간은 흘러 벌써 5월 중순이 되었다.

혼자만의 골든위크는 예년과 같이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그의 연락을 일절 무시한 채 집과 회사를 왕복하고 있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에어컨을 조금 빨리 틀기 시작한 지하철을 타고 인파를 헤쳐 집과 회사를 왕복했다.

중간에 어딘가로 새지도 않고, 오직 필요한 장거리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올라 연립주택의 문을 열고 식재료를 싱크대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조금은 딱딱한 매트리스가 내 몸을 가볍게 받아내지 못해 충격과 함께 튀어 올랐다. 흔들림이 멈추고 나와 매트리스가 하나가 되었을 무렵,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택배인가? 나는 그런 것을 시킨 기억이 없다.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문 걸쇠를 걸어 잠그고 조심스레 현관을 열었다.

살짝 열린 현관의 틈새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제발 말 좀 들어줘! 왜 나를 피하는 거야?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게. 부족한 게 있다면 더 잘할게! 부탁이니까 이유라도 알려줘!”

그가 왔다. 솔직히 말해서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뻐해선 안돼.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돌아가줘.”

“싫어. 이유를 알려주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는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선 안됐던 거야.”

“안되긴 왜 안돼!”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직 현관문 밖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관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철문의 차가움이 등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문을 열고 그를 볼 자신이 없다. 나를, 우리마을을 구해준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름을 모른다는 한심한 이유 하나로.

“돌아가. 우리는 같이 있으면 불행해질 뿐이야. 나로서는 너를 도와주지도, 구해주지도 못해.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너는 그런 여자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야.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

“구하다니? 저번에 차에 치일 뻔했던 그거? 그거라면 카츠히코가 구해줬잖아. 너는 멀었고! 가까웠던 카츠히코가 구해줬어. 이게 뭐가 문제야?”

“그 차는 내가 먼저 발견했어! 내가 빨리 위험하다고 소리쳤다면 그럴 위험조차 없었다고! 그런데 내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알아? 그깟 이름 하나 몰라서 그랬어. 그거 하나 모른다고! 온갖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지도 못했어. 그때 카츠히코가 없었다면… 넌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돌아가. 나랑 같이 있으면 불행해질 뿐이야.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거. 너도 스트레스 받고 있잖아?”

“그건… 어쨌든 그때 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건 문제 없다니까! 제발 문 좀 열어! 최소한 얼굴은 마주보고 대화하자!”

“그만해! 돌아가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제발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어…? 내가 지금…

“…미안. 나, 돌아갈게.”

문 건너에서 들리기 시작한 발자국 소리는 인기척과 함께 멀어져 갔다. 그가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좀 편해진 것 같다.

드디어 알았다. 나는 그를 위하는 척 하면서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있었던 거야. 사실은 전부 내가 힘들었던 주제에.

이기적이고 옹졸한 여자다.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지만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다 끝났네.”

한쪽 눈에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뱉은 혼잣말은 공기를 타고 흩어져 사라졌다.

#6

그와 모든 것을 끝낸 뒤에 내 일상은 당연하게도 이전과 같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볍게 씻은 뒤 머리를 묶고 회사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회사가 끝나면 장을 본 뒤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취미생활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볼 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청소를 하거나 산책을 나간다. 이 산책은 찾고 있던 무언가, 그를 찾기 위해 다니던 산책. 나는 그 시간에 카페로 향했다.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지만 카페는 도쿄에 왔을 때부터 계속 다녔다. 이런 걸로 내 생활에 변화가 있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도 주말이 되고 카페에 왔다. 카페에 오면 그가 있지 않을까 무심코 확인을 할 때가 있다.

그가 없으면 나는 안심하고 자리를 골라 앉는다. 지금까지 만난 적은 없지만.

오늘은 그 남자 대신 테시가와라 부부가 카페에 있었다. 아니, 우리는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오랜만에 셋이서 만나자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에어컨의 바람을 느끼며 들어가자 카츠히코와 사야가 같이 앉아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른 거야?”

“별일 있겠냐? 그냥 친구 얼굴 보자고 부르는 거지.”

카츠히코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불러줘서 고마워. 마침 답답했던 참이거든.”

어제 집 청소를 모두 끝내두었기 때문에 일요일인 오늘은 특히나 할게 없는 하루였다.

평소처럼 혼자 다니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라, 사야가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불렀을지도 모른다.

“요즘 어떻게 지내?”

사야의 가벼운 안부인사. 평범한 안부인사에 불과하지만 거기서 사야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야 언제나 똑같이 지내지. 회사, 집, 회사, 집… 사야, 뭐 재미있는 거 없어?”

