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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픽 콘테스트 출전용입니다.

* 원작의 설정에서 바뀐 건 없습니다. 다만, 제 나름대로 해석한 부분은 있을 수 있습니다.


- 미싱 링크 (Missing Link)


0.


혹시, 스스로에게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아마 누구에게나 한두 번 쯤은 있을 경험이고, 그 대상 또한 다양할 것이다. 무언가를 해낼 능력, 하고자 하는 의지, 성격상의 결함 같은 거창한 것들부터 단지 술을 잔뜩 푼 뒤 잠깐 기억이 끊긴 해프닝까지. 이처럼 매번 다른 이유로 사람은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논할 때면 내 결론은 항상 같다.


인생이란 건, 항상 절대 도달하지 못할 만족이란 걸 찾아 헤매는 무한한 여정이 아닐까.


나 또한 인생의 많은 순간에서 내게는 없는 수많은 것들을 부러워하며 살아왔다. 개중엔 나의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했던 일도 있었고, 그렇지 못해서 무한한 부러움에 혼자 몸부림치다 결국 나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다.


지금부터 나는, 굴곡진 내 인생에서도 조금은 특별하게 남아있는 순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 # #

 

아침에 일어나면, 어째선지 울고 있을 때가 있었다.


어째서 그랬는지, 그 땐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악몽을 꾸었던 것일까? 그 날의 바이오리듬이 하한가를 쳤던 것일까?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전부 부질없는 짓에 불과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줄곧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찾고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장소인지도 모르는 그것을 나는 그저 맹목적으로 찾았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그런 나를 지켜보던 친구들, 가족들까지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무덤덤한 세월의 흐름에 내가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쯤은.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걸 포기하는 순간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두 번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조금씩 닳아갈 뿐이지만, 그걸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 나라는 인간을 이루는 토대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찾아내지도 포기하지도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자기 전에 기도라도 해 보는 것뿐이었다.


부디, 내일은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기나긴 세월 끝에, 마침내 그 기도는 이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째선지 울고 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1.


그런데, 그 때만큼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무거워….’


아직 미츠하, 아. 이때는 아직 미야미즈 씨라고 부를 때였던가. 그래도 일단은 미츠하라고 서술하겠다.


아무튼 아직은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시절에,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함께 술을 펐던 적이 있었다. 술자리 자체는 좋은 자리로 끝났지만, 결국 마무리까지 좋았던 자리로 남지는 못했다. 신타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뻗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츠카사랑 나, 둘이 번갈아가면서 신타를 업고 다녀야만 했다. 그 때, 커다란 짐짝을 멘 채 난 이렇게 생각했었다.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술 먹고 늘어져도 이렇게까지 무겁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렸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역시 축 늘어진 사람이란 존재는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 무지 힘들었다. 정말로.


그래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인 내 집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이 고생을 잠깐이라도 잊기 위해서는 뭔 생각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나는 다급히 생각거리를 떠올렸고, 이내 성공했다. 그래,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을 찾아보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발은 계속 빠르게 놀려야만 한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오늘 야근을 시킨 부장을 원망해야 하나?’


그러기엔 거래처에서 갑자기 뭘 좀 알아봐 달라는 급한 전화가 왔다며 연신 미안해하던 부장의 모습이 좀 걸렸다.


‘부장한테 그 일을 시킨 거래처?’


아냐. 나는 마음속으로만 고개를 슬쩍 저었다. 만약 그 쪽 입장이 되었다면, 나 또한 그렇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일에 화낼 수는 없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상황, 결국, 돌고 돌아서 도달한 결론이란 무엇이었나면.


‘내가 못난 탓이지.’


남들이 보면 얼토당토않다고 할지도 모른다. 거래처도, 부장도, 그리고 나 자신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움직였고, 그래서 그녀와의 약속에 늦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 또한 내게 전화로, 문자로 이해한다. 알겠다. 기다릴 테니 조바심 부리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나는 괜찮다고 말을 했었다.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역시 괜찮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늦은 야근이 끝나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서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나 없이도 잔뜩 마신 채 반쯤 뻗어 있었다. 


