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무슨 점집이 그렇게 많은지 날이 갈수록 호황을 누리는 그 산업을 보고 있자면 나도 거기 끼어들어 한 숟가락을 얹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신산한 인생사 고생으로 노력으로 시문학을 적는다 하여도 나의 문학을 출간해주는 유명 출판사는 있지 아니하고 product on demand 형식의 출판을 하고 나면 책의 판매 부수는 세 권이 채 되지를 않는다. 반면 사주를 봐 주거나 타로점을 봐 주는 사람들을 보라. 물론 그 업계도 치열한 경쟁이 있겠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수많은 업계의 바닥들이 있겠지만 잘 나가는 사람들로만 보자면 무명 작가의 책팔이보다는 돈을 더 잘 버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매일 아침 나절을 철학책을 읽는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하지만 목 좋은 곳에다 철학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사주 작명 택일 등을 하여 준다는 그런 점방들을 보고 있자면 철학의 실용이란 방구석에서 웃음을 잃은 채 책 줄글을 파고들며 홀로 고뇌하는 멜랑콜리 기질의 지식인 철학자에 있다기보다는 자리를 깔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주를 보아 주는 그런 종류의 철학에 있는 것만 같다.
대명천지의 과학이 있는 시대에 웬 사주인가. 도대체 사주를 보고 점복을 쳐서 운명을 알고자 하는 우리 시대 수많은 사람들은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학창시절 과학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물리를 포기했거나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보지 않았을지라도 과학의 진리성에 대해서는 피부로 체감하여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신뢰는 최신 의학 기술에 대해 신뢰를 보내는 것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과학적 지식에 기반하여 임상시험을 거쳐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특정 질환을 타겟팅하여 생리 현상을 조절하도록 제조된 약물에 대해서는 묻고 따지는 것 없이 전적으로 신뢰를 보이며 그 약효가 플라시보 효과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생체의 물질현상을 조절하는 약리현상에 의한 효과인지를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약을 먹었더니 고통이 줄어들고 병이 낫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현상이 있고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투입된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산출된 결과가 있다면 그것을 연관지어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하는 것이고 그 기준으로 시중에서 판매되는 수많은 약들은 효과가 있다. 그 약들이 바로 과학의 산물이라니 그 과학이라는 것이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과학이 아니었으면 전등 텔레비전 핸드폰 냉장고 컴퓨터 고층건물 핵발전소 자동차 화학섬유 플라스틱 등등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이 없는 삶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역시 과학은 대단한 것이다. 한편 사주팔자의 형편은 어떠한가 보자. 일단 사주팔자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여 보겠다. 사주는 四柱라고 적는다. 넉 사 자에 기둥 주 자를 쓴다. 팔자는 八字라고 적는다. 여덟 팔 자에 글자 자 자다. 사주는 사람이 태어난 시각을 특정하여 그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는 이론이다. 그 시각은 연 월 일 시의 네 차원으로 특정된다. 글을 적는 나는 서력기원 1985년 10월 25일 07시 05분 생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시는데 년주가 乙丑이고 월주가 丙戌이 되고 일주가 丁酉 시주가 癸卯가 된다. 년 월 일 시에 각각 두 글자씩이 배정되는데 앞선 글자는 천간天干에 해당하고 뒤의 글자는 지지地支에 해당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가 천간이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가 지지에 해당한다. 네 차원에서 천간과 지지를 조합한 글자들을 가지고 한 사람의 운명을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사주풀이인 것이다. 천간 지지는 음양과 오행의 요소로 분화가 되고 그것에 기초하여 십성十星과 용신用神의 차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가 잘 아는 과학으로 따지면 기초가 되는 요소를 조합해서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창발성創發性의 개념과 비슷하다 말하겠다. 사주를 봐 주는 사람은 사주를 보러 온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 그 사람의 년월일시를 듣고서 그걸 사주만세력을 펼쳐 여덟 글자를 종이에 적어 두고 그 글자로부터 여러 차원의 온갖 상징들과 그 연관을 앞에 앉은 사람의 인생이 무엇이었고 무엇일지에 대한 대답으로 이야기해 내는 것이다. 사주를 잘 보는 사람은 찾아온 사람의 사주를 적어 두고 용신이 바로 생각이 나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니 그 내공의 수련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내가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바로 2024년이 과연 어떠한 시기인가. 문학에 취미를 갖고 시 몇 편을 끄적거려 보고 그 때문에 문학계에 대해서 잠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다. 수용자 없는 예술은 존재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예술은 그것을 감상하고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에 따라 발달하게 된 장르가 바로 문학 평론이다. 문학 평론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보아 하니 문학을 평론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평가의 기준이 되는 이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문학을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에 비추어서 평가한다던가 아니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비추어서 평가한다던가 페미니즘 이론으로 평가한다는 식이다. 이에 따라 문학을 평가하고자 하는 업을 꿈꾸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문학을 평가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기존의 사상들을 학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학 평론 업계에서는 문학 작품 평가의 기준이 되는 이론들도 유행을 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때 문학 평론계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을 기준으로 하여 문학 작품을 재단하던 시기가 있었나 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말 뜻이 무언고 하니 포스트는 후後 라는 뜻이고 모더니즘은 근대近代 라는 뜻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후-근대라고 옮기기보다는 탈脫 근대의 사상으로 옮기는 경우가 더 많다. 탈 근대는 근대라는 규정 하에 살아 왔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시기와 차별화되는 현대現代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보통의 역사의 발전 단계에 대한 구분에 대해서 소개해 보겠다. 