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으로 죽음이란 경험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으로 형용할 수 없는,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의 개념은 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원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범주에 가깝다고 설명하는 것이 옳은 답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그 이유로는 12가지 범주에 속할 수 없고, 충분근거율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는 진리로서 받아들이기에 큰 무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유혹과 공포심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칸트의 물자체의 이론으로 하여금 이를 비춰 보았을 때, 이는 우리가 인식 할 수 없고,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여 이를 표상으로서 받아드리는 수 밖에 없으나, 애초에 물자체라는 단어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형용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죽음‘이란 본능적 공포와 일부 사람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 되는 근본적 이유는 무(無)의 상태의 귀환 공포(본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죽음은 내가 없었던 상태로의 회귀 공포 혹은 본능이라고 설명 가능하다. 없어지고 싶지 않은 내 의지(Wille)의 발현이며 맹목적인 삶의 표상적 일부라고 말 할 수 있고, 이를 원하는 것은 의지로서 형용할 수 없다.
즉, 자의식(맹목적이지 않은) 의지의 발현이다. 이는 곧,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개념과 칸트의 ‘물자체‘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결국 형이상학을 추구한 나머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못한 비극적 천재들이다.
이는 곧, 의지의 모순을 나타내는 비극의 신호탄이다. 염세주의란 쇼펜하우어를 논하기엔 너무나도 과대적으로 해석한 ‘가짜’에게 주어진 칭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한 명제임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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