“아! 타키다~”


아직도 생전 처음 들었던 그녀의 꼬부라진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는 황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쩐 일로 이렇게까지 마셨는지 꼭 물어봐야만 했다. 미처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쁨을 느껴볼 새도 없었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빠른 사람이 있었다. 가게 주인이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늦게 온다던 일행분이십니까?”

“아, 네.”

“저 여성분, 한 시간쯤 기다리다가 그 뒤로 계속 마시더군요.”

“….”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늦은 탓인 걸 어찌하랴.


“보다시피, 저렇게 되었으니 이제 늦게라도 남성분께서 좀 챙겨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내가 봐도 여기서 더 있는 건 무리였다. 결국, 뭐라고 말해볼 껀덕지도 없이 나는 그녀를 들쳐 메고 나와야만 했다. 처음 왔을 때부터 반쯤 뻗어 있던 그녀는 기다리던 내가 와서 긴장을 푼 것인지 완전히 꿈나라로 가버렸다. 어디로 갈까 물어보고 싶어도 대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고, 어차피 잔뜩 취한 사람을 데리고 갈만한 데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행선지는 내 집밖에 남아있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를 업은 채 내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창 조명으로 찬란한 도쿄의 밤거리를 열심히 걷고 있을 때였다.


“너는, 누구니…?”


갑작스런 소리에 뒤를 보니, 여전히 미야미즈 씨는 잠에 빠진 채였다. 별 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저 잠꼬대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뭐, 답은 명확했다.


아마도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누구를 찾고 있을까. 꿈에서라도 애타게 찾을 정도라면 얼마나 애절한 인연일지.


얼굴조차 모르는 그녀의 ‘인연’을 떠올리며 그 때의 나는 생각했다. 그 인연의 상대가 나였으면 좋았을 텐데.


# # #


“휴….”


그녀를 침대 위에 고이 모셔두고 나서야 나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제 그냥 깰 때까지 자게 두면 된다고 생각하니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쪽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야만 했다.


땀으로 젖어버린 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샤워를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근데 막상 내 방을 뺏기고 나니 내가 달리 갈 곳이 없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집은 나 혼자 살던 집이라 그렇게 넓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거실 하나에 내 방 하나가 전부인 단촐한 집. 하지만 내 방은 이미 미츠하에게 내준 상태. 티비에서 나온 집들처럼 거실에 커다란 소파라도 있었으면 거기에라도 누웠겠지만 그런 것도 당시엔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식탁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어찌어찌 자리를 잡고 나서도 문제였다. 남자 혼자 식탁 옆에 앉아 뭘 하겠는가. 그래서 몇 분을 멍하니 앉아있자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기에, 시간도 늦은 김에 엎드려 자려고도 해 보았었다. 당연히도 잠이 올 리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내가 할 수 있던 일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냉장고로 다가간 나는 익숙한 손길로 맥주를 꺼내들었다. 안주는 꺼내지 않았다. 왠진 모르겠지만 그 때는 안주 같은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밤의 어둠이 깊게 내린 도시의 풍경을 안주삼아서 마셨다. 어둠을 도처에서 밝히는 가지각색의 조명들이란 지금 생각해도 꽤나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술친구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곧, 알싸하게 올라오는 취기와 함께 조금씩 몸의 힘이 풀려갔다. 노곤해진 몸을 의자에 푹 기댄 채로 나는 조금씩 생각에 빠져들었다.


모든 게 꼬였다. 오늘이란 날은 이렇게 보낼 하루가 절대 아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불타는 금요일 밤을 맞아서 우리 둘 다 기분 좋게 적당히 한 잔씩 하면서 서로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랬던 계획이 야근 한 방에 이렇게까지 꼬인 거였다. 물론 거기에 대해 딱히 내가 할 말은 없었다. 어쨌든 일차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건 나였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알고 싶었다. 왜 그녀는 그렇게 취할 때까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 말은 안했지만, 내가 늦게 와서 심통이 났던 걸까? 아니다. 그녀는 앞에서 괜찮다고 해 놓고 뒤에서 호박씨를 깔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가 잘 안다. 그러니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갑자기 조금씩 가슴이 답답해져 온 탓에, 나는 맥주 한 캔을 더 따서 마셨다. 그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잊어보기 위함이었다.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스가 신사 앞 계단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때도 나는 이미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겐 이 사람뿐이다. 이 사람을 놓치면 다음은 그 누구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 또한 내가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항상 같은 말이 돌아왔다. 대표적으로 츠카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랬다.


