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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찰대상과 관측자]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네가지이다.


1.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바라볼때에는 관측되는 대상과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존재한다.

2. 외부의 관측되는 대상은 매번 달라지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하다.

3. 관찰자는 관찰자 자기 자신을 관찰할수는 없다.

4. 관찰자는 관측되는 대상과는 또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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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외부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관찰하고 인식할때, 그곳에는 항상 관측되고 인식되는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관측자 이렇게 두가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눈앞의 나무를 본다면 그렇게 관찰되는 나무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음악을 듣는다면, 그렇게 들리는 음악과 그것을 듣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할때에는 항상 관찰되는 대상과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 이렇게 두가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찰되는 대상은 매번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하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나무를 봤다가 돌멩이를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바라보는 관찰대상은 매번 달라지고 변화할수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일한 사람이 나무를 봤다가 돌멩이를 보는것이다. 즉 관찰대상을 바라보는 관측자는 항상 달라지지 않고 동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특정한 음악을 들었다가 다른 음악을 들을수 있다, 즉 인식되는 대상은 항상 달라질수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동일한 사람이 특정한 음악을 들었다가 다른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을 인식하는 관측자는 항상 달라지지 않고 동일한 것이다. 즉 이런식으로 사람에게 관측되는 대상들은 변화하고 달라질수 있지만 그것들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항상 관찰자인 자기 자신과 다른 대상들만을 관찰하거나 인식할수 있다. 즉 관찰자 자기 자신을 바라볼수는 없는것이다. 그건 눈으로 예를 들면 눈은 항상 눈 자기 자신과는 또다른 물건들과 대상들만을 바라볼수 있을 뿐 눈 자기 자신을 바라볼수는 없으며, 카메라로 예를 들면 카메라는 항상 카메라와는 다른 또다른 외부의 대상들만을 사진으로 찍을수 있을 뿐 카메라 자기 자신을 사진으로 찍을수 없는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관찰자는 관측되는 대상과는 또다른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관찰자는 항상 관찰자인 자기 자신을 관찰할수는 없으며 관찰자 자기 자신과는 또다른 대상들만을 바라보고 관찰할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항상 관찰되는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측자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즉 앞의 예시에서 관찰되는 나무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사람은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또한 들리는 음악과 그것을 듣는 사람도 역시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세가지이다.


1. 사람이 자신을 느끼고 관찰할때에도 관찰대상으로서의 부분과 관측자로서의 부분이 존재한다.

2. 사람의 관측대상으로서의 부분은 항상 달라지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부분은 항상 달라지지 않고 동일하다.

3. 진정한 자기 자신은 관측대상으로서의 부분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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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인 [1. 관찰대상과 관측자]에서 사람이 외부의 무언가를 바라볼때 그곳에는 항상 관찰대상과 그것을 관찰하는 관측자 이렇게 두가지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외부의 무언가를 바라볼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볼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이 자신을 느끼고 관찰할때에도 역시 관찰대상으로서의 부분과 관측자로서의 부분 이렇게 두가지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장기같은 물리적인 몸을 바라보고 느낄때 오직 그렇게 인식되고 관측되는 물리적인 몸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사람이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장기같은 물리적인 몸을 바라보거나 느끼고 인식할때에도 관측되는 몸과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을 느끼고 인식할때에도 오직 그렇게 느껴지고 인식되는 감정과 생각과 기억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사람이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을 느끼고 인식하고 관찰할때에도 역시 그렇게 인식되는 감정, 생각, 기억들 외에도 그것들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또다른 관찰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글인 [1. 관찰대상과 관측자]에서 사람이 외부의 대상들을 관찰할때 관찰되는 대상들은 항상 변하고 달라지지만 관찰되는 대상들이 달라지는 와중에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관찰할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이 자신을 관찰할때에도 관찰되는 대상들은 항상 변하고 달라지지만 관찰되는 대상들이 달라지는 와중에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의 육체적인 몸을 느끼고 바라볼때에도, 자신의 몸은 항상 움직이거나 변하고 달라지지만 자신의 몸이 움직이거나 달라지는 와중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을 느끼고 관찰할때에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은 항상 달라지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앞의 글인 [1. 관찰대상과 관측자]에서 관찰자는 관찰자 자기 자신을 관찰할수 없으며, 항상 관찰자와는 다른 대상들만을 관찰할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관찰하는 관찰자는 관측되는 대상과 별개의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때에도 항상 관찰되는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의 몸을 느끼고 관찰할때에도 항상 관찰되는 몸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을 느끼고 인식할때에도 역시 관찰되는 감정, 생각, 기억과 그것들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관찰자는 서로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은 관찰되는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적인 몸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느끼는 관찰자인 것이다. 또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역시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느끼고 관찰하고 인식하는 또다른 관찰자인 것이다.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세가지이다.