보통의 세계사 수업 시간에 역사의 발전 단계를 고대-중세-근대-현대로 구분하며 그것을 주창한 사상가는 마르크스라고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물질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의해서 나눈 것 같다. 그에 따르면 고대는 노예제 사회이고 중세는 장원제 근대는 자본주의 체제로 분류된다. 만약에 근대와 구분되는 현대가 존재한다면 그 현대의 특성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지나간 과거가 되어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를 규정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현대가 큰 역사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근대라고 규정되는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아니면 질적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시기가 펼져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잘 모르는 채로 근대로 규정되는 시기와 다른 점을 찾아 내고 근대에 반하는 새로운 것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탈 근대의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적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역사의 시기를 구분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차원에서 근대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문학적으로 근대를 열어젖힌 사람은 단테 알리기에리라고 알려져 있다. 단테는 신곡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의 작품인 신곡을 보면 서구의 고대로부터 단테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여러 단계로 분할된 지옥 연옥 천국의 특정 장소에 위치시키고 있다. 보통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유명인사들은 지옥에 위치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단테의 기억 속 선량한 주변 친구들은 천국에 위치하고 있다.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은 단테의 문학이 아니었으면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질 일이 없는 그런 여인이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근대를 열어젖힌 사건이다. 철학적으로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근대의 시작이었다. 천문학적 관찰로부터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이어진 과학혁명이 근대를 열어젖혔고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이 그러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형성되었다. 지금 이야기한 사건들은 모두 서구 역사에서 발생한 일들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과 한국이 속해 있는 동아시아는 서구 근대와는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걷고 있었다.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이 동아시아 사람들을 서구 근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어 현재의 우리들은 서구의 복식을 하고 서구의 발명품들을 사용하며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의 역사 발전 단계 중 하나인 근대의 한 시기를 살아가게 되었다.
한 한국사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분의 말씀인 즉 서구식 역사 구분 단계를 따르게 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고대 사회였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라는 것은 마르크스의 구분에 의하면 노예제 사회인 것인데 조선은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사노비가 법적으로 해방되는 그런 사회였고 그 이전에는 노비의 생산력에 의해서 돌아가는 고대 사회였다는 것이다.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은 것도 아니고 동족을 노예로 부렸다는 것이다. 그 교수님의 구분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흑인 노예를 부리던 링컨 이전의 미국은 근대 세계와 고대 세계가 겹쳐진 그런 역사 발전 단계일 것이다. 나는 유교 이상사회가 어떠한 것인지 탐구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주제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맹자에 나오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장을 들어 말씀드렸다. 서구의 노예와 조선의 노비는 달리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요 노비는 천민賤民이고 나라를 통치하는 위정자의 입장에서 볼 때 천민 또한 백성이고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는 유교적 이상에 따라 왕이 통치하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을 적은 문서인 분재기에 보면 노비 또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는데 그 노비의 가족들을 찢어서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여민동락 장에는 "부자간이 서로 만나보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식이 서로 흩어지게 한단 말인가!"의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주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계몽주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계몽주의는 영어로 enlightenment로 옮긴다. enlighten이란 빛을 비추어 밝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종교개혁 과학혁명 등이 모두 계몽주의와 통한다. 사제들이 감추어 자신들만이 소유하는 지식이었던 성경을 번역하여 일반 사람들이 읽게 하여 어둡던 부분에 빛을 비추어 밝게 드러나게 하니 사제들의 위선과 기만이 폭로되었다. 사제를 거치지 않고 평신도가 직접 성경을 읽어 하나님과 만나고자 하는 개신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과학적 발견으로 인하여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음이 밝혀졌다. 하늘의 공간 어디를 뒤져보아도 하나님의 궁전이 있을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형상과 닮은 하나님이 그 천국 궁전에서 살고 있지 않음이 밝혀졌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기독교의 하나님은 상징적이고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과학혁명 이후의 기독교의 신학은 사람의 마음에 하늘같은 천국이 있는 것이며 또 하늘은 천문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라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는 빈 터로서의 하늘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역사의 시간이 흐르고 기독교적 이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 현실을 바라보는 최후의 신학자에게 하나님은 그로부터 모든 질적 측면이 사상된 절대자라는 앙상한 철학적 골조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절대의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이 세상의 부도덕과 타락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환이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미래사를 믿으며 신앙세계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었다.
