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인간의 주관과 현실의 객관이 만나는 접점이다.
인간은 반드시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 죽도록 설계되었다.
그 인간은 고장이 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이며 가능한 수단이다.
문제 될 것은 없다.
층위에서만 존재한다면 그 욕구는 허상이나 다를바 없다고 볼 수 있다.
가치의 상품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능할 뿐이다.
경쟁 동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경쟁은 그가 처한 최후의 선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쟁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경쟁의 레이스에 자신을 내던질 이유가 없다.
반드시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결말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모든 인간이 먹고 사는 것을 생존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인간이 사회에 소속되는 순간, 그 사회와 조직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자신의 정체성과 명예, 시선 등이
그의 사회적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은 듯 싶다.
즉, 사회에서의 자신의 상대적 지위를 자신의 생존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인 듯 하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볼때 상대적으로 평가되는 나의 지위는
나 자신이 용납하는 자존심의 수준 보다 훨씬 낮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직면하여 다른 이들 앞에 나를 패배자와 낙오자로 노출시키는
것은, 마치 내 치부를 남들 앞에서 드러내어 전시하는 듯한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즉, 사회적 참여가 나에겐 죽음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내 사회적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선택 대신에, 생존의 기준을 사회적 생명이 아닌 먹고 사는 것으로
이동시켰다. 이는 즐거움의 기준 또한 사회적 층위에서, 생리적 층위로
이동했음을 의미했다. 사회적 인격을 포기한 것이다.
나는 사회적 인격이 본성적으로 싫었던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다만, 형성되는 사회적 인격의 표상과 내 주관의 실체의 간극에서 오는
위화감과 그 허무함이 존재했던 것은 맞다.
내가 대학을 그만 두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사회적 인격을 위한
삶에 기투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역시 있다. 물론, 사회적 인격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그 열망이 대단했고
사실, 그 레이스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
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불만족이 나를 포기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나는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살아보고 싶었다.
그 사회적 인격과 층위의 기준에서 이탈해서, 생리욕구보다 훨씬
숭고하고 거룩한 층위의 가치를 위해 기투하는 자로서의 직업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거룩한 층위의 가치, 즉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이며 선험적인 존재의 층위는 나의 생존 욕구와 유리된 것이었다.
생리적 욕구와 사회적 욕구는 나에게 그 결핍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직결되는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한
그 초월적 가치라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과는 단절된 것이었다.
인간이 진실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솔직한
욕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런데 내가 직업으로 삼길 바란 그 숭고한 삶의 양상이라는 것은
진실됨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가치는
내게 죽음의 공포, 생존 욕구와 직결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의 정체성과 유리되어 있는 층위의 허위의식과 다름
없던 것이다.
이는 그 가치 자체가 허위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여
그것이 직업이 되는 삶을 추구하는 나의 의식이, 실제로 나를
작동하는 실존적 원리와 모순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의 나 자신
자체가 허위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분명히 그 초월적 가치가
자신의 생존 여부와 직결되는 듯, 동일한 듯이 일체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극소수지만 존재한다. 이들은 상술한 생리 욕구나,
사회적 욕구, 혹은 맥락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일환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인가? 혹은 실제로 그 가치에 자신의 생존
욕구가 동화되어 있는 자들인가? 태생적으로 생존 욕구를 초월적
층위에 두고 있는 자들인가? 후천적으로 바뀐 것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하시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며, 끊임 없이 악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선택할 것은 무엇인가?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생리 층위와 사회 층위에 종속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복음과 결부시켜 낼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하다면 완전 성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성경을 볼 이유도, 이 땅에서 죄인 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의지할 이유도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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