1.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바라볼때의 앎의 종류에는 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이 있다.

2.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때의 앎의 종류에도 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이 있다.

3.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닫는것은 관찰대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관찰자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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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외부의 특정한 대상을 바라보고 관찰할때의 앎과 인식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첫번째는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앎이다, 즉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대상이 있다는것을 아는것이다. 예를들어 사람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나무가 존재한다는것을 알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관찰자에 대한 앎이다, 즉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대상을 관찰하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것을 아는것이다. 예를들어서 사람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걸 알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관찰할때에도 그렇게 두가지 종류의 앎이 있다. 즉 관찰되는 대상에 대한 앎과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에 대한 앎이 있는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거나 느낄때도 그렇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몸이 있다는 앎과, 또한 그렇게 몸을 관찰하고 느끼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앎이 있는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을 관찰하고 바라보고 느낄때에도, 그렇게 관찰되고 느껴지는 감정, 생각, 기억이 있다는 앎이 있으며, 또한 그렇게 감정과 생각과 기억을 관찰하고 느끼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앎이 있는것이다.


앞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에서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그저 관찰되는 대상들에 불과할 뿐 자기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닫는것은, 앞에서 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에 대해 이야기한것과 같이, 관찰되는 대상들에 대한 앎이 아니라 관찰자에 대한 앎이다. 즉 지금 자신이 관찰하고 인식하고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존재한다는것을 아는것이 아니라, 지금 그것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인식하고 느끼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것을 아는 것이다.




[4. 형태와 무형]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 세상은 형상을 가진 형태와 그것들을 담고있는 형태가 없는 비어있는 공간의 두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2. 세상의 형상이 있는 요소는 항상 변화하고 달라지지만 그것들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그것들을 담고있는 무형의 비어있는 공간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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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항상 두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첫번째인 형태는 형상을 나타낸다, 즉 무언가 모양과 색과 형태가 있는 것이다. 책과 펜, 책상과 의자, 풀과 돌멩이 등등 사실 세상의 수많은 물건과 대상들은 모두 그렇게 특정한 형태 모양 색상등을 가지고 있는 형상이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는 그러한 형태들 외에도 그러한 형상이 있는 존재들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무형의 비어있는 투명한 공간이 존재한다. 즉 세상의 여러 형태가 있는 대상과 존재들은 항상 비어있고 투명한 공간 속에 담겨 있고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건 비유해서 설명하면 속이 비어있는 상자 속에 여러 물건들이 담겨있는 것과도 같으며, 또한 비어있는 집 안에 여러 물건과 가구들이 들어있는 것과도 같다. 이때 속이 비어있는 상자와 집이 무형의 비어있는 공간에 해당하며, 그 속에 들어있는 여러 물건과 가구들이 형태가 있는 대상들에 해당한다. 물론 이건 비유적인 설명이다, 왜냐하면 상자와 집도 결국은 형상을 가진 가장자리의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항상 이렇게 두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형상이 있는 대상과 존재들이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형상이 없는 공간, 즉 비어있고 투명한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세상은 항상 비어있고 투명한 형태가 없는 공간 속에 특정한 형태가 있는 대상들이 들어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형태가 있는 여러 대상과 존재들은 항상 달라지고 변화하지만 그렇게 형상과 형태가 있는 대상들이 달라지는 도중에도 그러한 존재들을 담고 있는 무형의 투명한 공간은 변하지 않고 항상 동일하다. 그건 집으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집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구와 물건들이 매번 달라지는 도중에도 그러한 가구와 물건들을 담고 있는 집 자체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과도 같다. 또한 그릇으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그릇 안에 들어있는 음식이 매번 달라지는 와중에도 그러한 음식들을 담고 있는 그릇 자체는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과도 같다. 즉 이런식으로 세상의 여러 형태가 있는 대상들은 항상 달라지고 변화하지만 그렇게 형태가 있는 대상들이 변화하는 도중에도 그것들을 담고 있는 형상이 없는 무형의 비어있는 공간은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5. 무형의 존재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세가지이다.


