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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투쟁이다.



공동으로 인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 특성상,


그리고 인류 최후의 도시라는 배경 특성상, 젠존제 세계에서 살아감이란 곧 끊임없는 투쟁과 동음이의어가 되었음.


이 투쟁이란 물론 공동에서 에테리얼과 싸울 수 있는 물리적 무력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 재해임을 알고도 공동에 들어가고, 공동 옆에서 살아가야하는 일상의 매 순간순간이 곧 투쟁일 것임.


그 때문에 비단 레이더나 조사원들 뿐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뉴에리두의 모든 주민들 또한 매 순간 투쟁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음.







"살아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잔인하지."

"종족이 멸망할 때까지 우리에겐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어."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귤복복, 너도 그 이치를 깨닫게 될거다."

"다른 사람의 피와 살을 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피와 살을 취하려는 공동에 저항하는 이유는 뭐지?"







"동족의 목숨을 대가로 동족을 살리는 것, 과연 그게 옳을까?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어."

"하지만 [만약은 없어]. 난 그저 지금 이 순간,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밖에 몰라."






이번 귤복복 비화의 빌런인 창황(가짜)이 일을 벌린 것도, 결국 삶이란 투쟁 속 그가 선택한 결과였음.


삶 속에서 우리(동족)에게 계속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재해에 맞서


나를 지키기 위해, 또 내게 소중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선 동족을 잡아먹는 [악]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가짜 창황의 투쟁의 방식이었음.



하지만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은 귤복복에게 있어선 옳지 못한 것이었고,


생사를 오고가는 극한의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옳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나가는 것이 귤복복의 투쟁의 방식이었음.



그런데 창황은 틀린 것이고 귤복복은 옳은 것일까? 글쎄,


귤복복이 스스로 말했듯이 그것은 알 수 없음.


어쩌면 귤복복의 신념처럼 지킬거 다 지키며 살다가 결국 뉴에리두마저 멸망하는 끝에서,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걸 다 해야했다는 가짜 창황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귤복복 또한 자신의 삶을 위해 전력투구하며 투쟁해왔고, 앞으로도 투쟁해갈거란 점임.







마지막에 가짜 창황은 귤복복이 운좋게 행복한 환경에 둘러싸여 진짜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삶)을 위한 투쟁을 못해봤다며 질타함.


하지만 귤복복의 대답처럼, 귤복복이 행복하게 '살아온' 것은


귤복복이 스스로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투쟁을 이어온 끝에 쟁취했음을 말함.


어쩌면 가짜 창황이 버려온 [옳음]을 지키기 위해 더한 투쟁을 해왔을지도 모르지.







사실 이러한 구도는 비단 귤복복 비화에서만 나온 것은 아님.


하루마사 비화에서 나온 주제의식과 연결지어서도 볼 수 있는데,


거기서도 삶이란 투쟁이라는 주제의식에 맞춰, 싸우기 위한 기술인 궁술을 '삶'에 결부시켜 은유했음.








"궁술의 정수는 활시위를 당기는 그 순간에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삶이란 나의 생(生)이라는 화살을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쏘아내는 것임을 말하며,


다시말해 활시위를 당기는 그 순간 내가 어떤 목표를 바라봤느냐, 어떤 의지와 각오를 담고 당겼느냐에 삶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것을 말했음.

(자세한건 예전에 쓴 하루마사 비화 감상글 참조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zenless_zone_zero&no=653120)




삶이란 곧 투쟁이고, 삶의 정수는 투쟁의 목표와 방식에 있다는 것임.


가짜 창황의 화살도, 귤복복의 화살도 모두 삶이라는 투쟁이며, 다른 것은 바라본 목표와 각오인거지.


둘 중에 누가 옳았는지는 알 수 없음. 결국 과녁에 닿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까.





한가지 아직 잘 모르겠는 부분은 하루마사의 스승이 긍정한 것이 단지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는 것'까지인지,


아니면 '올바른 방향을 보고 화살을 쏘는 것'까지인 것인지에 대한 부분임.


왜냐하면 사실 하루마사의 스승은 원래 가짜 창황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지녔기 때문임.






원래 하루마사의 스승도 가짜 창황처럼, 그리고 칭송회의 사상처럼 생존과 존속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한다는 주의였음.


사실 그래서 납치당하거나 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칭송회 아래에서 연구를 수행한거고.










하지만 하루마사를 보살피며, 생존을 위해서라면 정말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지켜야하는 선이 있음을, 나아가 그것이 온전히 나의 삶을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함임을 깨닫게 됨.






따라서 귤복복 비화에서는 아직 가짜 창황의 투쟁이 옳은 것인지, 귤복복의 투쟁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은 했으나


젠존제는 내심 플레이어들한테 무엇이 옳은 것인지 말하고 있음.


사실 뉴에리두를 통해 처음부터 아주 꾸준히 보여주고 있어.


비록 바로 내일 공동이 커져서 내 삶의 터전을 집어삼킬 수 있는 위협이 늘 함께하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서 절망으로 물든채, 그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갈취하고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즐겁게 웃음 속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웃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그러니 생존을 위해 타인을 무한정 희생시키고, 도시를 절망으로 물들이려는 칭송회가 빌런인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