“오히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느낌인데?”


그래서 처음엔 우리들의 미래에는 항상 장밋빛 희망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럴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둔해빠진 나는 미츠하의 얼굴 한구석에 드리운 그늘과 마주치고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단 한번뿐이었다면 차라리 그날따라 기분이 좀 안 좋았나보다 하고 넘기기라도 했겠지만, 한번 마음속 그늘의 존재를 알고 나니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나와 만나서 인사할 때도, 같이 카페에서 이야기를 할 때도, 다음을 기약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뗄 때조차도 그녀의 얼굴 한구석엔 늘 조그만 그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츠하와 함께 있으면 항상 행복했기에, 그녀 또한 나처럼 마냥 행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는가.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한 좌절이었다.


내가 싫어서 그랬던 거라면, 싫은데도 억지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었다면 내 속이야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결정 자체는 편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미츠하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가 인생의 방해물에 불과하다면 내가 떠나면 그만인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싫어서 그런 표정을 지은 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조금은 안심했다.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그래도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조금의 안심 뒤에 찾아온 건 다름 아닌 미칠 것 같은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나는 알고 싶었다. 그녀 얼굴에 드리운 그 그늘의 정체가 뭔지.


하지만 실패했다. 미츠하는 절대 그 그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녀의 성격쯤은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물어보는 바보짓은 안했다. 그저 슬쩍슬쩍 미끼를 던져봤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나보단 미츠하 쪽이 한수 위였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쪽으로 화제를 몰고 간다 싶으면 그녀는 귀신같이 말을 돌렸고, 나는 또 돌리면 돌리는 대로 굴비 엮이듯 따라가곤 했다.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나는 미츠하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시원하게 날려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그녀를 옭아매는 저 단단한 응어리를 풀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반드시 그 고민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알지도 못하는 고민을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오늘, 조금이지만 그 편린 중 하나를 보았다. 내 등에 업힌 채 꿈을 꾸던 미츠하는 분명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원래 그럴 사람이 아닌 그녀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채 애타게 그릴 정도라면, 아마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겠지.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닐 것이다. 이미 만난 사람을 그리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 싶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건 내 손을 벗어난 일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하루라도 빨리 그 사람이 미츠하의 앞에 나타나기를.

그리고 또한 진심으로 바랐다. 다시는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이율배반의 함정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뿐. 나는 술을 마셨다.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별것도 아닌 고민이었지만, 그 때의 나는 정말로 진지했다.


# # #


오랜만에 다시 꿈을 꾸었다. 미츠하를 만나기 전에 가끔 꾸던 꿈을. 그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린 내가 지하철을 타고 있다. 그리도 어렵고 지긋지긋했던 영어 단어장을 들고 있는 채로. 그리고 왜 농구 선수한테는 필요도 없을 영어를 굳이 가르치느냐고 속으로 일본 문부과학성을 욕하는 중에 꼭 누군가 말을 건다. 그것도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면서 말이다.


“타키, 타키!”


나를 부르는 여자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다. 역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매번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용을 쓰지만, 모자이크처럼 흐릿하기만 할 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얼굴조차 모르는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기억, 안 나니?”


# # #


“허억!”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꿈을 꾸고 나면 곱게는 못 일어났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식탁에 처박고 있었던 고개를 들었다. 이미 몸의 여기저기서 식은땀이 잔뜩 흐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일어났어?”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천사가 있었다. 나는 그 천사의 이름을 입 밖으로 냈다.


“미야미즈… 씨?”

“그래, 속은 좀 괜찮아?”

“아… 네. 저 그렇게 많이 안 마셨어요.”


내 변명에 그녀가 쿡쿡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맥주캔은 다 치워 놨어.”


