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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Ladyjinsan

라떼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그치기 힘든 듯. 생각난 김에 적어보는 그 시절 뫼 작업실 이야기. 난 원래 그때 하이텔 무림동 공모전으로 이재일씨와 같이 당선되어 뫼 출판사로부터 전업작가될 생각 없냐는 제안을 받고 그 작업실에 들어갔는데... 원래 다른 직업이 있었다. 대학에서 전공한 나름 필생의 숙원직업이었고 그래도 전도 유망한 편이었는데... 작업실에 드나들며 그때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고 익숙해지다가 하루아침에 원래의 직업을 정리하고 이쪽으로 갈아탔다. 왜 그랬냐면.. 굉장히 사소한 이유같지만 지금은 오히려 시사하는 점이 많은 장점 때문이었다.


1. 당시 뫼 작업실은 집필실 + 숙소를 겸해 여러층의 침대가 있었다. 


2. 집필실 실장이 용대운 - 그 밑의 부반장 같은 역할이 당시 유일하게 데뷔작을 낸 좌백이었다. 이 두 사람이 신인들의 작품을 보고 '감수'를 해주는 (요새는 그걸 멘토링, 닥터링이라고 하는데) 시스템이었고 저 감수를 통과해야 편집부로 원고가 넘어가 책을 낼 수 있었다.


3. 나와 이재일씨가 들어갔을 때 이미 집필실에는 저 두 사람 외 다수의 지망생들이 버글거리고 있었고 죄다 남자였다. 한국사회 남자그룹이면 당연히 나이순으로 서열 정리된다. 


저런 구조면 딱 생각나는 몇가지 위험이 있지 않은가?


난 당시 3잡을 뛰던 중이라 출근 후 퇴근해서 대학로에서 돈 안되는 연극 제작 하다가 밤중에 집필실 가서 밤새도록 글쓰고 새벽에 차 몰고 회사에 나가는 하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저 중에 생계를 위해 한 '직업'은 하나 뿐이라는게 공포 포인트) 가끔 집필실 침대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알면, 20대의 신인 여성작가가 저런 남초 팀 안에서 겪을 수 있는 위험들이 몇 가지 딱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뫼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물론 내 (지랄 맞은 성격) 덕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응?) 그래도 보통 피해자의 특성과 상관없이 벌어지는게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그런데


뫼 작업실에서는 없었다. 있었으면 내 손에 다 죽었다. 

실장인 용대운님은 (사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들 사이에 용대운씨의 칭호는 실장님이다) 나와 이재일씨의 초고를 보고는 '당신들은 내가 감수할 레벨이 아니니 알아서 쓰세요' 라고 했다. 권위에 의한 괴롭힘 없었다. 

남탕 득실하고 사회성도 떨어져 보이며 문학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 당시의 동료들은  내가 본 어떤 예술가 그룹보다 진지하게 자기가 쓸 글에 대해 고민했다. 밥 먹고 술 먹고 눈뜨면 글 이야기 밖에 안했다. 그 고민의 수준이나 내용에 동의하느냐와는 별개다. 그게 그들의 진심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출판사에서, 실장님이 제공해주는 자원으로 글을 쓰며 일정 기간 안에 성과를 내야만 계속 작가로 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떠나서 새 직업을 찾아야 했다. 그러기 싫어서, 무협쓰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의 내가 실제로 처음 접한,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로 '글'을 노동으로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먼저 들어온 이들이 있으니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같은게 있을 법도 한데, 특히 나와 이재일은 그들과 달리 공모전 수상자로 들어온 좀 이질적인 사람들이라 (실장님한테 감수도 면제받은) 더 그럴법도 한데, 남 괴롭힐 재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자기코가 석자라.


성적 괴롭힘도, 따돌림도, 권위에 의한 압박도 없는 '그룹' 집필실이라니. 그때는 '아 이 사람들은 참 진솔하고 열심이구나. 이런 분위기라면 여기서 계속 일해도 되겠다' 라는 정도의 느낌으로 선택한 거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니 뭐 그런 이상향이 있냐 지금 다시 해보래도 안되겠네' 싶다.


사실 나 자신은 그때 뫼 집필실의 누구보다도, 혹은 독자 누구나 연구자, 어쩌면 현재 무협을 쓰거나 읽는 사람보다도 '무협'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라는 건.. 글쎄 좀 데면데면하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 하지만 그 시절 뫼의 집필실에 대한 좋은 인상과 추억이 나에게 '무협'이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의리의 기반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특성이 그냥 '사람이 좋아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소년은 늙어 백발이 되듯이 그것도 다 언젠가는 변한다. 인생의 봄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지만 그래도 봄을 그리는 마음만은 남는다. 크 라떼 절정이다. 이만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