1. 사람 자신도 형상이 있는 부분과 그것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형상이 없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2. 사람의 형상이 있는 부분은 달라지지만 그것들 담고 있는 형상이 없는 부분은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하다.

3. 진정한 자기 자신은 형상이 있는 부분이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형상이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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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인 [4. 형태와 무형] 에서 세상은 형상을 가진 여러 대상들과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형태가 없는 무형의 비어있는 공간 이렇게 두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사실 사람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질수 있다. 즉 사람 역시 형상과 형태가 있는 부분과 그것을 담고있는 형태가 없는 무형의 부분 이렇게 두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은 두가지의 부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형상이 있는 부분이다. 즉 여러 형태를 가진 부분이다. 그것에는 여러 피부와 근육과 뼈와 장기들로 구성된 사람의 몸이 포함된다. 물론 그것에는 사람의 뇌도 포함된다. 즉 그것들은 형태와 형상을 가진 대상들인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에는 사람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들 역시 포함된다. 즉 그것들 역시 여러 형태와 형상을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사람은 오직 그렇게 첫번째 부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사람을 구성하는 부분에는 그러한 첫번째 부분 외에도 두번째 부분이 존재한다. 즉 그러한 형태가 있는 부분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형태가 없는 무형의 부분, 즉 비어있는 투명한 공간과도 같은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앞의 글인 [4. 형태와 무형]에서 세상의 형상을 가진 대상들은 항상 달라지지만 그러한 형태가 있는 대상들이 달라지는 도중에도 그러한 형상이 있는 대상들을 담고있는 무형의 비어있는 공간은 항상 달라지지 않고 동일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 자기 자신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의 형태가 있는 부분은 매번 변화하고 달라지지만 그렇게 사람의 형상이 있는 부분이 달라지는 도중에도 그것들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형태가 없는 무형의 부분은 달라지지 않고 항상 동일한 것이다.


즉 사람의 형태와 형상이 있는 부분인 육체적인 몸은 항상 매번 달라지고 변화한다. 사실 사람의 몸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또한 사람의 몸의 세포는 매번 끊임없이 죽고 태어나며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의 형태와 형상이 있는 부분인 감정과 생각과 기억도 항상 매번 달라지고 변화한다. 즉 사람의 여러 정신적 감정들, 생각들, 기억을 역시 항상 달라지고 변화하는 것이다. 반면 사람의 그러한 형태가 있는 부분들을 담고있는 무형의 부분, 즉 비어있고 투명한 공간과도 같은 부분은 사람의 형태가 있는 부분들이 달라지는 와중에도 항상 달라지거나 변화하지 않고 동일한 것이다. 즉 사람의 몸이 달라지고, 사람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이 달라지는 도중에도 그것들을 담고 있는 형상이 없는 부분은 항상 달라지지 않고 동일한 것이다.