그 말에 나는 황급히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녀 말대로였다. 아니, 맥주캔 뿐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집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와, 이게 바로 여자의 힘인가. 하고 감탄하면서도 아침부터 괜히 빚을 진 것만 같아서 너무 쑥스러웠다. 


“뭐라도 좀 먹을래?”

“네?”

“하룻밤 신세도 졌는데, 아침 정도는 해 줘야지.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뇨, 아뇨! 그건 제가 할…”


제가 할게요. 라고 말하려 했던 나였지만, 쉿. 하고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가 보이는 그녀를 앞에 두고 있자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젠장, 저건 반칙이잖아.


“이럴 땐 그냥 가만히 누나한테 맡기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나의 반론을 원천봉쇄하고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하나하나 꺼내더니 이내 능숙한 손길로 다듬기 시작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유 모를 포근함에 감싸인 채,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 # #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미야미즈 씨.”


식사가 끝나고, 나는 진심으로 미츠하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의 감사에 그녀는 손사래를 저으며 별 것도 아닌 일이라고 괜히 부끄러워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미츠하가 내게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 준 식사였던 것이다. 것뿐이랴. 맛까지 일품이었으니. 고맙지 않은 게 이상하다. 이후로도 나는 온갖 치사를 잔뜩 늘어놓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 버리는 그녀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더 그랬던 면도 있었지만 말이다.


잘 얻어먹었으니,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는 설거지도 자기가 하겠다고 우겼지만, 이것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었기에 무조건 밀어붙였다. 어쨌거나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식사 준비도 모자라 설거지까지 시키라니, 내가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설거지가 끝나고, 다시 자리에 마주앉자 미츠하는 계속해서 어제의 일을 사과하려 들었다. 먼저 취해서 나를 힘들게 한 것도 모자라 방까지 점거하고 있었으니 면목이 없다면서. 아침에 모든 걸 혼자 다 하려 했던 것 또한 아마도 그 미안함의 발로였겠지.


하지만 나는 그 사과를 받지 않았다. 아니, 받기 싫었다. 어젯밤이 힘들지 않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아까도 썼지만, 솔직히 말해 술 취한 사람을 업고 오자니 무지 무거웠고, 힘도 들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사이를 고작 집 하루 빌린 일 가지고 사과가 필요할 정도의 사이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과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내 집 따위는 그녀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그리고 그녀에게 듣고 싶은 건 그런 남남 사이에서나 할 법한 사과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궁금한 걸 묻기로 했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응?”

“혼자서 그렇게까지 마셨을 정도면 아무래도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대답은 없었다. 난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면, 저한텐 말할 수 없는 일이에요?”

“…원래라면 그래.”

“원래라면?”

“그래, 원래라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야. 근데 왠지 그날따라 너에게라면 털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확 말해버릴까, 말까, 계속 고민은 되는데….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라, 혹시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내가 싫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꾸 머리는 복잡해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머리가 꽉 차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리고 정신차려보니 이 꼴이 되어있던 거야. 이상하지? 나.”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싶었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본다고? 싫어한다고? 내가? 미츠하를?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싶었다. 위에도 말했지만, 미츠하를 만난 그 순간부터 그녀가 싫어지는 일 따위는 이미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던 나였다. 나는 더 확실하게 말할 필요를 느꼈다.


“괜찮으니까 말해줘요. 무슨 말이든 다 들어드릴 수 있으니까.”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우물쭈물 계속 망설이는 그녀.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자니 조바심에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말해달라고 다그쳐보고도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선 더 캐물어봤자 역효과만 난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정 그렇다면 저부터 먼저 해도 될까요?”

“네?”

“사실, 저한테도 그런 고민은 있거든요. 말해봤자 미친놈처럼 보이겠지 싶을 정도의 이야기, 보통 사람에겐 절대로 하지 못할 이야기. 있어요. 저한테도.”

“…그걸 지금 저에게 털어놓겠다는 거예요?”

“네.”

“어째서?”


뒷말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어째서 하필 저죠?’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확신을 담아 내어지르듯 말했다.


“믿으니까요.”


