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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가 스스로의 내면에 거주하는 신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와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것은 단언컨대 스스로를 몸 형상과 동일시하면서 시작된다. 미혹이 발생하는 지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객관과 주관이라는 환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통로를 여는 단서다. 나라는 존재가 몸 형상을 가지고서 세상 속에서 존재한다는 착각이 신의 자녀를 한낱 중생으로 전락시킨다. 생각이 가진 힘은 세계를 단순 간에 나타나고 사라지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라서 언제나 신중해야 하지만, 순진한 자아는 대상적 세계가 전해주는 잘못된 정보에 쉽게 물든다. 하지만 대상적 세계를 향해 스스로가 속았다는 분함과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대상적 세계는 바로 자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투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적 세계가 나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철저히 해체되고 더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서 대상적 세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세계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존재는 마음 너머에 도달하였으므로 마음이 만들어내는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어떠한 것이 허구이고 가짜라는 것을 확실히 알 때, 그 대상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가진 신념대로 흘러가는 운명은 스스로가 몸 형상을 가지고서 세계 안에서 삶을 지속하다는 환상을 지속시키며, 사적인 자기가 붙들고 있는 위치성이 견고해짐에 따라 더욱 주관과 객관의 환영은 공고해진다. 거친 몸과 감각은 자기 정체성이 몸 형상에 한정된다는 신념에 일조한다. 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스승의 은총이 전해지기 전까지 무지와 고통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몸 형상을 붙들고 있는 존재는 스스로가 미혹에 빠져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몸 형상과 보편적 의식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미혹이 하나둘씩 제거되기 시작한다. 몸 형상으로 쌓아 올린 마음의 업보가 많을수록 미혹의 층은 두꺼우며, 자발적으로 사적인 자기에 대한 자부심과 허영을 내려놓을 것이 요구된다. 세상 속에서 내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일체가 신의 것임을 당당히 선언하기 전까지 사적인 자기는 완전히 내맡겨지지 않고 고통을 낳는 업보를 쌓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거짓은 진실보다 지니고 있는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회적이고 편파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거짓이 진실과 정면으로 충돌할 때, 스스로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버젓이 마주할 수밖에 없으므로 거짓은 늘 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변호하기에 급급하다. 스스로가 이미 자명한 진실이라면, 구태의연하게 스스로가 그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화려한 언변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말이 많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지 못한 것에 대한 반증이며, 사적인 자기가 지니는 위치성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어떠한 행위와 사고가 신의 무조건적이 사랑을 반영하기 위한 통로로 쓰일 때에만, 올바른 결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실은 부의 축적과 명성의 획득 등의 이전에 자리한 내적인 만족과 기쁨이다. 인간의 존재가 돈을 모으고 이상적인 관계를 꿈꾸며, 세상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이유도 원초적으로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함에 따라 얻어지는 내적인 만족과 기쁨 때문이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 덧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세간적 성공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지속 가능한 행복을 선사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늘 그 대상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한다. 육체적 생존을 보장받는 데에 필요한 부가 실질적으로는 걱정의 산물로 취급 데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더 많은 부는 더 많은 걱정과 불안을 낳는 골칫거리일 뿐이다. 먹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족한 줄로 알라는 스승의 말씀은 필요 이상의 물질적 부가 오히려 소유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신 현명함이다. 생명기운이 충만할 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대상들인 돈과 권력, 명성, 정력 그 모두가 육체가 노쇠함에 따라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스스로를 몸과 동일시하는 무지로 인해 인간의 존재는 결국 시간에 덧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인, 세상에서 가장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억만장자, 세상에서 가장 여자를 많이 꼬셔본 카사노바, 세상 전부를 통치하고자 하는 야심을 달성한 지배자 그 모두가 끝내 신체적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자명한데,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무지함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몸 형상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 즉 신성한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다면, 몸은 한낱 송장에 불과하다. 의식의 빛에 실려있는 생명기운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삶 속에서 신을 향한 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모두가 존재함을 사랑하고 존재를 지속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 번거로운 수고를 감당하고서라도 육체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몸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 몸과 마음에 한정된 사적인 자기가 아니라 보편적 의식에서 비롯되는 신의 자비와 연민임을 깨닫는 것이다. 몸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수준에서는 건강한 음식을 섭취함을 통해 육체의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는 착각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육체 내부로 들어간 음식을 소화하고 에너지로 바꾸는 일체의 소화 과정에 사적인 자기는 일체 관여할 수 없다.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소화를 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심장은 저절로 뛰고 호흡은 아무런 노력 없이 계속해서 쉬어진다. 육체의 생존을 기능하게 하는 것이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하는 것이 이토록 명백하다면, 삶 전체를 몸 형상을 위해 전적으로 바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몸이 그토록 존중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의 송장에 지나지 않는 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신성 때문임을 확실히 해야 한다. 신이 거주하는 내면의 성전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때, 몸은 신성을 표현하기 위한 통로로서 제 본연의 기능을 다한다. 오직 육체를 움직이고 기능하게 하는 것은 신성한 힘이 전적으로 도맡아 할 뿐이다. 특정한 순간에 어떠한 음식이 끌리는 사소한 생각과 느낌조차도 모두 사적인 자기가 아니라 내면에 거주하는 신성이 하는 일이다. 육체의 탄생이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신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일체를 내맡기는 것이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현명한 처사임을 증명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신께서 하시는 것이다.