즉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러한 형태가 있는 부분이 아니라 그러한 형상이 있는 부분을 담고 있는 형태가 없는 부분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사람 자신의 형태와 형상이 있는 부분, 즉 사람 자신의 육체적인 몸과, 나아가 여러 감정과 생각과 기억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것이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형태가 없는 무형의 부분인 것이다. 즉 마치 비어있는 투명한 공간과도 같은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앞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과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은 관찰되는 대상인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고 이야기했다. 즉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인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담고있는 비어있는 투명한 공간이라는 내용은 어느정도는 비유적이고 부정확한 설명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비어있는 투명한 공간은 어느정도는 관찰되는 대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더욱 정확한 설명에 가까운것은 앞의 글에서 설명한대로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라는 것이다.




[6.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신의 물리적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2. 사람이 자신의 물리적 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걸 알면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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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적인 몸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피부와 근육과 장기 등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육체적인 몸이 곧 자기 자신이며, 따라서 그러한 몸이 죽으면 곧 자기 자신도 사라질 것이라고 여기기에,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과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에서 이야기했듯이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고 느끼고 관찰하는 또다른 관조자이자 관찰자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걸 자각하게 되면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국 자신의 몸이 죽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7.테세우스의 배의 역설 해결하기]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자신의 몸은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다.

2.따라서 자신의 몸이 변하고 달라지더라도 자기 자신은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일수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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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배를 계속해서 수리하면서 부분부분을 새로운 부품으로 대체하여, 결국 그 배의 모든 부분이 새로운 부품으로 대체되어 더이상 처음의 부분이 남아있지 않게 되면 그 배는 여전히 계속해서 처음의 배와 동일한 배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을 사람 자신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의 몸의 이런저런 부분들이 달라지고 교체된다면 그 사람은 그렇더라도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처음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물론 사람의 몸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다, 즉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또한 끊임없이 기존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뇌 마저도 끊임없이 기존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면서 변화하고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자기 자신은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이다. 즉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사람의 몸이 변하고 달라지더라도 자기 자신은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전의 글인[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과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에서 이야기했듯이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정한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면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을 해결할수 있다. 즉 자신의 몸은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자신의 몸이 달라지거나 변화하더라도 자신은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일수 있는것이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이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을 역설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몸이 달라지더라도 자신은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일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며, 자신의 몸이 달라지더라도 어떻게 자신은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일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은 자신이 아니다. 나아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들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다. 앞의 글에서 설명했듯이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몸이 달라지거나 변화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일수 있는것이다.












[8. 나는 나다]



나는 내 몸이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

나는 내 기억이 아니다.

나는 나다.


앞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그리고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에서 이야기한 대로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그저 관찰되는 대상들에 불과할 뿐 자기 자신이 아니다.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관조자인 자기 자신인 것이다.






[9. 시간, 공간, 자아]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 변화하는 시간, 공간, 자아와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시간, 공간, 자아가 있다.

2. 변화하는 시간, 공간, 자아는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에 적용되며, 변화하지 않는 시간, 공간, 자아는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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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다. 첫번째는 흘러가고 달라지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 시계의 시간이 흘러가고 달력의 날짜가 흘러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변화하지 않는 시간이다, 즉 그것은 영원히 현재에 고정되어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사실 영원히 현재에 존재한다, 즉 사람은 과거에 존재한적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미래로 나아갈수도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순간에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실 이런식으로 시간은 영원히 현재에 고정되어 있으며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공간이 있다. 첫번째는 움직이고 이동하고 달라지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지도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않는 공간이다, 즉 그것은 영원히 이곳에 고정되어 달라지지 않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공간을 이곳과 저곳으로 구분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사실 항상 이곳에 존재한다, 즉 사람은 저곳으로 나아갈수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저곳으로 나아가면, 이제 그곳은 저곳이 아니라 이곳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사실 이런식으로 공간은 영원히 이곳에 고정되어 있으며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는 두가지 종류의 자기 자신이 있다, 첫번째는 변화하고 달라지는 자기 자신이다, 사람의 육체적인 몸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달라진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끊임없이 기존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탄생한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 역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이다. 즉 이런식으로 자기 자신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자기 자신이다, 사실 앞에서 설명한것처럼 사람이 몸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달라지더라도, 그리고 감정과 생각과 기억이 계속해서 달라지고 변화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달라지지 않고 항상 계속해서 동일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앞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과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에서 설명했듯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자기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변화하거나 달라지는 자아는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변화하고 달라지는 시간과 공간이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반면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자아는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에는 변화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10. 사람은 처음부터 진정한 자기 자신이였다]