잠시 굳어버린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던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망설임과 걱정이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을 다시 채워가는 저건 확실히 기쁨이었다. 나는 속으로 잔뜩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털어놓기 힘들다면 굳이 더 캐묻지는 않겠어요. 대신, 제 얘기를 할 테니 그거라도 들어주세요. 저는 미야미즈 씨를 믿어요. 그 누구보다도. 들어주실 거죠?”


그녀는 말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심호흡과 함께 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사실은 더듬을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거라곤 그 시절의 일이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전부였으니까. 백지처럼 흰 머릿속에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 몇 조각 기억만이 전부인, 나는 모르는 7년 전 나의 이야기. 좋아.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나는 말했다.


“저, 사실 기억상실이에요.”


미츠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2. 


기억상실. 말 그대로 기억을 잃는다는 것.


원인은 가지각색이다.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그럴 수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난 뒤 정신적인 방어기제의 작동에 의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 또는 과음의 결과로 순간적인 기억상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어느 쪽도 아닌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혹시,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최소한 나에겐 그런 경험이 없다. 나 자신을 제외하면 말이다.


7년 전, 그러니까 내가 고2였던 시절이고 연도로 따지면 2016년이었던 때의 일이다. 대입에 관련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큰 불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무슨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억만은 사라졌다.


2016년 9월부터 10월에 이르는 기간.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은 내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정신과도, 뇌과학 전공의들도 찾아가 봤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내 정신도, 뇌도 완벽한 정상이고, 의학적으로는 그 어떤 이상도 찾을 수 없다는 말만이 반복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나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신통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츠카사도, 신타도, 아버지도 단지 내가 조금 이상했다는 인상만이 기억난다고 했다. 지금은 츠카사와 결혼한 오쿠데라 선배는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도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때,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도 누군지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렇다. 그 때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조금씩은 있었다.


그렇게 뒤질 수 있는 데라면 전부 뒤져봤지만, 건진 거라곤 몇 개의 키워드뿐이었다. 이상해진 나, 티아마트 혜성, 그리고 이토모리.


# # #


“이상해진 나, 티아마트 혜성, 그리고 이토모리라고?”


내 말을 듣던 미츠하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아무 이유도 없이 기억이 없어졌다니 분명 놀랄 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놀라도 너무 놀라는 것 같아서 조금 뿌루퉁해지려고 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그녀는 나의 그런 기색을 금방 알아채 주었다.


“아니.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너, 혹시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니?”

“독심술이라뇨?”

“내 고향이 이토모리라는 거야 이미 알려주긴 했는데, 이상해진 나에 혜성이라니….”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기보다는… 뭔가 생각지도 못한 일에 가깝긴 한데. 역시 더 들어보고 생각해야겠어. 계속해 줘.”


혼란스러워하는 미츠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말로 하자니 뭐라고 해야 할지 너무 애매해서 나는 내 말을 하는 대신 잠자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 # #


그 시절의 나는 티아마트 혜성과 이토모리에 관심이 많았다. 정확히는 빠져 있었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왜인지는 모른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런 자세한 건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마을에는 어떤 연고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마을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


과거의 신문을 찾아 기사를 스크랩했다. 책을 빌려서 필사하기도 했다. 하라는 공부조차 등한시한 채 나는 그저 그 마을에만 모든 관심을 쏟았다. 친구들마저도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예전 마을의 풍경을 수록해둔 기사를 보면서 왠지 모를 기시감과 고향 같은 편안함을, 혜성 충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모두가 살아남았다는 기사를 보면서는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 때 내가 느꼈던 기쁨에 비교하려면? 아마 미츠하와 다시 만났을 때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기뻤었다.


어쨌든, 나는 시험을 망치는 것으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겐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아침에 가끔 울게 되는 습관도,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것도, 전부 그 때부터였다. 그리고 7년 뒤, 미츠하를 만날 때까지 나는 매일을 그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 # #


“미야미즈 씨?”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나는 급하게 미츠하를 불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동조차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그녀는 내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물었다.


“어라… 나, 울고 있었니?”

“잠시만요, 수건이….”

“괜찮아. 나 손수건 가지고 있어.”


