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을 고르라고 하면 졸업식이나 결혼식 등, 어느 중대한 일이 있는 날을 선택하고는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아름답게 간직하는 추억은 의외로 평범한 날들 중 하나일 때가 있다. 훗날 돌이켜보면 유난히 뇌리에 깊게 박혀있던, 비가 쏟아지는 그런 여름날이었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축축 처지고 우울해지는 그런 날. 반면에 바깥은 구름도 적당히 껴서 간만에 쾌적했고 바깥에서 찌르르 지저귀는 새들은 나가자며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츠하는 딱히 무언가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미츠하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괜히 새까만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딱히 연락이 올 곳이 없는데도, 마치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그 사람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금 뭐해?’라는 평범한 네 글자. 우울한 기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얼굴에는 잔뜩 화색이 돌았다. 토독토독. 미츠하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휴대폰의 자판에 닿으면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음, 난 그냥 집인데. 왜?
아니, 그냥 오늘 볼 수 있나 해서.
나도 그 말 하려 했는데. 지금 올 수 있어?
응, 지금 바로 출발할게.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서둘러 집을 나올 타키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츠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평범하게 지나치는 하루 속의 소소한 대화조차도 가끔은 얼마나 반가운지.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그로부터 30분쯤 흘렀을까,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마친 미츠하의 핸드폰이 다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보세요?」
「나 지금 밖이야.」
「벌써?」
타키의 말을 듣고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미츠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타키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츠하는 후다닥 짐을 챙기며 현관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니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타키가 보였다.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뾰족뾰족한 저 머리. 그의 머리카락은 미츠하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인 고슴도치를 연상시켰다. 미츠하 자신에게만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 고슴도치. 그래서 미츠하는 유난히 타키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한편 타키도 미츠하를 발견한 듯, 미츠하가 있는 방향으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타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내려간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키와의 만남에 대한 설레임이 실린, 타닥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살며시 울려 퍼졌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미츠하가 올라타자 문이 스르르 닫혔다. 5층, 4층, 3층. 엘리베이터 속 짧은 시간의 기다림. 그 약간의 시간은 초조함보단 문이 열릴 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진다. 1층에 도착하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미츠하는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사뿐사뿐 뛰어나갔다.
「타키.」
「미츠하.」
「오랜만인 것 같네.」
「그러게, 거의 일주일 만인가?」
「요즘 얼굴 보기 참 힘드네... 많이 바빠?」
「응, 이런저런 일로 회사 일이 많아져서...」
타키는 미안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멋쩍거나 미안할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 입던 갈색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온 걸로 보아하니 회사에 급하게 다녀왔던 것 같았다. 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함께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타키의 습관이나 말투, 그런 것들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감정 등 예전이라면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미츠하의 눈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ㅡ그것도 내가 널 알아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다음부터는 내가 타키 보러갈까?」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는데...」
「미안할 게 뭐 있어. 다음에 내가 힘들 때는 타키가 오면 되는 거지.」
「그렇네.」
타키는 그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미츠하도 그 미소에 응답하듯, 환하게 웃으며 타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은 미츠하의 손보다 더 크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좋다.
미츠하가 타키와 처음 데이트했을 때의 타키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와 같은 대사를 내뱉던 그 패기는 어디 가고, 왠 순박하고 어설픈 청년 한 명이 미츠하의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학교 생활이랑 무녀 일에나 바빴지, 연애라곤 꿈도 꿔 적 없던 미츠하도 마찬가지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몰라서 우물쭈물하기가 일쑤였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게 익숙해지자, 가끔은 그런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두근거려, 상대가 내 심장 소리를 들을까 봐 맘 졸여야 했던 그 시절이. 어느새 1년이 넘어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고 그들이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나 두근거림은 그 둘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로에게 익숙해짐에 따라 타키를 만나면 편안하게 느껴지고, 힘들 때는 일로 인해 쌓인 피로나 우울함 같은 것들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 익숙한 설렘도 어찌 보면 더 좋은 것이라고, 미츠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습관처럼 미츠하 집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그 공원으로 산책을 나오고, 타키와 미츠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파릇파릇한 초록색의 풀밭 옆의 가로수 길을 따라 종종 산책을 했다.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은 엷게 길 위에 비쳐 든다. 타키와 미츠하는 주말이면 황금빛과 초록빛으로 물든 그 길 위를 한적하게 이야기를 하며 거닐곤 한다. 그날따라 한가했던 그 공원의 가로수길을 걸으며 그들은 평소처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는 사야가 말이야ㅡ
정말? 그랬대?
