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이 없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자기 주장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말하는 바의 논리적 귀결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여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문화마다 기준이 다르다”, “누가 함부로 선악을 단정할 수 있느냐” 같은 말에서 출발한다.
얼핏 보면 겸손하고 열린 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입장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그것은 관용이나 유연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판단 불능, 자기모순, 그리고 도덕 개념 자체의 붕괴로 이어진다.
도덕적 상대주의의 핵심 명제는 결국 이런 것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은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 문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즉 어떤 행위가 본질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주장을 조금만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곧바로 치명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만약 도덕이 전적으로 상대적이라면, 비열함과 잔혹함도 절대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된다.
기만, 배신, 학대, 착취, 폭력 역시 어떤 개인이나 집단 내부에서 정당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을 바깥에서 틀렸다고 말할 근거가 사라진다.
상대주의자는 흔히 극단적 사례가 나오면 슬그머니 물러서지만, 그건 본인 이론이 틀렸다는 반증일 뿐이다.
정말 상대주의를 믿는다면 그는 학살도, 고문도, 노예제도도, 약자 착취도, 게시판 도배와 부모 욕설도 원칙적으로는
“그들 기준에서는 맞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불쾌감이나 직관적 반발을 느낀다면, 그는 자기 입장을 준수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미 어떤 보편적 도덕 직관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상대주의는 흔히 독단을 피하기 위한 입장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악을 판단할 언어 자체를 해체해 버린다.
선악을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남는 것은 힘의 차이와 취향의 차이뿐이다. 그때부터 도덕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세력의 문제가 된다.
누가 더 강한가,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가, 누가 제도를 장악하는가만 남는다. 다시 말해 상대주의는 독단을 막는 것이 아니라,
더 노골적인 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된다. 선악의 언어를 지우면 가장 이득을 보는 쪽은 언제나 선이 아니라 악이다.
더 큰 문제는 도덕적 상대주의가 자기 자신도 지탱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대주의자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기준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이미 보편적 도덕 명제다.
모든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보편 규범을 슬쩍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한편으로는 보편 도덕은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용과 비강요라는 특정 도덕 원칙만큼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한 자기모순이다.
같은 식으로 “도덕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도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정말 도덕에는 정답이 없다면, “도덕에는 정답이 있다”는 주장 역시 하나의 동등한 입장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주의자는 대개 그것을 틀렸다고 본다. 이미 자기 이론을 예외적 진리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척하면서, 자기 주장만은 특권적으로 참인 것처럼 취급하는 구조로 흘러간다.
이것은 회의주의의 탈을 쓴 독단에 가깝다.
또한 상대주의는 도덕 비판의 기반을 스스로 없애 버린다.
예를 들어 어떤 사회가 아동 학대, 신분 차별, 장애인 차별, 약자 착취, 게시판 도배와 부모 욕설을 당연한 문화라고 여긴다고 해보자.
상대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외부인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 “그건 우리 기준에서 보기엔 문제지만, 그들 문화에서는 정당할 수 있다”는 말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실상 비판이 아니라 방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악 앞에서 도덕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상대주의가 관용처럼 들리는 이유는 그 대가를 타인이 치를 때만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의 또 다른 자멸 지점은 도덕 개혁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제 폐지, 인권 사상, 아동 노동 금지, 고문 금지, 동물 학대 금지법 같은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히 기준이 바뀐 것뿐이라면, “진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단지 취향이 달라졌다고만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은 어떤 변화들을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개선으로 여긴다. 왜 그런가.
인간은 이미 어떤 보편적 기준, 즉 고통을 느낄줄 알고 의식을 보유한 생명체를 덜 파괴하고 더 존중하는 방향이 더 낫다는 기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주의는 이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도덕적 상대주의는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갈 용기가 없는 반쯤 미완성된 주장이다.
사람들은 상대주의를 말할 때는 대체로 추상적인 수준에서 말한다.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문화는 다양하다”, “절대적 기준은 위험하다.” 여기까지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 논리를 실제 현실의 악에 적용하는 순간, 대부분 멈칫한다. 왜냐하면 본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단순히 다름이 아니라 잘못이라는 것을. 어떤 것은 관점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악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상대주의는 무너진다.
현실의 악 앞에서 작동하지 못하는 이론은 사변에 불과한 실패한 도덕 이론이다.
도덕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사실 자신의 언행이 선악 기준으로 판단되는게 싫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판단을 유예하는 것이 곧 성숙은 아니다. 모든 것을 회색으로 만드는 것이 곧 깊이도 아니다.
오히려 선악의 경계를 명확히 보지 못하는 의식이야말로 악에게 가장 취약하다. 악은 언제나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 “다 각자의 사정이 있다”, “그것도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이런 말들이 쌓일수록 악은 더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자신을 악이라고 부를 입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오판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오판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판단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과학에서 오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진리 탐구를 포기하지 않듯,
도덕에서도 완벽한 무오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해서 선악 구분 자체를 해체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더 엄밀한 판단이다.
더 신중하고 더 깊고 더 정확한 도덕 판단이지, 판단 불능이 아니다.
요컨대 도덕적 상대주의는 겸손한 철학이 아니라 자기부정적 철학이다.
그것은 악을 비판할 언어를 잃게 만들고, 도덕적 개혁의 의미를 지워 버리며, 결국 자기 주장조차 보편적으로 방어하지 못하는 모순으로 빠진다.
상대주의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남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공허다.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고, 오직 힘과 취향과 관점만 남는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짓밟히는 것은 늘 약자이며 가장 먼저 웃는 것은 늘 악이다.
그래서 도덕적 상대주의는 지적인 세련됨의 징표가 아니라 끝까지 생각해 보지 않은 반쯤 무너진 주장인 경우가 많다.
그 논리를 정말 끝까지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어떤 비열함과 잔혹함도 원칙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상대주의는 폐기된 것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관용으로 시작하는 척하지만 모순으로 끝난다.
유연함을 말하는 척하지만 판단 불능으로 무너진다.
독단을 피하는 척하지만 결국 악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
선악의 경계를 흐리는 사유는 끝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한다.
상대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남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자멸이다.
개추
명글이다 ㄷㄷ
예전부터 느끼지만 이사람 글 진짜 잘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