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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다른 누구들처럼 말론 브란도를 처음 본 건 대부에서였다. 느짓하게 휘적이는 몸짓과 말투, 위압적이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내게 그를 대부님, 돈 꼴리오네로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난 그렇게 그를 연모하기 시작했고 워터프론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같은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이 잡듯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데이트 1악장.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며 남자는 패여가는 주름만큼 멋있어진다는 말을 이해했다. 그가 기차소리에 묻히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첫 장면은 큼지막한 파편이 되어 내 가슴 왼쪽 어디쯤에 박혀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혹은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우리는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싶어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기대에 엇나가는 면을 발견하며 사소한 말다툼이 생겨나고, 전에 나누던 사랑은 잦은 다툼에 눌려 땅속으로 푹푹 꺼진다. 우리의 첫 다툼은 베트남 어느 정글에서였다. 일에 치이느라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얼굴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코폴라가 깔아둔 무지막지한 장애물을 뚫고 갔더니, 맙소사. 얼굴에 하얀 분을 칠한 상태의, 스스로를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간만에 만난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이 큰 실망감을 안은 나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퉁명스러울 뿐이었고, 그렇게 흐지부지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참 멋진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가만히 누워 지나간 추억들을 생각해보니 괜히 또 마음이 싱숭했다. 그러고보면, 베트남 정글에서의 그의 행동들도 꽤 그다운 모습이었다고 느껴졌다. 내 이기적인 기대치에 근거한 잠깐의 실망으로 그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 한 번 더 만나봐야지. 그렇게 다시 그를 만나러 갔다.

순전히 말론 브란도를 보기 위해 튼 쌈마이영화 [닥터모로의 DNA], 그리고 [스코어]. 전자에는 지옥의 묵시록에서 나를 실망시켰던 그 모습 그대로의 하얀 분칠 브란도가 있었다. 후자에서는 그저 더 돼지뚱뚱이가 된, 초고도비만인, 흔한 고령배우가 되러버린 초라한 브란도가 있었다. 그의 유작인 스코어에서,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말론 브란도는 그렇게 죽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을 여럿 만나며 말론 브란도에 대한 내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하져갔다. 그러다가 봤다. 아가씨와 건달들.

저게 누구더라. 우리가 서로 어긋나기 전, 너무 좋았던 그의 모습이 보였다. 헐뜯고 밀어내느라 다시 볼 수 없던 좋았던 시절의 말론 브란도였다. 지방에 묻혀서 보이지 않던 저 해맑은 표정. 까맣게 잊고있던 쇠같은 목소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윗옷 훌훌 벗고 테이블 꽝꽝 내려치던 그 모습보다도 멋있었다. 표정에서 이따금 지나가는, 곧 다가올 중년 시절의 모습이 비칠 때면 심장이 쿵 내려앉고 이내 곧 다시 청년의 그로 돌아가면 미세하게 두근대는 감정이 피어났다.

사랑하던 연인과 영 좋지 않게 헤어진 후, 세월이 많이 흘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진첩을 들춰보며 "그래,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추억하는 듯한 느낌. 우리 할아버지보다도 나이 많은 저 멀리 양놈대륙의 한 배우 말론 브란도를 보며 나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