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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턴가 놈들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뚜껑을 완전히 뜯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익히는 컵라면이다. 처음에 나는 뚜껑을 완전히 뜯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얼타고는 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든 낯선 존재. 전자렌지 컵라면의 습격.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그저 내열성 용기 포장 기술의 발달로 인해 등장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괜시리 심술이 드는 것은 왜일까.


대부분 이렇게 쓰여 있다. 전자레인지 없이 하는 평범한 조리법1 / 전자레인지로 만드는 조리법 2. 그리고 두 번째 조리법 뒤에는 항상 (이 편이 더 맛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따른다. 조리 시간도 훨 빠르지, 편의점에서는 내 전기도 아니지, 대충 정한 것 같은 450ml마저 식품공학 박사들의 땀 어쩌고 하며 존중하는 판에, 거리낄 것 없이 2찍을 하리라. 엄청난 불평등이다. 문제는 전자레인지를 못 쓰는 상황에서는, 더 별로인 대안을 골랐다는 좌절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거다. 나는 그런 경험을 몇 번 겪었는데 대부분 방구석에서 귀찮아서 물만 붓고 대충 먹으면서였다. 전자렌지로 돌렸다면 더 맛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나의 소중한 야식 경험을 망쳐 놓는다.


그런데 내가 둔감해서 그런가 렌지로 돌린다고 그리 맛있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허나 라면은 두 개 끓여먹으면 젊음이지만 젊은이들도 컵라면은 두 개 먹는 경우가 잘 없다. '하나로 끝' 이라는 컵라면의 이데올로기는 봉지 라면에 없는 것일까? 흠, 어쩌면 비빔면은 1.5개가 정량이라는 그런 소리도 라면 회사의 마케팅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든다. 여하튼 그래서 전자렌지 버전과 바닐라 버전을 비교해보기도 쉽지 않고. 바닐라 하니 엊그제 바닐라가 'default'로 사용되는 어원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는데, 영국인지 미국인지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항상 기본 맛이었고 더 쌌었기에 그랬으리라는 증언들이 많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항상 '진짜 바닐라는 달라' 라는 말도 궁금했는데 아직까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이 샜다. 라면도 다 먹어가고 있다. 짧은 심술이었다. 하잘것없는 심술인데 또 요새 나오는 이벤트성 신상 컵라면들은 아예 전자렌지 버전만 있고 다른 건 없는 경우도 있더라. (e.g. 찬또배기 감자탕라면, cf. 존나 맛없음) 그러면 또 극도의 심술이 올라온다. 이 싸가지 없는 놈,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같은 종류의. 


세븐일레븐서 파는 도쿠시마 라면 이거 나쁘진 않은데 막 좋지도 않다. 쇼유 계열 라멘을 먹다보면 느끼는 거지만 대해같은 짠 맛 아래에서 감칠맛이라는 환상을 쫓아다니는 느낌이 든다. '간장이란 놈은 발효 음식이니까 분명 감칠맛 굉장하겠지' 라는 선입견이 그저 나트륨이라는 밋밋한 무체급의 강자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닐지. 이거 미묘하게 짜파게티 향이 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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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미지근한 평은 제조사가 근본있는 일본 회사라면 얼마든지 뜨겁게 변할 수 있었기에 용기의 EASTAR라는 생소한 브랜드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웬걸 라면 회사도 아니고 항공사였다. 일본이야 지역 홍보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지만서도 아무튼 거의 하림에서 만든 가짜 일본 라면이구나 날 속였구나.


그런데 지역 홍보를 위해서 QR 코드가 있다길래 한번 볼까 싶어 용기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 싶어 진즉 뜯어서 버려둔 뚜껑을 들춰 보자, 역시나 여기에 있었다. 아니 뚜껑에 QR을 붙여 두면... 같은 생각을 하다가, 번뜩. 이것이야말로 전자렌지 조리의 단점이겠구나 싶었다. 컵라면은 뚜껑을 닫고, 젓가락을 올려놓고, 3-4분간 뚜껑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음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맛있게 먹겠다고) 무자비하게 뚜껑을 뜯어내 버렸으니, 본 목적인 도쿠시마 홍보조차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하하. 그래. 내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