“재미있는 일이라…”

내가 천연덕스럽게 꺼낸 말에 사야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야,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뭐야? 혹시 화장실이야? 그럼 빨리 다녀오는 게 좋아.”

“화장실 아니야 이 멍청아!”

나와 사야의 짧은 즉석콩트에 카츠히코가 옆에서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카츠히코의 웃는 모습을 우리가 조용히 지켜보자, 그는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츠하, 사실 우리가 널 부른 이유는 말이야…”

“알아. 그 남자에 대한 얘기지?”

“어? 그건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

“당연히 알지. 너희랑 몇 년을 같이 지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야가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 내가 먼저 말하자 그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럼 본론부터 말할게. 너, 이대로 괜찮겠어?”

“괜찮냐니?”

“xx랑 만났었어.”

아직도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와 있을 수 없어. 그를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도.

“어디까지 들었어?”

“너희가 옛 친구라는 것까지. 네가 왜 xx를 피하고 있는지는 결국 알려주지 않았어.”

“미츠하, 알려줘. xxxx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일 없었어. 그가 호들갑 떠는 게 아닐까?”

“우리가 너랑 몇 년을 지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잖아?”

“알았어, 말할게. 우리는 옛날에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 그 사람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깨달은 거야. 그가 지금도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xx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면?”

“말했잖아?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자격이라니, 너 대체…”

카츠히코가 한숨을 내쉬고 사야는 말문이 막혔다는 듯 답답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이런 대화는 그만하고 싶다. 나는 오랜만에 너희랑 만나서 즐겁게 대화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돼버린 걸까.

“미츠하, 사실 xx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어.”

“비슷한 얘기라니?”

“xx는 옛날에 잠깐 너와 친했었다고 말했어. 그리고 그때 너에게 반했대. 여기까지 맞지?”

“응 맞아. 그 남자는 나에게 펜으로 소심하게 고백했어. 나는 답도 하지 못했지만 나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고.”

“최근에 너희가 재회했을 때 드디어 찾았다며 기뻤대. 그런데 같이 만나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

“이상한 느낌이라니?”

“자기가 좋아하는 게 지금의 너인지 옛날의 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대. 옛날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봐.”

“그거야 당연하지. 자기도 옛날이랑 달라진 주제에.”

사람은 변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장 그 남자만 봐도 저번에 나와 카페에 갔을 때 쇼트케이크를 시키며 입맛이 변했다고 했다. 사람은 변하고,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런 당연한 이치가 대체 무슨 문제인 걸까.

“지금의 너를 좋아하는지, 옛날의 너를 좋아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을 무렵, 너에게서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다고 하더라. xx는 그 뒤에 지금의 너와 옛날의 네가 다르다는 것과 자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깨달았대.”

“거기서 어떻게 내가 옛날과 다르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알겠냐?”

“미츠하, 타치바나는 결국 지금의 네가 좋다고 판단했어. 그런데 도저히 연락할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 더 상처 줄까 봐 두려웠대.”

“사야? 지금 뭐라고 했어?”

방금… 굉장히 중요한 것을 들은 것 같아.

“더 상처 줄까 봐 두려웠대.”

“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타치바나는 결국 지금의 네가 좋다고 판단했어? 미츠하, 왜 그래?”

들렸다. 생각났어! 그의 성은 타치바나. 타치바나였어!

이름은 왜 안 들리는 거지? 뭐가 문제지? 왜 갑자기 성만 들리고, 성만 떠오른 거지?

옛날의 나는 그를 타치바나라고 부르지 않았어. 나는 그를 뭐라고 불렀지?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방해 받고 싶지 않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 직면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휴대폰이 굉장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굉장히 후회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불안함이 나를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에 못 이겨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새 메시지가 1개 있습니다. - 타치바나 xx]


“뭐해? 어서 가보지 않고.”

“사야, 카츠히코. 미안! 나 먼저 갈게!”

가방을 들고 재빨리 카페를 나왔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7

카페에서 뛰쳐나오자마자 달리고 또 달렸다.

바람은 전신을 스쳐 지나가고 보도블럭을 박찰 때마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네. 사실 여러 번 메시지를 써봤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어.

결국 이렇게 마지막이 되어서야 용기를 내보네.]


뛰어서는 도저히 시간에 맞출 수 없다. 그렇다고 택시를 불러서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나는 택시정류장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 오늘부터 유럽으로 가게 됐어.]


“하네다 공항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택시정류장의 맨 앞에 있는 택시기사님에게 급박한 어투로 말하자 기사님은 당황하시면서도 빨리 타라며 문을 열어주셨다.


