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험이니 표상이니 이성(종합)이니 따위의 알 듯 말 듯한 낱말에 꽂혀 시간 낭비 말고, 저의 도발을 다들 진지하게 고민해 봐 주십시오.
고독사(125.188)2024-08-12 00:54:00
답글
* 1. 선험: 나의ㅡ개별적ㅡ경험 이전에 이미 주어진 인간이라는 보편적¿ 형식(그러니 나 개인의 경험은 대개 인류의 역사를 답습한다).
고독사(125.188)2024-08-12 0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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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표상: 이데아의 상기plato.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망상도 아닌 어정쩡한 그 중간. 가령 '모든 사과는 둥글고 빨갛다'는 선언의 형식. 거기서부터 연역이 출발하는 것.
고독사(125.188)2024-08-12 0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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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성: 이성은 이미 인간의 타고난 조건이자 자신의 경험세계로서 다시금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 앞서 말한ㅡ연역으로서ㅡ작은 이성x이 큰 이성X으로 도달한 상태를 '종합'이라고 함.
고독사(125.188)2024-08-12 0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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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선험, 표상, 이성은 나의 성근 풀이에도 불구하고, 철학사, 아니 인류 상식사로서 적확한 개념풀이임. 즉 나는 이런 적절한 개념적 의미를 모르고서도 철학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임.
고독사(125.188)2024-08-12 01:38:00
이제 올림픽 게임도 끝났고 다시 생각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기 위해선 반드시 조건이 필요하다니요. 정말로 그럴까요?
고독사(125.188)2024-08-12 00:58:00
어떤 중학생이 칸트를 포함한 모든 철학자를 건너뛰고 어느날 우연히 읽은 레비나스나 바디우a_badiou를 읽고 타자(대상 그 자체)의 절대성을 발견하고 깨우친 뒤에 일생을 레비나스나 바디우의 가르침에 따라 산다면 그는 신앙인인가 철학하는 사람인가?
고독사(125.188)2024-08-12 0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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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어느 날 우연히 v마주한V 레비나스와 바디우를 읽고서 타자(물자체)의 절대성을 발견하여 깨우친 뒤에 레비나스(혹 바디우)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실천한다면"
그.는.신.앙.인.인.가.
철.학.하.는.사.람.인.가.
고독사(125.188)2024-08-12 0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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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를 겪은 레비나스의 '다가갈(마주할) 수 없는 타자'와 혹독한 시절을 겪고 있는 오늘의 중학생이 말하는 '영원한 남'은 무엇이 다른가? 철학박사학위자와 사춘기 중딩의ㅡ도저히 좁힐 수 없는ㅡ인식론적 차이 때문인가? 이때 나는 다시 묻는다,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고독사(125.188)2024-08-12 0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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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피스테메란 무엇인가?
고독사(125.188)2024-08-12 02:01:00
답글
*뛰어난 철학자의 주장 또한ㅡ자신의ㅡ신앙(>신념=믿음)에 의지한다는 건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고독사(125.188)2024-08-12 02:09:00
답글
그렇다면 철학 또한 한 개인의 신념체계인가?
ㅡ여기서는 답을 유보하겠다. 판단중지. 철학은 '철학한다'는 그 '과정의 삶'이 더 중요한, 적실한 대답일 듯힌다.
고독사(125.188)2024-08-12 02:12:00
답글
그렇다면)아무런 답도 없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철학을 왜 하는가? 우리 인간의 삶이 본디 그런 게 아닌가. 철학을 함으로써 좀 더 거창한 신앙간증을 하겠고, 내가 믿는 것에(그것이 허무주의라고 할지라도) 대한 허망함을 줄이는 품위 있는 발악이 아닌가. 칸트는 존재의 형식을 말하면서 인간의 일상적 태도까지 포함시켰다.
고독사(125.188)2024-08-12 02: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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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적실한 대답일 듯하다.
고독사(125.188)2024-08-12 02:23:00
칸트는 칸트를 읽은 적이 없습니다
철갤러 1(59.26)2024-08-12 07:42:00
답글
칸트는 칸트를 읽어야 할 까닭이 없죠. 자신의 생각을 쓰고 기록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읽어 내려간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님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 굉장히 재치있고 순발력있는 발언인데, 그만큼 성글어요. 하필이면 그 대상이 칸트입니까: 칸트의 비판서는 의도적으로, 집요하리 만큼 자신의 물음을 자신의 응답으로서 매듭지으려 한다.
고독사(125.188)2024-08-14 21:32:00
이젠 아무도 관심조차 없는 칸튼 거 같은데 되게 열정적이시네요.ㅡ레뽀?윤키?
철갤러 2(1.225)2024-08-12 14:19:00
답글
"레뽀 또는 윤키?"가 무슨 말입니까; 언제는 누가 내게 관심이 있어서 나는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했던가요?
고독사(125.188)2024-08-14 21:34:00
물론 실천이성비판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돼야 하죠. 근데...계속해서 순수이성비판에서 답을 찾으려 하시니...
