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보지 않으면 사람은 얼마든지 잔인한 짓을 하거나, 그 잔인함을 보고도 침묵할 수 있다.


예컨대 내 눈앞에서 막 도축된 돼지나 소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 감정 없이 고기를 집어 들지 못할 것이다. 피와 체온, 죽음의 순간을 직접 마주하면 ‘식재료’는 다시 ‘생명’으로 되돌아온다. 반대로 마트의 포장된 고기는 이미 모든 과정이 삭제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거기서 죽음도, 고통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할 수 있다.


이 논리는 노동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떤 사람의 하루 열두 시간 노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바로 내 앞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나는 그 결과물에 이전보다 더 많은 값을 지불할 용의가 생긴다. 그것은 도덕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노동이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고통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인식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배달 앱 속 라이더는 지도 위의 점으로만 존재하고, 콜센터 상담원은 이름 없는 음성으로만 남는다. 새벽 배송 물류센터에서 누군가 허리를 굽혀 상자를 옮긴다는 사실은 ‘내일 도착’이라는 문구 뒤로 숨겨진다. 소비자는 편리함만 경험하고, 그 편리함의 비용을 누가 어떻게 지불했는지는 보지 않는다.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드론 화면 속 표적은 ‘사람’이 아니라 ‘좌표’가 된다. 버튼 하나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사람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은 작전이 되고, 민간인 사망은 부수적 피해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만약 그 장면을 매번 눈앞에서 직접 보아야 했다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전쟁은 유지되기 어렵다.


기업 구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하청, 재하청, 외주라는 이름의 단계들은 책임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감정을 제거한다. 의사결정자는 사람을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을 절감’하고, 노동자는 얼굴 없는 시스템에 의해 잘린다. 서로를 직접 보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느끼지 않는다.


계층 분리 역시 우연이 아니다. 중산층은 빈곤층을 통계로만 보고, 엘리트는 실패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만 해석한다. 직접 만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삶은 쉽게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감은 공감을 사치로 만들고, 침묵을 중립으로 위장시킨다.


사람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먼저 느끼고, 그다음에 이유를 만든다. 따라서 인간성을 유지하려면 일정 수준의 불편함과 가시성이 필요하다. 직접 보고, 알게 되고, 마음에 걸리는 경험이 반복되어야만 우리는 스스로의 잔인함을 제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외주화하고, 자동화하고, 계층화하여 서로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는 단순히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감 능력을 지속적으로 마비시키는 장치다.

오늘날 사회가 점점 더 잔인해 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인간으로 인식할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잔인해진 것이 아니라, 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