과학으로 계몽된 이 시대에 사주의 비과학성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간을 결정하는 천체의 우주적 운행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동물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만 논증해 보이면 된다. 나는 서력기원 1985년 생이어서 년주로 따지면 을축乙丑년 생인데 1985년에 해당하는 지구와 태양 그리고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을 것이고 그 우주적 배열에서 과연 지구에 사는 동물인 소cow가 꼭 그 시기와 동조하여 우주적 기운을 뻗어내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을 밝혀내면 된다. 그것이 눈을 속이는 마술같은 포장막에 밝은 빛을 비추어 온갖 무당 푸닥거리와 주술과 미신을 걷어내는 근대의 계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몽된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주팔자를 보는 놀이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도대체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사주를 보며 "사주는 과학이다"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유명 인문학자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 것인가. 일단 현대 한국에서 사주를 보는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때 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점술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이다. 하나는 너무 큰 일을 맡고 있어서 자신이 하는 결정이 옳은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국가 대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무속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른 하나는 인생사가 너무 신산하여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이다. 자신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의 설명을 듣고자 할 때 보통 자신이 걸어 온 과거를 반성하여 그 이유를 발견하곤 하는데 아무리 과거를 반성해 보아도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설명을 생득적인 운명에서 찾고자 한다.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점을 보러 가면 과거에 대해서는 맞는 말을 많이 하는데 미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는 틀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지나온 인생에 대해서는 온 과거를 소환하여 일치점을 찾고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의 예언을 마음에 새기고서 그것이 맞아떨어지는지를 확인해 보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나는 어쩌면 인간의 불행도 비슷한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 사람들의 90% 이상은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재벌들은 돈이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돈을 가장 많이 가진 그 사람들이 가장 돈이 부족한 사람들일 수 있다. 기업의 경영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항상 돈을 끌어올 데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당이 무당을 찾아 온 사람에게 "돈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 라고 말하면 100% 맞는 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 말은 "너는 경제적 동물이야" 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치이다. 하지만 무당은 언제나 맞는 말만 하는 학자인 것은 아니다. 무당이나 사주를 보는 사람은 개별적인 사람을 놓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맞는 말 또한 한다. 그들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하면 내담자의 모습이 더 잘 보인다고 한다. 앞에 내담자의 사주에 해당하는 여덟 글자를 적어 놓고 그 글자를 보면 바로 용신이 떠오르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사주팔자에 관련한 다양한 차원의 온갖 상징들의 수많은 조합 중에서 앞에 둔 사람의 운명에 해당하는 하나가 머리 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관상觀相이든 심상心相이든 앞에 둔 사람의 무언가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데이터를 모아 논리적 추론을 하여 판단을 하는 인간의 학문적 인식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떤 무당은 신이 일러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섞어서 한다고 한다. 신이 일러준 말만을 하면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봐서 도망가니까 부러 딴 소리를 섞는다는 것이다.
사주를 봐 주거나 점을 봐 주는 사람은 내담자의 미래에 대해서 말해 줄 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낫다. 예를 들어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돈을 벌지 못하는 청년에게 "30살 때부터 재물운이 들어온다. 그 나이에는 돈을 많이 벌게 된다."고 말해 주는 것보다는 "앞으로 투 잡 쓰리 잡을 하게 될 운명이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 사람이 똑같이 30살 때 돈을 벌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 전자는 사주를 봐 준 사람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지만 후자는 사주를 보고 간 사람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주어진 운명을 배반하고 직장을 구하지 않아 돈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사람이 투 잡 쓰리 잡을 갖지 못하고 하나의 직장만 갖게 되어 돈을 버는 결과를 낳았을지라도 후자의 방식으로 미래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 낫다. 전자의 경우는 사주만을 믿고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반면 후자는 전자보다 더 큰 동기부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수가 사주를 보고 와서 동기부여를 받고 일을 해 돈을 벌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면 사주가 과학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사주는 의미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과학이 아닌 많은 것들이 있고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개인의 삶에서 과학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주 또한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나의 이 글이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근대 한국인들이 사주를 보러 다니는 현상에 대해서 근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 시도해 본 계몽주의적 풀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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