사적인 자기가 거주하는 의식적인 영역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삶에서 주어진 것들에 모두 감사하고 일체를 신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단순히 믿는 일뿐이다. 단순하고 일관된 믿음은 무척 간단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어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자만심과 허영에 사로잡힌 사적인 자기에게는 가장 어려운 것이다. 영의 월등한 인내심이 있지 않았더라면, 의식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복잡 다난한 세상 속에서 단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음이 명백하면서도 사적인 자기는 주장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기존에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무뎌진 마음은 이미 일체가 자기 자신을 위해 주어져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숨을 지속적으로 쉴 수 있도록 공기가 주어져 있으며, 목이 마를 때 갈증을 식혀줄 물이 도처에 있으며, 배고플 때 허기를 채워줄 음식이 도처에 만연하다. 나아가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가 지닌 생각과 지성을 통해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변화하고 이룩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파생된다. 사적인 자기의 정체성이 허구임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상과 기억의 다발에 사로잡힌 존재는 생각과 지성조차도 그 바탕에 깔린 생명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면, 기능하지 못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부정한다.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그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이 없다면, 무엇을 해낼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아이에서부터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육체의 성장과정 속에서 사적인 자가가 스스로 해낸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온갖 잘못된 개념으로 똘똘 뭉친 사적인 자기가 한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스스로가 신의 자녀임을 거부한 일뿐이다. 사적인 자기가 붙들고 있는 알량한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고는 만물에 거주하는 신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적인 자기는 오직 신과의 분리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오직 신 뿐이라면, 사적인 자기는 알량한 자존심으로부터 오는 우월함을 과시할 수 없다. 스스로가 특별하고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는 대상과의 분리를 조장하고 사적인 자기를 찬양한다. 버젓이 만물 안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무지는 사랑의 부재와 함께 악을 일상으로 초청한다. 위선과 기만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쾌락을 즐기는 사적인 자기는 참된 행복의 원천인 존재의 아름다움과 단절되어 있다. 내면에서 발견할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을 충당하기 위해 사적인 자기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우상화에 빠져든다. 이와 반대로 사적인 자기를 내맡기고 겸손함 속에서 일체를 신의 공로로 돌리는 존재는 단일성 속에서 모두가 자기 자신임을 확인한다. 분리를 조장하는 일체는 거부되고 오직 신만이 도처에 있음이 확인될 뿐이다.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환영임을 알아차리고 나서도 주관과 객관의 분리는 계속된다. 다만 그 분리가 거짓임을 명백히 알 게 될 때, 인간의 존재는 거짓에 사로잡히지 않고 분리가 주는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어떠한 긴장 없이 분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분리가 실상이 아님을 깨닫고 분리를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더욱 크고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즉 마음 너머에 있는 본래의 자기를 인식하였으므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마음보다 더 넓은 맥락 선상에 있는 존재가 마음에 휘둘릴 수는 없다. 마음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역설적으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곳에는 마음에 대한 애먼 기대와 상상이 없기 때문이다. 단일성 안에서도 다양성이 주는 아름다움은 수용될 수 있으며, 전보다 그 질적인 측면이 더욱 명료하게 다가온다. 시야와 안목이 넓어짐에 따라 특정한 대상에 한정된 아름다움의 가치는 자연으로 확장되고 나아가 자연 너머의 존재 전부로 확장된다. 존재 안에 담긴 일체가 자기 자신이므로 아름다움의 가치가 마음의 선호에 좌우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만큼 남들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신과의 합일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리의 경계가 녹아내려 그 구분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주관과 객관이 동시에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은 분리되어 보이는 그 대상이 실상 나라는 존재와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말했듯이, 몸의 분리이지, 의식의 분리가 아니다. 분리의 환상이 고통을 낳는 메커니즘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지속적인 분리의 환상은 감정의 활력을 억제하고 이는 욕구불만의 상태와 파괴적인 공격성향으로 이어진다. 창의적인 형태로 발산되지 않는 생명력은 잘못된 동일시를 붙들고 있는 맥락으로부터 획기적인 전환을 꾀하지 못하므로 역설과 모순을 간파해니지 못한다. 사적인 자기라는 아상과 그와 연관된 대상들에 대한 집착은 무지로 인해 존재의 근원이 만물을 연결하는 보편적 사랑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신을 향한 숭배와 헌신이 권장되는 이유는 진실에 부합하는 행위와 사고로부터 사적인 자기의 지배력이 서서히 약화되기 때문이다. 신의 성품인 아름다움과 완전함, 기쁨은 다함이 없으므로 언제든지 사적인 자기가 자발적으로 물러나면 저절로 찾아오게 된다. 동물적 본성에 해당되는 감각적 쾌락조차도 신을 향한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한 숭배와 헌신이 될 때, 분리의 환상을 해체시키는 힘이 된다. 세계 안에서 신이 자리하지 않는 곳은 없는데, 왜냐하면 세계 안에 있는 유일무이한 것은 신이기 때문이다. 더욱 많이 알려는 과도한 호기심을 내려놓고 그저 매사에 신만을 생각하고 붙들 때, 어느 순간 일체가 명확해지고 분명해지게 된다. 스스로가 진실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신이 알아서 처리하신다. 사적인 자기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존재에게 가장 최선이고 이로운 것은 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든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들은 판도라의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열어보려는 호기심이 세계 속의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온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온통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질서와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언컨대, 존재의 근원이 신임이 밝혀짐을 통해서이다. 고양된 감수성을 가져오는 지복의 순간을 따르다 보면, 애씀 없이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매사에 사적인 자기가 관여하지 않도록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분리된 몸 형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모두를 단일성 속으로 합일시키는 보편적 의식에 일관되게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모든 일은 사적인 자기가 아니라 보편적 의식에 해당하는 신이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진실은 설명과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 진실은 그저 진실로 있을 뿐이다. 지복이 가져다주는 신성한 빛은 만물은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물들인다. 생명을 가진 몸 형상의 주인의 진정한 실체가 신임이 명백해질 때, 놀라운 광경이 목견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세계가 신이 벌이는 주사위 놀이판이라는 사실 말이다.

"소년이여,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존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