앞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그리고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에서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관찰되는 대상들이며 자기 자신이 아니고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고 이야기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영화를 보고있고 게임을 하고있는 사람이 영화속 주인공, 혹은 게임속 캐릭터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과도 같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이 자신이 아니라는걸 깨닫고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라는걸 깨닫는 것은 마치 사람이 영화속 주인공과 게임속 캐릭터는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은 그것들의 밖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는걸 깨닫는 것과도 같다.


즉 사실 사람이 영화속 주인공과 게임속 캐릭터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도중에도, 즉 사람이 자신은 그것들 밖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도, 사실 사람은 이미 그것들의 밖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였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와중에도 애초에 처음부터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관조자였던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11. 진정한 자신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 유(有)와 무(無)는 서로 반대되는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2.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 자신도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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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밤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예로 들면, 사실 검은 밤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와 아무런 불꽃놀이도 펼쳐지지 않는 검은 밤하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즉 불꽃놀이가 진행될때는 검은 밤하늘이 없다가, 불꽃놀이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검은 밤하늘이 등장하고 존재하게 되는것이 아니다. 사실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던 와중에도 그 밑바탕에서 검은 밤하늘은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물과 비어있는 공간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면, 사실 특정한 사물과 비어있는 공간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즉 특정한 사물이 있을때는 비어있는 공간이 없다가, 특정한 사물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어있는 공간이 나타나게 되는것이 아니다. 사실 특정한 사물이 존재하고 있던 와중에도 그것을 담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비어있는 공간은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와 고요함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면, 사실 특정한 소리와,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고요함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즉 특정한 소리가 있을때는 고요함이 없다가,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고요함이 나타나게 되는것이 아니다. 사실 소리가 존재하고 있던 와중에도 그 밑바탕에서 고요함은 항상 같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런식으로 사실 무언가가 있거나 존재한다는것을 나타내는 유(有)와 무언가가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나타내는 무(無)는 서로 반대되는것이 아니다. 즉 유(有)가 있을때는 무(無)가 없다가, 유(有)가 사라지고 나서야 무(無)가 등장하게 되는것이 아니다. 사실 유(有)가 존재하던 와중에도 그 밑바탕에서 무(無)는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의 글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과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한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즉 앞에서 유(有)와 무(無)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 것과 같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있을때는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진정한 자기 자신이 없다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진정한 자기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것이 아니다. 즉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과 그것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진정한 자기 자신은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는것이다.





[12. 근원과의 연결을 회복하기]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면 근원과의 연결이 단절되게 된다.

2. 사람이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인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자각하면 근원과의 연결이 다시 회복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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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들인 [2.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 과 [3.관찰대상에 대한 앎과 관찰자에 대한 앎]  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라고 여기면 자신의 근원과의 연결이 단절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근원과의 연결이 단절됨으로써 사람은 항상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결핍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것이다. 즉 항상 삶에서 본질적으로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느끼면서 삶을 살아가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걸 깨닫게 되면,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는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근원과 다시 연결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항상 깊고 근원적인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이다.





[13. 청소년기의 자아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기]

 

수많은 사람들이 청소년기에 문득 자아와 세상에 대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과 동시에 마음속 깊은곳에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결핍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앞의 글인 [12. 근원과의 연결을 회복하기] 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면 근원과의 연결이 단절되며 따라서 깊고 본질적인 공허감과 결핍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자각하면 그러한 근원과의 연결이 다시 회복되며 따라서 항상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충만감과 만족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되는것이다.


즉 그러한 청소년기의 자아와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그리고 그러한 질문과 함께 느껴지는 본질적인 결핍감과 공허감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여 자신의 근원과 단절되어 있음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달아서 자신의 근원과 다시 연결되면 그러한 질문과 공허감은 해결되는 것이다. 즉 항상 깊고 본질적인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이다.





