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을 깔끔하게 정리하기가 조금 번거로워서, 그냥 번호 붙여서 생각 나열하는 방식으로 씀ㅇㅇ


(스포일러 있음)


1. 에바가 엘리스 섬에 도착하면서 시작하고 엘리스 섬을 떠나면서 끝나는 이 영화는, 사실상 에바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영화이다. 일례로 에바의 등뒤에서 어깨 너머로 브루노와 담당 공무원의 부정을 바라보는 씬을 들 수 있다. 카메라는 에바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땐 에바의 뒷모습 쪽에 초점을 맞추어 두 남자의 모습을 흐릿하게 잡더니, 에바가 눈물을 닦아낸 뒤 이어지는 숏에선 다시 깨끗해진 시선처럼 두 남자에게 다시 포커스를 맞추어 공무원이 돈을 주머니에 쑤셔넣는 모습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녀의 시선을 따르는 이 영화는, 다른 매춘부들이 가슴을 까 보이는 것은 여과없이 보여주나 에바 자신이 가슴을 까 보여야 하는 순간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에바가 첫 매춘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그녀가 눈을 감는 때에 맞추어 암전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처럼 에바의 시선을 담지하고 있는 이 영화는, 다시 말해 갓 미국 땅을 밟은 이민자의 시선에서 미국을 바라보는(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절대 미국 밖으로 벗어나질 않는다. 심지어 작품 내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배 위에서 에바가 겪은 불미스런 사건도 플래시백 등의 장치를 동원하는 대신 에바의 입으로 직접 언급하게 한다.) 영화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되는 영화의 내용은, 이민자들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건국한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 위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서로를 착취하고 이용하는 모습들의 연속이다.


2. 에바에게 접근하는 두 남자, 브루노와 에밀(올랜도)는 서로 사촌 관계임에도 브루노가 에밀을 살해하는 파국에 이르고 만다. 영화 내에서 브루노와 에밀이 처음 대면하는 시퀀스에서 브루노가 계단을 내려올 때 카메라는 굳이 '샴쌍둥이' 포스터는 한 켠에 크게 보여준다. 샴쌍둥이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상징이다. 몸이 붙어 태어난 샴쌍둥이는, 어느 한 쪽이 자기 개인으로서 온전한 신체를 획득하려면 아무래도 나머지 반쪽과 육체적으로 절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 작품 속 이민자들이 겪어야 하는 과정은 결국 모두 '샴쌍둥이의 절연'의 과정과 닮아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과거를, 혈연을 제거해 내고 그 빈자리에 '미국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체성이 새살처럼 돋아나길 기다린다. 에바와 같이 폴란드어를 쓰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 에바의 몫을 빼앗고자 했던 또 다른 매춘부도, 에바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자신의 미국에서의 평판을 해칠까 두려워한 이모부도 결국엔 그 과정 중에 있는 셈이다. 브루노와 에밀 역시 같은 고향을 떠나왔으며 혈연으로 맺어진 이민자들이지만, 에밀은 자신의 이름을 올랜도로 바꾸었고, 브루노는 자신의 혈연인 에밀을 찔러 죽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기존 정체성과 절연해야 했다. 


3. 브루노와 에밀의 갈등의 중심에 에바가 놓여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미국은 종교 분쟁을 떠나온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이다. 그런데 에바의 이름은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성경 속 첫 번째 여자의 이름과 같다. 따라서 두 이민자 남성 브루노와 에밀이 에바를 사이에 두고 각자 누가 차지할지를 겨루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미국의 뿌리(만약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에 가까워지기 위한 무의식적 몸부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브루노는 바로 그 연장선 상에서, 에바를 굳이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자유의 여신상으로 분장시킨다.). 그러나 영화는 에바가 카톨릭임을 굳이 몇 번에 걸쳐 보여준다. 따라서 에바를 통해 미국인의 정체성을 공고히 획득해 보이려는 두 이민자 남성의 몸부림은 상징적 영역에서조차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4. 브루노와 에밀은 모두 퍼포먼스를 하는 연기자들이다. 본질적인 면에서 둘의 퍼포먼스는 그리 다르지 않다. 브루노는 백인 남성들 앞에서 이주 여성들을 세계 각국의 스테레오타입에 맞추어 분장시키며 그 여성들이 모두 미국 백인 남성들을 위한 성적 판타지의 대상임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 작업을 용인하게 하기 위해, 브루노는 굳이 백인 이주 여성들까지도 분장을 시켜 이집트 여성, 일본 여성이라며 소개하곤 한다. 브루노는 그 공연장을 떠난 뒤엔, '노숙자 남성들' 앞에서 여성들을 '재벌가의 딸들'이라는 설정 하에 매춘을 유도한다. 세계 각지의 순종적 여성들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백인 남성의 판타지, 부잣집 딸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노숙자 남성의 판타지, 이렇게 브루노는 아메리칸 드림, 그 판타지를 꿈꾸며 찾아왔으나 고꾸라지고 만 이주 여성들을 이용해 또 다른 이들의 판타지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매춘 퍼포먼스를 하는 셈이다. 한 편, 그의 사촌인 에밀은 여러 모로 브루노보다 건전해 보인다. 그는 곧 추방당할 이주자들 앞에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라'며 공중부양 마술을 선보인다. 결국 그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떠나왔으나 곧 좌절하고 말 이들 앞에서 자신의 눈속임을 아메리칸 드림과 동치시키며 희망을 떠들어대는 위선자일 뿐이다. 이 둘의 퍼포먼스는 모두 아메리칸 드림이 실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또 다시 판타지를 이야기하는 역설적이고도 위선적인 퍼포먼스이다. 브루노와 에밀 그 자신들조차도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의 증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5. 극중에서 브루노와 에밀의 고용주인 이민자 출신 여성 로지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이제 영화와 겨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브루노, 에밀의 퍼포먼스와 동일시되는 순간이다. 전세계의 수많은 영화인들이 몰려들어 '미국 영화'를 찍어내고 있는, 그리고 그 엄청난 자본의 스케일로 세계 영화 시장을 잠식해 가며 현재까지도 아메리칸 드림을 재생산하고 있는 꿈의 공장 할리웃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연출 방식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여러 모로 할리웃의 옛 대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가, 그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해 정반대로 할리웃이 그 신화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 바로 시점으로 돌아가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이면을 뒤집어 까 보였다는 점에서도 나름 의미가 있다.