응응.
「아, 그러고 보니 테시랑 사야 곧 결혼식 한다며? 그건 언제래?」
「아마... 다음 달쯤? 아직 언젠지는 안 정해진 것 같아.」
「나도 초대 받을 수 있으려나.」
「당연하지. 누구 남자친군데.」
회사 이야기, 가족 이야기, 주변 사람들 이야기. 혹은 아침밥을 뭐 먹었는지, 그 주 동안에 어떤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는지. 주변에도 널리고 널린 흔해빠진 이야기들. 딱히 특별한 주제 없이도, 일상적인 이야기들만으로 대화는 금새 활기차졌다.
즐겁게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걸어가던 중, 하늘에는 먹구름이 살짝 끼나 싶더니 차가운 빗방울들이 하나 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공기에서는 촉촉한 비 냄새가 났다. 곧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았다.
「앗, 차가워.」
「지금 비 오는 것 같은데.」
「타키군, 혹시 우산 없어?」
그 말을 듣고 타키는 가방을 뒤적거린다. 그의 표정이 굳어져 가는 걸 보아하니, 그 또한 우산을 챙기는 것을 깜박 잊어버린 듯 했다. 일기예보에서도 오늘 흐리기만 할 거라고 했고, 그래서 그들 중 그 누구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나는 없는데. 미츠하도 우산 안 가져왔어?」
「응... 어떡하지?」
타키와 미츠하는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우선 비를 어떻게든 피하기로 한 그들은 각자 손에 들린 가방을 집어들고는 그걸로 머리를 가렸다. 그러는 사이 빗방울은 조금씩 더 굵어져 투두둑 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고 가방으로 비를 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어디로 비를 피해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던 차, 마침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작은 정자가 보였다. 타키는 그곳을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츠하, 저기 보이지?」
「저기?」
「내가 신호하면 곧장 저리로 뛰어가는 거야. 하나... 둘... 뛰어!」
타키의 신호와 함께 그들은 정자 쪽으로 뛰어갔다. 급히 뛰어가던 미츠하가 빗물에 미끄러져 중심을 잃으려 하자, 타키가 팔을 뻗어 미츠하의 어깨를 꽉 잡았다.
「괜찮아?」
「응, 고마워.」
타키는 미츠하가 다시 넘어질세라, 그녀의 손을 다시 꽉 붙잡고 정자 쪽으로 뛰어갔다. 나란히 그곳으로 뛰어 들어온 그들은 옷에 잔뜩 스민 물을 짜내려고 애를 썼다. 차가운 빗물 때문에 자꾸만 재채기가 나왔다.
엣취.
타키의 갈색 정장은 흠뻑 젖은 가죽 같았고 뾰족뾰족 튀어나온 머리 또한 축 처졌다. 뭐랄까, 그는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괜히 그 모습이 처량해 보이면서도 우습게 느껴져서 웃음이 미츠하의 입 밖으로 비죽비죽 새어나왔다.
「하하, 타키. 다 젖었잖아.」
「사돈 남말하시네.」
툴툴거리며 타키는 젖은 정장에서 물을 털어내었다. 미츠하가 자신의 옷을 슬쩍 내려다보자 자기도 타키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괜히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와서 미츠하는 입을 막으며 키득댔다. 그걸 보며 타키는 자기를 비웃는 거라 생각해서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냥. 나도 그렇고 타키도 그렇고 쫄딱 젖었잖아.」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들은 정자 안의 벤치에 앉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밖을 바라보아도 거세지는 비바람은 금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미츠하는 말없이 옆에 있는 타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타키는 미츠하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며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슬며시 갖다 대었다.