수건을 가지러 가려던 나를 미츠하가 제지하고는 스스로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닦아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순간 좀 아쉬웠다. 눈물을 다 닦아낸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렇게 되면 정말 괜한 고민이었구나 싶네.”

“아까부터 자꾸 무슨 말씀이세요?”


독심술이니, 괜한 고민이었다니 둘 다 나로서는 전혀 영문 모를 소리였기에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말해놓고 조금은 무례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차분하게, 하지만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난 이제 말할 것도 별로 없어. 네가 거의 다 말해버렸는걸?”

“네?”

“나도 너처럼 기억상실이야. 너랑은 달리 10년 전 일이긴 하지만… 나도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을 못하거든. 그리고 그 때 이후로 갑자기 누군갈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 것까지. 똑같아. 완전히.”


설마로 남겨두고 있었던 가정이 맞았다는 황당한 소리에 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럼 뭐야.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 끌렸고, 그렇게 만난 사이인데. 알고 보니 둘 다 혜성을 전후한 기억상실이 있었고, 그 뒤로 강박증 환자처럼 산 것까지 똑같단 말이야? 이게 산술적으로 말이 되는 확률인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뿐이었다.


“신기하네요….”

“그렇지? 정말 신기하지?”


얼이 빠져버린 나를 앞에 둔 그녀의 모습은 왠지 되게 기뻐보였다. 저렇게까지 기뻐할 일일까 싶을 정도로. 아, 물론 나도 당연히 기뻤지만….


“그런데 말이야.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 혹시 그런 습관 없었니?”

“무슨 습관이요?”

“아침에 일어나서 울 때 말이야. 혹시 너도 모르게 오른손 같은 데를 쳐다보게 된다거나?”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묻는 나에게 그녀는 확실히 답해주었다. 이제는 더 놀랄 것도 없었다.


“응. 나도 그런 습관이 있었어. 혹시 왜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는 기억나?”

“아니요. 전혀.”

“나는 기억나. 말해줄까?”

“어떤 일이길래…?”

“혜성이 떨어졌던 날의 얘기야. 너처럼 그 전 한 달 정도의 기억도 희미하기는 한데, 특히 혜성이 떨어졌던 바로 그 날은 더 그랬어. 내가 뭘 하고 다녔는지 나도 몰라, 심지어 남한테 물어봐도 아는 게 없어. 뭔가 되게 중요한 일을 했다는데, 그게 뭔지 아무도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웃기지 않니?”

“안 웃겨요. 저도 뭔가 제가 무지 이상해졌다는데 어떻게 이상해졌는지만 물어보면 다들 입을 다물어 버리거든요. 기억 안 난다고.”

“아 맞다. 그랬지. 미안. 미안. 누나가 좀 너보다 나이가 있다 보니 가끔 깜박하고 그래. 이해해 줄 거지?”


이해 안 해주면 삐질 거면서. 하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아직은 풋풋하던 그 시절에도 미츠하는 의외로 잘 삐지는 기질이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고.


“과정은 기억 못해도, 결과는 기억나. 당시 정장이었던 우리 아버지가 충돌 1시간 전에 갑자기 피난 훈련 지시를 내렸고 기적적으로 우린 모두 살았어. 마을이 사라지던 그 모습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와. 정말 떠올리기 싫은 모습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오른손을 봤어. 뭐라 적혀있었는지 알아?”

“뭐라고 적혀 있었어요?”

“좋아해(すきだ).”

“네?”

“좋아해. 라고 적혀 있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 손바닥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정말 다시없을 소중한 것이 거기 있기라도 한 듯이.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그리던 ‘그 사람’이 써준 걸 거야.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혹시 펜 좀 잠깐 빌릴 수 있을까?”

“아, 네.”

“이왕이면 종이도 한 장만 가져와 줘.”

“잠시만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나는 방에 들어가서 펜과 종이를 찾아왔다.


“여기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응, 잠깐 좀 짚이는 게 있어서 한 번 시험해 보려고.”

“짚이는 거라면…?”