6. 극중에서 에바는 전쟁이 한창인 유럽을 피해 자유의 여신상이 반기는 엘리스 섬에 상륙함으로써 처음 미국에 발을 딛는다. 그러나 'Lady Liberty'라는 별명을 가지고 전혀 자유롭지 않은 매춘부 생활을 해야 했던 에바의 모습처럼, 영화는 내내 그 광활한 미국 땅에서도 유독 좁은 방, 어두컴컴한 지하, 철창 등 끝없는 속박 하에 카메라와 관객을 가두는 미장센을 택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울이 벗겨진 자리, 미국의 진짜 모습은 바로 그런 공간과 닮아 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7. 영화가 보여주는 미국은 자유가 없는 곳에서 자유를, 꿈이 좌절된 자리에서 꿈을 말하는 역설의 공간이다. 샴쌍둥이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고자 날때부터 붙어있던 살을 베어내야 하는 것처럼 이민자들은 '미국인'이라는 허위의 정체성을 획득하고자 자신의 피와, 과거와 절연해야 한다. 그러나 그 한복판에서 에바는 일견 자신을 착취한 남자를 용서하고, 끝까지 자신의 동생을 구해내고자 하는 성녀처럼 보인다. 에바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씬(이때 배위에서의 일도 처음 언급된다.)과 브루노가 에바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씬을 연관지어 보면, 영화가 에바에게 그런 껍데기를 의도적으로 덧씌우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마지막 숏에서 거울 이미지를 통해 에바와 브루노의 뒷모습을 함께 비춰줄 때, 영화는 조금 다른 결론을 제시하는 듯하다. 맨 처음 말했던 바와 같이, 영화는 에바의 시선에 어느 정도 종속되어 있다. 마지막 숏이야말로 점점 카메라로부터 멀어져 가는 에바를 바라보며 카메라가 에바에 대해 가장 객관적일 수 있는 순간일지 모른다. 


8. 사실 영화는 에바도 '샴쌍둥이의 절연 과정'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바 있다. 그녀는 이모부의 신고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동질감을 표하는 같은 폴란드인을 외면한 채 얼굴에 생기게 돌게 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술에 바르고 자신의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다른 매춘부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자신의 몫을 가져가겠다는 같은 폴란드 출신 매춘부에게 칼을 들이미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녀도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미국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언제든 자신의 몸에 피를 내고 자신의 과거와 절연해야 하는 한 명의 이민자에 불과한 셈이다. 그녀는 마지막 숏에서 동생과 재회하고 그녀와 동행하지만, 어차피 동생은 폐병에 걸려 있기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상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에바는 현재 살인의 누명까지 썼으므로 캘리포니아로 가는 여정이 순탄할 리도 없고, 건강이 온전치 않은 동생 덕에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오히려 그녀와 브루노의 뒷모습이 겹쳐질 때, 우리는 브루노도 한때 에밀과 함께 에바, 마그다의 모습처럼 엘리스 섬을 떠난 적이 있지 않을까 떠올리게 된다. 끝끝내 실패해 홀로 남은 채 엘리스 섬으로 돌아와 허망하게 그곳에 남는 브루노의 모습처럼, 어쩌면 그녀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9. 하지만, 좌절을 알아도 굳이 엘리스 섬으로 돌아와 죽을 것이 뻔한 마그다를 굳이 끄집어 낸 에바는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그곳으로 다시 향해 간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이 영화는 곳곳에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카비리아의 밤>을 떠올리게 한다. 올랜도가 에바를 무대 위로 불러내 마술에 써 먹으려 하는 장면은 보자마자 카비리아가 마술사의 무대 위에 올라가 최면 대상이 된 장면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 영화에서 매춘부 카비리아는 자신에게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남자들에게 수없이 배신당하지만 그 끝에서 다시 한 번 눈물 맺힌 눈으로 웃어 보인다. 이 영화 속 에바의 마지막 뒷모습에서도 나는 카비리아의 마지막 모습에서처럼, 깊은 좌절감, 그러나 그 아래서 여전히 빛나는 꿋꿋한 생의 의지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아니다. 꿈이 모두 스러져 버린 폐허 위에서 그냥 버텨 가며 사는 것일뿐. 오히려 이를 희망으로 읽는 순간 그 뒷모습은 더더욱 허망해 보일 것이다.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은 뒷모습일 것이므로.


10. 미국이란 국가도 어떤 위대한 실체가 기저에 버티고 선 국가가 아닌, 허황된 꿈을 쫓아 왔으나 좌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살아낸 이민자들, 그 인간 군상들의 생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집합체에 불과할지 모른다. 적어도 이 영화는 그렇게 믿고 있다. 위대한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와 그곳을 뒤덮은 실체없는 꿈들의 장막이 아니라, 그 허울 아래서 어떻게든 무거운 생의 무게를 버텨낸 사람들의 면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