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도 묘지명에 스스로 요동 삼한인이라고 하였고 당에서도 고구려의 장군들에게 마한 추장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삼국이 정립된 이후에는 서로간에 동질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0] 4세기경까지 고구려본기는 신집5권의 내용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51] 관련 내용은 윤종일의 「김부식의 역사인식 연구」라는 논문을 참고[52] 오늘날로 치면 조선 초~중반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던 셈이다.[53] 거란 2차 침입때 현종은 몸만 급히 피신해야했고, 개경은 궁궐을 비롯하여 대부분 불에 타거나 약탈 당했다. 현종 입장에선 몸만 피하기도 바쁜 와중에 신라 역사서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신라 뿐 아니라 고려 초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로 굉장히 부실한데 당장 선조들의 실록조차 불에 타서 7대실록을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고려 초기 역사가 훨씬 전대의 7세기 삼국시대보다도 부실한 결정적인 이유다.[54] 한나라가 400년을 이어왔지만 중간에 신나라로 인해 교체된 전한과 후한을 따로 보면 각각 200년 정도다.[55] 그 때문에 편찬 시기가 빨라 백제의 기록이 좀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가 비록 일본발 구라가 잔뜩 섞여 있지만 어쨌든 실제 역사에 과장을 덧입힌 내용이기 때문에, 포상팔국의 난 등 한국 사료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어떻게든 과장 속의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숙지할 고대 사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56] 사실상 전설 그 자체인 인물처럼 여겨졌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57] 군자는 괴상한 것(무속신앙, 전설등)을 기입하지 않으며, 없는 사실을 지어서 작성하지 않는다.[58] 물론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에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는 법 없냐!"라며 쓰긴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대체로 술이부작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59] 그런데 2019년에 중국에서 비교적 최근에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당이 백제 정벌군 편성 직전인 659년부터 이미 소정방에게 당나라 내부에서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수여했음이 밝혀지면서 당나라는 이 때부터 백제와 함께 신라까지 기습할 준비를 해왔음을 증명하는 당대의 자료가 나타났다. 기존 문헌 중에는 오직 김유신 열전과 삼국유사에만 존재하던 당의 은밀한 신라 침공 계획과 김유신의 간파, 대비 기사와도 일맥상통함이 밝혀졌다.(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열전의 이 부분은 후손들이 김유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나당전쟁을 예언한 것처럼 첨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던 대표적인 부분이었고,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김유신의 소정방 신라침공 야욕 간파 기록은 굉장히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이고 일연 본인조차 일단 쓰고도 바로 밑에 주석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기록임을 보충설명해두었을 정도라서 학계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김유신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을 설명하는 이 발견을 통해서 물론 삼국유사 기록처럼 김유신이 소정방을 암살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실제로 어떤 모종의 대립이 있었는데 설화적으로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발견은 근래 김유신 열전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유행이 일던 추세와 반대로, 김유신 열전의 정확성이 검증된 사례가 되었다.[60] 《삼국사기》와 더불어 양대 사서인 《삼국유사》는 지나치게 불교 중심적이어서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래저래 연개소문이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61]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들을 뜻한다.[62] 김부식은 이에 대해 "또 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적어도 설총이 글을 쓴 비문이 당시에는 더러 남아 있었으나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였고 시간이 지나며 이들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63] 그나마 이들 대부분은 생존 시기와 대략적인 행적은 알려져 있고 작품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원걸은 이 구절을 제외하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64] 특히 열전 쪽은 정사 삼국지가 압도한다.[65] 《삼국사기》가 12세기 기록인데 반해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3세기의 인물. 거의 천 년이 앞선다. 게다가 삼국지는 위진 시대에 한국과 교류한 중국 국가들의 분명한 당대 기록이다.[66] 여기서 영산강 유역에 5세기까지 어느 정도 자치력이 있는 정치 세력이 존립하고 있다는 고고학적 사실이 거론되는데, 그 정도 자치력이 있는 마한 소국들은 충청도에는 4세기까지도 존속했고 심지어 경기도에도 3세기까지는 자치력을 보유한 소국들이 있었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372년 근초고왕의 정복 이후 적어도 독자적 국호나 칭호조차 주장하지 못하고 백제의 산하로 들어갔기에 이는 거꾸로《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연대적, 기사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증거일 뿐 배치되는 사례는 아니다.[67]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에서 나온 책이다.) 고려인들은 고려는 주몽이 세우고 내려오다 중간에 왕씨로 바뀌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 몽골 침략 후 쿠빌라이 칸마저 당태종도 제압하지 못했던 그 고구려가 자기한테 친히 항복했다고 기뻐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68] 이는 현대가 되어 고대 사료를 싹싹 긁어모은 현재에도 큰 차이가 없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것이 신라의 민정문서이지만 이 또한 1930년대 일본의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그릇 보존을 위해 끼워넣은 종이를 복원한 것이며, 그 이외에는 말 그대로 '제도'를 기술한 것이 아닌 단편적인 사료를 긁어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가령 우리는 신라의 정전제(721)가 국가가 농민의 토지 소유를 인정한 것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우지만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는 사료는 전혀 없으며, 대체로 민정문서의 '연수유답'을 그것이라고 보지만 이 또한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 온전히 합의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없다.[69] 지금이야 듣보잡 전쟁이지만 당시 전한에서는 나라의 반이 연관된 엄청난 전쟁이었고 이후에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70]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책이 역사책인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이 외에도 백제삼서가 있었으나 실전되어 일본서기에 일부 인용된 내용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