그 때만 해도 나는 그게 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바로 다음에 폭탄선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종이에 ‘좋아해’ 라고 써 봐.”

“네? 그치만….”

“얼른. 난 괜찮으니까.”


갑자기도 모자라 엄청 부끄럽잖아 이건.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어서 종이에 눈을 처박고 빨리빨리 써내려갔다. 달랑 세 글자 쓰는 게 그렇게 어려울 일은 그때까지도 없었고 지금까지도 없고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원래 이런 말, 그것도 미츠하 상대라면 글씨에도 더 신경을 썼을 텐데 그럴 겨를 따위도 없었다. 그 정도로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고백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쓰는 건 금방 끝났고, 나는 미츠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물론,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못한, 아니 그도 모자라서 꽉 감고 있는 채였다. 눈 꽉 감고 대답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나는 생각했다. 친구들이 이걸 알면 뭐라 그럴까. 러브레터를 쓸 거면 제대로 쓸 것이지 세상에 러브레터를 이렇게 날림으로 쓰는 놈이 어딨냐고 타박했겠지?


영원과도 같았던 순간이 끝나고, 마침내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손 줘봐.”


그 말에 나는 눈을 떴다. 다시 마주본 미츠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물을 말리지 못했다. 웃음. 눈물을 흘리면서도 활짝 피워내는 저건 분명 웃음이었다.


그 때, 행복에 겨워 울던 미츠하 모습은 아직도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손, 줘보라니까.”

“아. 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었고, 미츠하가 내 손바닥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금방이었다.


“자, 다 썼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감쌌다. 자연히 나는 오른 주먹을 쥐게 되었고. 손바닥에 뭐라 썼는지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녀는 내 오른손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랄 때까지 보면 안 돼. 알았지?”


여전히 상황 파악은 안 되었다. 아무튼 보지 말라니까 나는 그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눈을 감더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나도 여유가 없어서 몰랐지만, 역시 그런 단어를 써 놓고 긴장을 안 할 턱이 없었던 것이겠지. 그런 그녀를 보는 내 심장 또한 터질 것만 같이 뛰고 있었다.


“이제, 손을 펴 봐.”


이번에도 나는 그 말을 따라 손을 폈다. 다섯 손가락이 모두 펴지기까지 걸리는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길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마침내 손이 다 펴졌고, 나 또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 적혀 있는 건 단 두 글자였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도(私も)’


멍하니, 그저 멍하니 나는 말을 걸었다. 그 상황이 그저 내겐 꿈만 같았다.


“저기….”

“그게 내 대답이야. 나도 좋아해.”


수줍게 볼을 물들인 미츠하의 말은 너무나도 달았다. 행복해도 너무 행복했다. 진짜로 죽어버릴 지도 몰라. 그 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너였어. 내가 찾던 사람은…. 너야. 확실해.”

“확실하다고요? 어떻게?”


지금 생각해 보면 물어볼 것도 없는 일,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내가 좋아하는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바로 나란다. 누군들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아무튼, 그녀는 내 말에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내 손바닥 위에 쓰여 있던 그 필체랑 지금 네 필체가 완전히 똑같은걸.”

“필체가 똑같다고요? 그렇지만 저는 이토모리에 간 적이…”


없는데요? 라고 말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토모리에 간 적이 있었다. 경황이 없어서 내가 이토모리에 간 적이 있다는 것도 스스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고등학생 때 영문도 모르게 이토모리 주변의 산 꼭대기에서 깨어난 적이 있다는 말을 했나? 안 했나?


다시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다. 내 반론을 듣자, 미츠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네가 내 손바닥에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는 몰라. 기억을 못하니까. 하지만 확실해. 우린 어릴 때 서로 만났어. 그리고 너는 내 손바닥에 좋아한다고 써줬고.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토모리에 간 건 이미 이토모리 마을이 없어진 뒤였다. 사실 이성적으로 따지면 불가능한 게 맞지만 왜인지 그렇게 말하기는 싫었다. 아니, 말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이성이라는 영역 밖에 위치한 무언가로부터 이런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난 대답하지 못했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기억이 났거든. 그래서 너를 10년 동안이나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녔던 거야. 그 때의 대답은 해야 했으니까.”