[14. 물리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동기]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세가지이다.


1. 물리학의 근본적 동기는 근원과 다시 연결되려는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은 세계의 물리적 구성을 파악하면 근원과 다시 연결될수 있다고 여긴다.

2. 철학의 근본적 동기도 마찬가지로 근원과 다시 연결되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언어로 표현된 진리를 찾아내면 근원과 다시 연결될수 있다고 여긴다.

3. 그렇지만 그것들은 불가능한 시도이다. 즉 근원과 다시 연결되려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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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인 [12. 근원과의 연결을 회복하기] 에서 설명했듯이,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진정한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되면 근원과 단절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항상 깊고 본질적인 결핍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이자 관조자라는걸 깨달으면 근원과 다시 연결될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항상 깊고 근원적인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낄수 있게 되는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물리학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기술 혹은 공학과 연관되어 물리법칙을 연구하여 다양한 기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물리학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순수하게 세상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탐구하는 물리학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번째 물리학은 세상이 물리적으로 어떠한 입자와 힘과 법칙등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그러한 물리학은 세상이 물리적으로 태초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탐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물리학은 근원과의 단절로 인한 깊고 본질적인 결핍감과 공허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그러한 공허감에서 벗어나 다시 근원과 연결되어 깊고 본질적인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리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게된다면, 그리고 세상이 물리적으로 태초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게된다면 다시 근원과 연결되어 깊고 본질적인 충만감을 느낄수 있을것이라고 여기면서 세상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어로 표현되어있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진리를 찾아내고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 역시 사실 근원과의 단절로 인한 본질적인 공허감과 결핍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마찬가지로 그러한 본질적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하여, 즉 다시 근원과 연결되어 깊고 근원적인 충만감과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언어와 말과 글로 표현되어 있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진리를 밝혀내고 알게된다면 다시 근원과 연결되어 깊고 본질적인 충만감을 느낄수 있을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러한 언어로 표현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물리학과 철학의 시도는 모두 불가능한 추구이다. 즉 세상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게되거나, 언어로 표현되어있는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해서 근원과 다시 연결될수는 없는것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것과 같이 근원과 다시 연결되어서 깊고 본질적인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끼려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자기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는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15. 외적인 것들을 통한 만족에서 벗어나기]



이번 글의 주제는 다음의 두가지이다.



1.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이유는 근원과의 단절로 인한 공허감과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2. 그렇지만 그렇게 외적인 것들을 통한 만족으로는 진정한 만족에 도달할수 없으며, 진정한 만족에 도달하려면 근원과의 연결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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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인 [12. 근원과의 연결을 회복하기] 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면 자신의 근원과 단절되게 되며 그리하여 깊고 본질적인 결핍감과 공허감을 느끼면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걸 깨닫고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는걸 깨달으면 다시 자신의 근원과 연결되어 깊고 본질적인 만족감과 충만감을 느낄수 있게 되는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많은 돈, 많은 비싼 물건들, 높은 사회적 지위, 많은 인기 등등 그러한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즉 사람들은 항상 그러한 외적인 것들을 통해 만족을 느끼려고 하며, 그러한 외적인 것들을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해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근원과의 단절로 인해 느껴지는 깊고 본질적인 공허감과 결핍감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러한 결핍감과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외적인 것들을 통해 만족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욱 많은 외적인 것들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외적인 것들을 통한 만족으로는 결국 일시적으로 공허감과 결핍감을 잊거나 외면할수만 있을 뿐 그것을 진정으로 채울수는 없는것이다. 즉 외적인 것들을 통한 만족은 결국 일시적이고 얕은 거짓된 만족일 뿐 진정으로 깊고 본질적인 만족에는 이를수 없는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욱 많은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그런식으로 삶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진정으로 공허감과 결핍감을 채우고 진정한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근원과의 연결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자신의 몸, 감정, 생각, 기억은 자기 자신이 아니며 진정한 자기 자신은 그것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관찰자라는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