철갤러 2(1.225)2024-08-12 14:25:00
답글
저는 오직 한 놈만 패는 스타일입니다. 백종현 교수의 생각과 달리 제가 생각하는 칸트의 정수는 실천이성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칸트가 이론적으로 행하는 순수이성비판의 절차를 밟아서 제대로 깨우치면 그 후 나는 칸트와 다른 실천의 장을 펼쳐볼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 과정이 내겐 너무 벅차고 고달플 뿐이지요. 칸트에게서 실천은 그의 비판이론 그 자체였
선험이니 표상이니 이성(종합)이니 따위의 알 듯 말 듯한 낱말에 꽂혀 시간 낭비 말고, 저의 도발을 다들 진지하게 고민해 봐 주십시오.
* 1. 선험: 나의ㅡ개별적ㅡ경험 이전에 이미 주어진 인간이라는 보편적¿ 형식(그러니 나 개인의 경험은 대개 인류의 역사를 답습한다).
2. 표상: 이데아의 상기plato.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망상도 아닌 어정쩡한 그 중간. 가령 '모든 사과는 둥글고 빨갛다'는 선언의 형식. 거기서부터 연역이 출발하는 것.
3. 이성: 이성은 이미 인간의 타고난 조건이자 자신의 경험세계로서 다시금 도달해야 할 목적지인 것. 앞서 말한ㅡ연역으로서ㅡ작은 이성x이 큰 이성X으로 도달한 상태를 '종합'이라고 함.
※위의 선험, 표상, 이성은 나의 성근 풀이에도 불구하고, 철학사, 아니 인류 상식사로서 적확한 개념풀이임. 즉 나는 이런 적절한 개념적 의미를 모르고서도 철학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임.
이제 올림픽 게임도 끝났고 다시 생각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기 위해선 반드시 조건이 필요하다니요. 정말로 그럴까요?
어떤 중학생이 칸트를 포함한 모든 철학자를 건너뛰고 어느날 우연히 읽은 레비나스나 바디우a_badiou를 읽고 타자(대상 그 자체)의 절대성을 발견하고 깨우친 뒤에 일생을 레비나스나 바디우의 가르침에 따라 산다면 그는 신앙인인가 철학하는 사람인가?
*앗! "어느 날 우연히 v마주한V 레비나스와 바디우를 읽고서 타자(물자체)의 절대성을 발견하여 깨우친 뒤에 레비나스(혹 바디우)의 가르침에 따라 평생을 실천한다면" 그.는.신.앙.인.인.가. 철.학.하.는.사.람.인.가.
아우슈비츠를 겪은 레비나스의 '다가갈(마주할) 수 없는 타자'와 혹독한 시절을 겪고 있는 오늘의 중학생이 말하는 '영원한 남'은 무엇이 다른가? 철학박사학위자와 사춘기 중딩의ㅡ도저히 좁힐 수 없는ㅡ인식론적 차이 때문인가? 이때 나는 다시 묻는다,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에피스테메란 무엇인가?
*뛰어난 철학자의 주장 또한ㅡ자신의ㅡ신앙(>신념=믿음)에 의지한다는 건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그렇다면 철학 또한 한 개인의 신념체계인가? ㅡ여기서는 답을 유보하겠다. 판단중지. 철학은 '철학한다'는 그 '과정의 삶'이 더 중요한, 적실한 대답일 듯힌다.
그렇다면)아무런 답도 없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철학을 왜 하는가? 우리 인간의 삶이 본디 그런 게 아닌가. 철학을 함으로써 좀 더 거창한 신앙간증을 하겠고, 내가 믿는 것에(그것이 허무주의라고 할지라도) 대한 허망함을 줄이는 품위 있는 발악이 아닌가. 칸트는 존재의 형식을 말하면서 인간의 일상적 태도까지 포함시켰다.
*더 적실한 대답일 듯하다.
칸트는 칸트를 읽은 적이 없습니다
칸트는 칸트를 읽어야 할 까닭이 없죠. 자신의 생각을 쓰고 기록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읽어 내려간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님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 굉장히 재치있고 순발력있는 발언인데, 그만큼 성글어요. 하필이면 그 대상이 칸트입니까: 칸트의 비판서는 의도적으로, 집요하리 만큼 자신의 물음을 자신의 응답으로서 매듭지으려 한다.
이젠 아무도 관심조차 없는 칸튼 거 같은데 되게 열정적이시네요.ㅡ레뽀?윤키?
"레뽀 또는 윤키?"가 무슨 말입니까; 언제는 누가 내게 관심이 있어서 나는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했던가요?
물론 실천이성비판은 계속해서 업데이트 돼야 하죠. 근데...계속해서 순수이성비판에서 답을 찾으려 하시니...
저는 오직 한 놈만 패는 스타일입니다. 백종현 교수의 생각과 달리 제가 생각하는 칸트의 정수는 실천이성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칸트가 이론적으로 행하는 순수이성비판의 절차를 밟아서 제대로 깨우치면 그 후 나는 칸트와 다른 실천의 장을 펼쳐볼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 과정이 내겐 너무 벅차고 고달플 뿐이지요. 칸트에게서 실천은 그의 비판이론 그 자체였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