“확실히, 저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긴 했어요. 미야미즈 씨야말로 제가 찾던…”

“미츠하.”

“네?”

“앞으론 정확히 이름으로 불러. 존댓말도 금지야.”

“그렇지만…”


호칭은 이름에 말까지 놓으라니 세 살 차이나 나는데 갑자기 그렇게 하라 해도 될 리가 있냐. 문득 되게 난처한 여자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동시에 뭔가 그리운 느낌도 들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끝을 흐리며 곤란해 하는 걸 보던 미츠하가 이윽고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네가 먼저 못 하겠다면 내가.”


미츠하는 흡. 하고 조금 숨을 들이키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더니.


“타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을 감고 그녀로부터 전해져온 울림에 천천히 마음을 맡겼다. 몰랐다. 이렇게도 내 이름이 기분 좋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잔잔이 퍼져나가는 여운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미츠하.”


나 또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생각보다도 훨씬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어서 놀랐다. 나는 계속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의 얼굴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비할 데 없는 기쁨에 겨워 배어나온 눈물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마치 영혼에 서로의 이름을 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나중이랄 것도 없이. 물론, 마지막만큼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해. 미츠하.”

“나도 좋아해. 타키!”


두 번째 고백과 함께. 우리들은 서로를 꼬옥 끌어안았다. 품속을 파고드는 미츠하의 온기를 가슴에 새기며 나는 굳게 맹세했다. 다시는 잡은 이 손을 놓지 않겠다고.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고.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으리라고.



3.


내가 소개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아,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당연한 것 아닌가. 그로부터 1년 후, 우리는 결혼했고, 지금은 애도 세 명이나 딸려 있는 어엿한 부모가 되어있는 상태다. 첫 아이는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다. 딸아이인데, 내 딸이지만 미츠하를 닮아서 아주 똑똑하고 귀엽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을 누가 했더라? 아무튼, 그건 정말로 세상에 다시없을 명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넘어 이제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까지 키워가는 중이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오기 전, 친구들에게 보여주니 친구들은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기억은 어떻게 된 거냐고. 예전에 진짜로 만난 적이 있는 거냐고. 


나의 친구인 츠카사와 신타도, 아내의 친구인 사야카와 카츠히코도 전부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했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그 이야기가 신기한 이야기긴 했구나 싶다. 위에도 썼지만, 나조차도 이게 대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했었으니까.


근데 글쎄,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결론부터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래. 아직 우리는 그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의 우리들이 어떤 신비한 일을 겪었을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아직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난 이렇게 답하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했던 반쪽을 찾아냈고, 그것만으로도 서로 사랑을 나누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앞으로도 넘칠지언정 부족함은 없으리라고.


물론 당연하지만 그 뒤로도 마냥 평탄하고 문제없이 살았던 건 아니다. 가끔은 정말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고, 의견에 큰 차이를 보여서 부딪치기도 했다. 기억에 관련해서도. 그래, 문제가 없었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넘어가지 못할 벽은 단언컨대 없었다. 아니, 지금도 우리 둘이 함께라면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건 없으리라 믿고 있다. 우리는 분명 평범하고 어딘가 부족한 인간이지만, 부족한 부분은 서로 도와주며 살면 된다. 혹여 서로 메워주지 못할 틈이 우리 인생에 있다면? 뛰어넘으면 그만인 것이다.


청춘의 빈자리가 가끔 허전할 때면 우리들은 다시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그리고 매번 새롭게 맹세한다. 찾을지언정 매여 있지는 않겠다고. 잃어버린 추억의 빈자리에 매달리기보다는 앞으로의 추억을 만드는 데 열중하리라고.


나는 분명 기억상실이다. 그러나 그녀만은 잃지 않았다. 내겐 그걸로 충분하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전환점이 우리를 찾아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전환점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대신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미지의 미래로 나아가리라고 다짐했다. 이것이 우리들의 결론이다.


이제 정말로 글을 맺어야 할 때가 왔다. 요령 없는 나의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하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여러분의 미래 또한, 모두 행복으로 충만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