곁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 은은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취. 하늘에서는 빗방울들이 수도 없이 떨어져 우리 몸을 흠뻑 적셨지만 거기서 나는 내음은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에서는 왠지 모르게 네 냄새가 나.
미츠하는 가만히 타키를 바라보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도 아무 말 없이 미츠하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길 뿐이었다. 여전히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듯 끝없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조금 춥고 옷도 축축했지만 그런 것들조차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대로 타키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천천히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은 저 편으로 물러갔고 정자 밑으로도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빗물이 개인 웅덩이에는 빛이 반사되어 보석이 빛나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자아내었다. 정자의 지붕 위에 다 마르지 않은 빗물들은 땅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면서 조그맣게 울리는 소리를 냈다.
이상하리만치 그 날의 일들은 유독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던 빗소리, 젖어서 무거워졌던 옷의 무게와 은은하게 느껴졌던 서로의 체취, 집에 돌아와서 마셨던 커피의 달콤한 향기까지도. 타키와 미츠하는 가끔씩 비가 오면 그 날이 생각나 추억에 잠긴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거나 그 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이유는 그 날이 타키와 함께했던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 중 하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 여름콘에 내려다 묵혀둔 건데 이번에 제출하게 되었네요.
그 때 느낌이 잘 안 잡혀서 좀 애먹었습니다.
원래 구상해둔 게 하나 있었는데 세 번 쯤 날려먹는 바람에
결국 급하게 여기에 초점 맞추고 오늘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마무리했더니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참 많고...
연중된 거나 빨리 마무리해야죠 뭐
잘 볼게요 감상은 오늘 새벽내로 달겠슴다
제출링크 제출해주세요 - 7월 1~16일 팬픽콘 개최 중입니다.
5132 세이프/잘 감상하겠습니다 ^~^
잘 읽었음
일상이 좋죠 잘봤습니다
담담한 일상 이야기였군요.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난하지만 몽환적이네요. 갠적으로 비를 좋아합니다.
수수하지만 평온한 일상이네요. 길이와 그리고 딱꽂힌다고해야하나 그런부분이 부족한 점도 있지만 일상물이니 크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잘봤습니다.
ㅠㅠㅠㅠ 좀 만 더 길게 써주시지 ㅠㅠ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차분한 분위기, 비라는 소재와 언어의 정원 OST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더 길었다면 루즈해지지 않았을까 싶기에 이 분량이 딱 좋다고 생각 되네요. 단점은 이걸 단행본에서 만났을 경우 OST가 없다면 심심한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걸까요? 읽는 내내 너무 언어의 정원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래도 정말 만족하며 읽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간결한 묘사가 일품입니다만, 마치 카메라가 옆에서 두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관조하고 있는 듯한 이 분위기가 장점이면서도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최소한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아무튼, 좋은 글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길지는 않지만 잔잔하고 그 짧은 내용에 미츠하의 심정을 잘 담아낸 것 같다. 글에 조미료를 너무 덜 쳐서 심심하게 느껴지는 감은 있네
글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언어의 정원 오마쥬, 일상물 특유의 잔잔함, 외부 시점이지만 미츠하의 내면을 일관되게 묘사하는 서술 형식 등이 맞물려 잔잔하면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분위기의 글이 된 것 같아요. 글의 마무리가 조금 아쉽지만, 더 나은 방법을 찾으라 하면 저도 못 찾을테니 괜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번 팬픽콘에서 드디어 고슴도치가 언듭됐습니다 ㅋㅋㅋ '그것도 너를 알아가는 증거겠지' 소소하고 사소한것 하나 하나를 알아간다는거 자체가 행복함의 반증이라고 느껴졌어요 언어의 정원을 보진 않았지만 배경 묘사와 서술에서 나름의 운치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둘의 서로에게 얼마나 빠져있는지도 와닿았구요 다만 언정을 안본 사람도 그 분위기를 완전히 느낄수 있을까 하는 찝찝함이 있습니다(이건 제가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모르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라 그럴수도 있습니다 ㅡㅡ) 그리고 극후반부에 너무 급하게 끝맺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