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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끼들 DNA오염되서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는 못하고 남들 시다바리로 평생 살다가 뒤지니깐


해운대 높은 건물에 자아의탁해서 현실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서 그럼



[선조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18일 1601년]


강첨이 아뢰기를,"신이 일찍이 이원익을 따라 영남에 갔을 때 항왜 60여 명이 밀양 땅에 모여 한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양민을 침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속히 처리해야 하니, 만약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어 다시 일본에 투항하면 어찌 걱정거리가 안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북쪽 열읍에 나누어 두면 일본과 서로 떨어지게 되고 오랑캐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무단히 옮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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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61권, 선조 28년 3월 1일 1595년]


도원수 권율의 장계 "...왜적을 위하여 농사를 지어 조세를 바치고 그들의 노역에 이바지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세월이 갈수록 거의 그들과 동화하여 서로간의 관계를 잊고 있습니다.

전해 들으니, 동래·부산·김해 등지에는 밭가는 자들이 들녘에 가득한데 3분의 2가 모두 우리 나라 백성들이며 그들 중에는 이따금 머리를 깎고 이를 물들이는 등 그들의 풍속을 따른 자들도 있다고 하고..."




선조실록 38권, 선조 26년 5월 21일 1593년]


... 김해에는 촌민들이 모두 왜적에게 부역하여 영남의 크고 작은 도로에 모두 향도가 되어 있고, 향리(鄕吏)인 김변호(金變虎)와 서자(書者)인 배인(裵仁) 등은 왜적의 장수가 되어 매번 분탕질할 때마다 반드시 앞잡이가 되니, 적중에 머물고 있는 백성들은 이들의 소행을 보고는 모두 왜복(倭服)을 입고, 다시 도망쳐 나오려는 뜻이 없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기록









1.임진왜란 전에도 밀양은 이미 오랑케들이랑 부락형성해서 같이 살고 있었음
2.임진왜란 끝난후에 항왜들을 밀양에 거주해서 살게함(한국 호적대장에 올리게 살게해줌)
실록찾아보면 저거보다 더한거 많음
임진왜란때 오랑케들과 함께 조선군 공격한것도 있고



[난중잡록 1권 임진년 상]


왜적이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하여 마침내 영남 한 도를 왜적의

굴혈로 만들었고...왜적이 오기도 전에 군사와 백성이 앞장서서 달아나

산림 속에 잠복하고는 구차스럽게 살아남을 계획이나 함으로써...



[난중잡록 1권 임진년 상]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와 군민들에게 유시하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난중잡록 1권 임진년 상]


김해 동래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동래의 항왜

이괄의 난 당시 

동래 왜인들을 1천명 정도 고용하여 막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왜인을 왜인으로 막는다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라며[14]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 

임진왜란 끝나고 동래에 항왜만 1천명 이상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