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전공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해당 분야에  미래지향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니 발전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섬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표면만 응시한 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겠죠.

융통성 없는 교과목과 다수론적인 분위기 사회 위치 우세론 등 틀에 박힌 의견만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전공자들은 전문가가 아닙니다. 제대로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들에게 묻지 말고 학회에 참석하거나 논문을 검토해보거나 대학 기관의 교수들과 연락을 취하는 게 훨씬 적절하다고 사료됩니다.

단지 학업을 마쳤다고 또는 학업 중에 있다고 해서 전문가로서 인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그러한 인간군상들이 어떤 부류들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처음이겠지만, 저는 그들을 백명도 넘게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다른 영역에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과목에 대해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경향도 있구요.

저 같은 경우는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관점으로 해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리학이라는 건 말 그대로 학문적인 접근으로 다뤄져야 하는 것이지 일반 지식 표현의 수준에 그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죠. 

그 흐름을 제대로 이해해야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학교의 교육적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해서 그런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명제의 명석한 지각이 있는 경우와 

그것이 전적으로 참임을 확신할 수 있는 옳은 근거를 

실제로 확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유보할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알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반성과 숙고 없이 어떠한 학문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때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새롭게 규정되기 마련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시대나 유래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방식도 다릅니다.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식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물음, 역사적 물음 , 사실적 물음 , 운명적물음,

더 나아가 현 존재의 역사적물음, 

그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전체적 

근원적 의미와 관계할 때에는 그 물음의 역사적 유래를 통해서 

역사적 미래속에서 방향을 찾아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길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죠.

과학은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것에 가까워야 하고 현상에 대해 

어떤 통찰을 갖고 있을 때에만

분명히 답할 수 있는 것이죠.

전공 영역을 배우는 과학 초년생인 사람들은 장식으로 치장하는 허세를 가지고 있는데,

또 하나에서 열까지 법칙적으로만 판단하는 옹졸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은 정신체계를 바탕으로 기본적인 지혜의 영역에 속하기도 하는데요.

물론 과학이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가를 

경험할 때 '과학'에서 그것은 무엇인가?를 가려내고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 있는 것이죠.

언어에 대해 통상적인 생각들은 기묘한 변화를 겪기 때문에 

변화에 따라 언어는 표현의 수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분명 언어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는 각별한 상응으로써 

'무엇인가'라는 것을 결코 참되게 알 수 없기도 합니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못한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용어 사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기 전에, 

자신이 쓰는 문장이 올바르고 적절히 표현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코칭을 해주는 방법도 괜찮구요. 

그런데 그렇게는 못할 것입니다. 

대개 그런 분들은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나 통찰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지함과 왜곡이 섞여 있는 경우 쓸데없이 포장을 하는 경우도 많죠.

사용하는 문장만 봐도 압니다. 

어떤 문장을 설명하거나 표현하는 데 있어서 특정 언어 기호가 외부 대상과 연관되려 할 때, 

모국어와 외래어를 동시에 섞어서 애매한 표현을 만드는 경우가 많죠.

그렇게 사용하는 언어 표현 방식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는지 저로서는 한숨만 나오더군요.

자의적 언어란 ‘소크라테스의 사진을 보며 플라톤이라고 가리키는 언어’를 말하며,

보편적 언어란 ‘소크라테스의 사진을 보며 소크라테스라고 말하는 언어’를 말하며,

객관적 언어란 ‘소크라테스의 사진을 보며 소크라테스의 사진이라고 말하는 언어’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객관적 언어와 창의성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 않느냐?"란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답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낮의 태양을 보며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자의적 언어 보다는,

‘대낮의 태양을 보며 태양은 움직인다’라고 말하는 보편적 언어가 더욱 강력해 천동설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대낮의 태양을 보며 태양은 움직인다’라고 말하는 보편적 언어 보다

‘대낮의 태양을 보며 태양은 위치를 바꾼다’라고 말하는 객관적 언어가 훨씬

정확해 태양이 지구 주위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움직임으로써 태양의 위치가 변한다는 디오니소스적이며 창의적인 관점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되지요.

즉, 태양이 움직인다의 원인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위치가 변하는 원인을 찾는다는 관점에서

지동설이라는 정확한 관점의 전환에 착각 없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대의 모든 객관적인 학문들은 ‘까봐야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면밀하게 늘어놓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전 처럼 강물을 ‘강물’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강물의 양자 단위 하나하나 까지 모두 세어가며 강물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그린다는 거죠.

이건 인간의 게놈 지도를 그리는 것.

두뇌 생물학 등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마음이나 자아라는 말로 퉁치지 않습니다.

시냅스와 뉴런 간의 상호 작용을 낱낱히 파헤치죠.

아폴론적이라는 건 외부의 기만이 내부를 향하는 것을 의미하고,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건 솔직함이 외부를 향해 뻗는 학대를 의미합니다.

객관의 토대로써 외부의 기만이 아닌 내부의 솔직함으로써

외부를 학대하고 그로 인해 외부가 깨어짐으로써 어떤 관점으로 환원되지 않은 객체만이 남게 되죠.

디오니소스적인 내부의 솔직함이 외부의 기만을 학대하고

깨어버림으로써 ‘태양이 움직인다’ 라는 외부의 기만적인 말로 환원되지 않은

태양 그 자체와 위치의 변경 그 자체만이 남게 되는 거죠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 그 자체만 객관적으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는 관점의 전환 즉 창의적인 결과로써 지동설을 얻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의 관점에서도 그러한 언어 표현을 쓰는 것이 훨씬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자의적 언어를 쓰는 이들의 단독 개체로써의 힘보다,

보편적 이들 여럿이 뭉쳐진 힘이 더욱 강력하고 보편적 이들 여럿이 뭉쳐진 힘보다

기관총 한 대의 힘 원자 폭탄 하나의 힘 님들 수 백 명이 모인 것 보다 사진 증거 동영상 증거 하나의 힘

여기 있는 수 백 명의 경제력 보다 조지 소로스의 경제적인 힘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이데아나 산파술도 니가 의식하지 못하게 

힘을 가짐 무슨 힘? 이데아 덕분에 모두가 합의하는 정의된 용어를 쓰지 않나?

그 의사소통이 개별자로 있을 때 겪게 되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됩니다.

해당 철학을 라이프 스타일로 가져왔을 때 갖게 되는 튜링의 종료 문제 증명과 같음 모든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 따지면 종료 문제 증명은 맞지만

사실 이런 인공지능 체계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 따지는 게 아닙니다.

즉 모든 논리라는 영역으로 적용시킨다면 논리 체계는 

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논리 체계가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작곡가는 모든 음들을 전부 고려하는 게 아님 묘사가 가능한 유의미한 음들을 작곡하는 것이고,

그 경우에 앞선 철학자의 미학적 판단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앨런 튜링의 종료 문제 증명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는 것이기에,

유의미한 체계의 경우 앨런 튜링의 종료 문제 증명은 극복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앨런 튜링의 종료 문제 증명이 틀렸나, NO

앨런 튜링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는

증명을 한 것이므로 틀리지 않음 너 이해 안될 거 같은데

종료 문제 증명 때문에 카톡이란 거 자체는 돌아갈 수 없는 거 아닌가? NO

카톡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걸 극복하니까 카톡 말고도

아이폰 MS 등등 전부 그런 유의미한 체계를 짜서 극복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