[내가 건축 쪽에서 일하는 건 이미 알잖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가서 더 많은 건축물을 보고 더 넓은 세계를 느끼고 싶어.

사야카와 카츠히코를 만났어. 걔들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던데.

별로 대단한 말은 하지 않았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한들 믿어줄 리도 없고 말이야.

아니, 카츠히코라면 믿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길이 너무 막혀서 도저히 제시간에 도착 못하겠는데요?”

“어떻게 갈 방법은 없나요? 만나야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앞에 사고라도 난 것 같으니 자동차로는 무리입니다. 거의 다 왔으니 차라리 뛰어가시는 게 제시간에 맞을지도 몰라요. 10분 정도 꾸준히 뛰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가지세요!”


[처음에는 해외로 나간다는 생각에 떨리기도 했는데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

딱 하나, 마지막으로 너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쉽다.

괜히 이런 거 보내서 좀 낯간지럽기도 하고.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할게.

건강히 잘 있어.]


한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깨지는 것 같다. 거칠어진 호흡은 폐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땀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달리고 있는 걸까.

나는 옛날과 달라졌다. 그 역시 변했다.

우리는 달라졌고, 우리는 과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27살의 나, 24살의 그. 우리는 현재의 위에서 과거를 걷고 있었다.

사야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지금의 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는 먼저 과거를 벗어나 현재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아직 모르겠다. 옛날의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변했다. 나는 10년 전, 7년 전의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의 그를 좋아하고 있을까?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지금의 그와 옛날의 그 중에 누구를 좋아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를 만나야 해. 만나서, 지금의 내 마음을 확인하고 이 일에 매듭을 짓고 싶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나는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서둘러 공항맵을 확인하고 출국장으로 달렸다.

지금이라면 그는 이미 출국심사대를 지났을 시간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는 그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10분, 그 정도는 나를 기다리고 들어가도 아슬아슬하게 비행기에 탈 수 있을 시간이니까. 그는 나를 기다려줄지도 모른다.

에스컬레이터를 달려 3층의 출발로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미 들어가버린 걸까?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움직일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굉장히 그리웠던 실루엣, 그러나 도저히 만날 용기가 없었던 그 모습에, 나는 남은 기운을 쥐어짜 그를 불렀다.

“타치바나!”

나는 이런 식으로 그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이거라면 그도 알아들을 수 있다. 예상대로, 그는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 어떻게 여기에?”

“그 문자, 나한테 와달라고 보낸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타치바나라니, 내 이름, 떠올린 거야?”

“아직은 성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그래도 드디어 널 부를 수 있게 됐어.”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놀랐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놀랐어. 그보다 기쁘기도 했지만.

“왜 아직도 너라고 부르는 거야? 아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거야?”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걸?”

“지금 놀리는 거지!”

“미안, 미야미즈라고 부르면 될까?”

“싫어, 미츠하라고 불러줘.”

“네가 xx라고 부르면 나도 불러줄게.”

“떠오르지도 들리지도 않는걸 어떻게 불러!”

그는 미안하다며 웃기 시작했다. 이게 뭐가 웃기다는 걸까.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계속 웃었다. 때묻지 않은 소년과도 같은 그 모습에 나도 피식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웃음은 전염된다고도 하던가, 나 역시 그를 따라 웃게 되었다.

저녁노을의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비추는 장소, 그곳의 정상에서 함께 웃던 그 순간의 우리처럼.

지금 이 순간만큼은 10년 전의 우리와 다름없이, 아이처럼 웃었다.

“미안, 이제 슬슬 들어가야 돼.”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내 문자를 받자마자 달려온 거잖아? 마지막으로 네 웃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충분해.”

그는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약간은 굳은 진지한 표정으로, 주먹을 쥔 손에는 힘줄이 약하게 드러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나는 옛날의 너와 지금의 너, 둘 중에 누구를 좋아하는지 헤매고 있었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옛날의 너와 지금의 너는 같은 존재지만 같은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그걸 깨닫고, 최근에 나는 내 마음을 정했어. 아니, 확실히 깨달았다고 해야겠지. 내가 좋아하던 건 옛날의 너야. 지금의 네가 아니라.”

“응, 알고 있어. 나도 그랬는걸.”

지금은 알고 있다. 옛날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다른 사람이고, 내가 좋아하던 그는 10년 전에 만난 고등학생인 그였다.

“하지만 옛날의 너를 좋아했던 나 역시 옛날의 나야. 너를 만나기 전까지의 나. 이제 아니야. 난 지금 내 앞에 있는 네가 좋아. 너는… 어때?”

