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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을수록 마음은 더욱 또렷해진다.
등잔불 아래서 붓을 들고 있어도,
먹보다 먼저 번지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이다.

승훈낭자.
입에 담으면 너무 분명해져서,
차라리 삼키는 이름.

처음 그를—아니, 그 낭자를 보았을 때
나는 이유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그 존재 자체가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훈낭자는 늘 먼저 말을 건넸다.
내가 물러서면 한 걸음 다가왔고,
침묵하면 그 옆을 지켰다.

“그대는 늘 생각이 깊군요.”

그 한마디에
나는 며칠을 앓았다.
내 안을 들여다본 사람이
그 낭자뿐이었기에.

우리는 자주 달을 보았다.
말없이 나란히 앉아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마음을 숨긴 채.

그의—아니, 낭자의 소매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흔들렸다.
닿고 싶었으나
조선의 밤은 너무 조용했고,
규범은 너무 무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승훈낭자가 먼저 내 손목을 잡았다.

꽉 잡지 않았다.
도망칠 수 있을 만큼만.
그 배려가 오히려 잔인했다.

“놓으라 하시면, 놓겠습니다.”

나는 놓으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낭자의 손을 더 깊이 붙잡았다.

그 순간 알았다.
이 마음은 이미 죄가 되었고,
그러나 벌을 받아도 좋을 만큼
달콤하다는 것을.

승훈낭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숨결이 섞였고,
밤은 더 깊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을 이전처럼 볼 수 없었다.
글을 읽어도 그 낭자의 음성이 들렸고,
술을 마셔도 그 온기가 남았다.

혹여 이 마음이 드러난다면
유배든, 파문이든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낭자의 이름을 잃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잃는 편이 나았다.

나는 오늘도 붓을 내려놓고
등잔불을 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를—그 낭자를 부른다.

승훈낭자.

이름 하나로
밤이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