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고통 받는 존재인가?
아마 그 이유 중 하나는, 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지 사용에 대한 맹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은 무엇인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는 문장이다.
그 말처럼 코메디 같은 말이 없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니, 정말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것 따위는 없는가?
확실한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요청할 것이다.
'이 세상에 보편적인 것 따위는 없다. 보편이란, 인간의 정신 안에나 있는 환상일 뿐이다.'
이건 중세의 기나긴 보편 논쟁의 끝에, 유명론이 득세하게 된 현실에서도 드러나고 그런 사고방식은
근대 과학의 발전, 언어 철학의 발전과 함께 더 굳어졌다.
그 사람들의 입장을 옹호한다면, 해당 명제는 엄밀히 말하면 참이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항상 엄밀함에 의존해서 말 장난을 한다.
엄밀함에 의존한 장난질의 또 다른 사례는 무엇인가?
극단적 관념론을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들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감각 자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 바깥의 대상을 상정해서는 안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정신에 드러났다는 사실이지, 우리 정신 바깥에 무언가 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숙제는 있다.
네 의지에 따라 생성-소멸하는 관념과 네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관념들, 감각자료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념론자들도 결국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정신 바깥의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관념과
그렇지 않은 관념들을 구분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숙제다.
이 세상에 보편적인 것 따위는 없다는 말도 그렇다.
그래, 아주 엄밀하게 따지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보편에 가까운 것과, 보편과 먼 것을 구별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고 불리는 개별자들과, 강아지라고 불리는 개별자들은 분리된다.
숫자라고 불리는 추상적 개체들과, 인간이라고 불리는 구체적 개체들은 구별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많은 경우에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어떤 의미에서의 앞섬인가?
실존의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체의 탄생과 함께 정해지는 잠재적이고 보편적 특징들은
항상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말, 생각, 행동을 규정하게 된다는 점에서의 앞섬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귀속되는 몇 가지 보편적 특징들을 알면, 그 인간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측할 수가 있다.
그 인간의 재산, 키, 학벌, 집안, 지능, 건강, 성격 등을 보면 그 인간의 삶의 형식, 구조를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다.
삶의 질료적 측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말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그건 학문들의 실용성에 있다.
심리학, 과학, 수학, 철학, 정치학, 사회학... 각 영역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 학문들 중에서
보편성에 의존하지 않는 학문이 있는가?
그런건 학문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학문들은 인간의 삶을 개선해왔다.
이것으로 보편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증명은 충분하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그래서 말 장난에 불과하다.
본질을 거부하더라도, 본질과 다름없는 유사성에 의해 지배 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선택과 그것의 결과를 통해 규정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왜 '인간'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
길가에 돌아다니는 돌멩이에게 인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개별적으로 구체적 선택과 삶의 경로를 통해 인간성이 규정된다고 믿는 실존주의자들은,
서로를 인간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모순된 소리인가?
보편성, 아니 엄밀하게는 유사성, 이 개념을 거부하는 이들의 주장은 그래서 현실성 조차 없다.
구속력도 없다. 무슨 주장을 하던, '그건 네 인생에나 적용되는 소리 아닌가?'
라는 말에 말문이 턱 막힌다. 공동체를 결속시킬 수 있는, 일반적이고 정적인 무언가가 없다면
인간은 방황하게 된다.
인간은 본성상 보편성과 일관성, 유사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모든 것이 개별적이다? 말장난 하지 마라.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과연 본질, 보편, 일반 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얼마나 거스를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보리라. 철부지 같은 인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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