“나는…”

잘 모르겠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을 해봤지만 그 답은 얻을 수 없었다.

그를 만나고, 그에게 고백을 받았음에도 내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단 한가지, 그의 고백에 내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내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아직 모르겠으면 그걸로 됐어. 그래도 내가 일본에 돌아올 때, 그때까지 답을 얻었다면, 너도 지금의 내가 좋다면 나를 데리러 와줘. 그리고 그… 결혼하자. 두 번 다시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결혼? 아직 사귀지도 않는데? 게다가 나는 아직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너무 성급한 거 아니야?”

“이미 7년이나 기다렸어.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가 재회한지는 아직 3달도 안되었지만 우리의 인연은 10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이제 진짜 가볼게. 건강하게 잘 있어.”

“너야말로 건강하게 잘 있다 와.”

그는 말없이 출국장으로 향했다. 나중에 돌아올 그를 위해서,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도 일단 돌아가자. 돌아가서 카츠히코랑 사야에게 먼저 나온 사과부터 하고, 둘에게 조언이라도 얻어보자.

그때 출국장으로 향하던 그가 멈췄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나를 바라봤다.

“다녀올게, 미츠하.”

어…? 어떻게…

그는 물어볼 틈도 없이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기도 전에, 그는 오랜 여행길에 올랐다.

알고 있었으면 처음부터 불러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제 알았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불리길 원했던 거야. 그리고 이건 그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타치바나지만,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 너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도록 할게.

마음이라는 게 정리한다고 정리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돌아오기 전에 확실히 정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마지막에서야 이름을 불러준 이유가 설마 나를 자극하려던 건 아니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너무한 남자다.


#8

여름하늘 드높이 푸르게 빛나고 눈처럼 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맺혀있는 8월의 어느 날 오후.

나는 연립주택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8월에 돌입하자 새들은 자취를 감추고 거리는 매미울음소리로 가득하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선크림을 바른 피부가 달구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도 평소보다 낮은 습도에 그늘에 들어가거나 바람이 불면 금새 시원해지곤 한다.

역으로 가는 길에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테시가와라 사야카, 나는 수락버튼을 밀고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미츠하, 지금 뭐하고 있어?”

“나? 글쎄, 산책?”

“산책? 오늘이라면서! 까먹은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역으로 가는 길이야. 최소 1년은 있을 것처럼 말했으면서 갑자기 회사 사정으로 돌아온다니, 웃기지 않아?”

“그래서 싫어?”

“아니, 지금 굉장히 설레고 있어.”

“실수하지 말고, 똑바로 해.”

“나를 뭐로 보고! 27년간 똑 부러지게 살아온 미야미즈 미츠하거든?”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해?”

“더 심한 말도 할 수 있는걸?”

“너, 많이 변한 거 같아.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그래서 싫어?”

“아니, 지금이 더 좋아.”

“고마워. 아, 이제 역이니까 슬슬 끊을게. 전철에서 전화하긴 좀 그렇잖아?”

“알았어. 잘 다녀와. 다음엔 넷이서 보자.”

짧은 통화, 그러나 내 긴장을 녹이는 데에는 충분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개찰구를 지나 에어컨냄새가 강하게 불어오는 전철에 올랐다.

얼마 안 남았다. 그래도 시간적 여유는 있다. 전철의 안내방송은 도착역을 알리고 캐리어를 든 사람들이 차량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행렬에 몸을 맡기자 어느새 나는 공항로비에 도착해있었다.

2층의 도착로비에 가자 도착장의 문이 열리고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각자 가족, 연인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본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기다리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사람들은 하나둘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닫혀있던 도착장의 문이 다시 열리고 맨 앞에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기다린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다.

캐리어를 끌고 달려오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역시 나에게 손을 흔든다.

“다녀왔어, 미츠하.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

“1년은 못 오는 것처럼 호들갑 떨더니, 2개월만에 돌아오는 건 좀 심하지 않아?”

“그땐 이렇게 빨리 올 생각이 없었으니까, 회사에서 부르는걸 어떡해? 돌아와야지.”

“갑자기 돌아온다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해, 그래도 나는 빨리 올 수 있어서 좋았는걸?”

“그건 참 다행이시네요.”

“그래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는 말이 그거밖에 없어?”

“뭘 더 바라는데?”

사실 이미 알고 있다.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건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이기도 했으니까.

두 달 전의 보답, 대답을 할 때가 왔다. 약간 풀이 죽은 그를 바라보자 그도 눈을 마주쳐오기 시작했다.

심호흡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고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본다.


“어서와, 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