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많은 기독교인들은(특히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은) 베드로를 계속 존경하고 싶어 하며,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도 베드로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삶과 사명에 대해, 실제의 이야기가 알려진다면, 이렇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러면, 베드로가 자신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고 예수가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에 적혀 있는 문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내 대답은 이 문구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은 예수의 의도와 실제로 일어났었던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더 깊은 목적을 밝혀줄 몇 가지의 중요한 세부적인 사항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는 결코 오직 특정한 상황이나,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뭔가를 행하거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행했거나, 말했던 모든 것들은 다소 넓고, 보다 더 보편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각각의 제자들은 특정한 의식 수준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에게 반응할 수 있었던 가장 낮은 의식 수준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그 자신은 예수가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살펴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는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베드로와 관련하여 행하거나, 말했던 모든 것들은 정말로 그러한 의식 수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특정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낮은 모든 의식을 초월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필요한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제공해주는 거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물으려고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초기 추종자가 되는데 무엇이 필요했을까요?”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나보았으며, 만약 그들은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자신들은 당연히 예수를 알아보고, 따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를 배척했던 기타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예수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을 거라고 내가 말하면, 그들은 대개 화를 냅니다. 현재의 공식적인 기독교가 당시의 유대교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종교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현 시대의 기독교인들도 갇혀 있는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이 이끄는 종교는 절대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교리를 벗어나, 그 바깥을 살펴보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가 특별한 뭔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볼 있도록 소위 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다시 말해, 다리를 저는 사람을 다시 걷게 하거나,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물리적으로 체험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를 실제로 따랐습니다. 예수를 인식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 간에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현대의 용어로 “직관”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인류는 이원성으로 내려감으로써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원성 너머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원성 의식은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된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외적인 마음, 즉 분석적인 마음으로는, 이원성을 뛰어넘어 그 너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분석적인 마음은 반대되는 관점을 얼마든지 추론할 수가 있으며, 이 말은 최종적인 주장(final argument)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최종적인 주장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러한 이유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유물론과 마찰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적, 정치적, 유물론적인 이론들이 최종적인 주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추락한 존재들이 하나의 상대적인 관점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데 뛰어난 재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까요? 사람들이 의심해서는 안 되거나, 의심할 수도 없는 어떠한 기본적인 상황들이 존재한다고 정의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들은 자명하거나, 절대적인 권위를 (종교적인 경전, 정치적인 필요, 혹은 자연의 법칙에 기초하여) 갖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이것이 최종적인 진실처럼 보이지만, 많은 의문들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최종적인” 진실을 뛰어넘을 때까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은 분석적인 사고(思考)에 근거해서, 알아보았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직관을 따르고, 가슴을 따랐었기 때문입니다. 이원성으로 인해, 우리의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안전 메커니즘이 주어졌으며, 이 말은 이원성으로 인해, 우리가 완전하게 눈이 멀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안전 메커니즘이란 바로 뭔가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적인 진동을 읽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관이라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에너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보다 진동이 높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시점까지 계속해서 읽고 있는 이유는 이 책이 직관적인 느낌을, 즉 가치 있는 뭔가가 존재한다고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가슴 차크라에(흉부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관심을 집중하면, 특정한 상황, 혹은 개념이 느낌을 가라앉히는지, 아니면 느낌을 고조시키는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간단한 형태의 직관이며,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직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동을 읽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개념이 타당한지 여부를 이성적인 주장과 분석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결코 상실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부정하고 가릴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했던 사람들의 최고의 사례가 바로 추락한 존재들입니다. 루시퍼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관을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처음에 추락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추락한 의식 속에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의 직관은 루시퍼가 살았던 원래 구체에서 자기초월을 거부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시퍼에게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의 직관은 이러한 사실을 여기 지구에서도 말해줄 수 있었지만, 루시퍼는 그러한 직관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아주 깊은 곳에 묻어놓았습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의식적인 직관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이원성을 벗어난 진동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추락한 존재들은 뭔가에 대해, 비록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 하더라도 (혹은 반대되는 합리적인 주장이 있다 하더라고), 이들은 뭔가가 타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추락한 존재들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직관적인 재능들을 불신하고, 부정하며, 묻어버리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해왔습니다. 추락한 존재들이 정말로 원치 않는 것은 사람들이 직관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좋은 직관력을 지니고 있다면, 사람들이 이원론적인 주장 혹은 이원론적인 사고체계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추락한 존재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거부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개념이 “올바르게 진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유물론과 공식적인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추락한 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자들이 이 말(직관력을 통해, 진동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조롱하는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더 깊은 진실은 여러분의 존재가 설계될 때, 의식하는 자아(Conscious You)가 하위의 4개 몸체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추가됨으로써, 아이앰 현존(I AM Presence) 혹은 상승 마스터들로부터 내려오는 진동이나, 자극을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조 틀을 갖게 될 때, 가슴 차크라는 이러한 참조 틀을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개념이든, 그 개념이 지니고 있는 진동과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 개념이 아이앰 현존(I AM Presence)으로부터 내려오는 자극보다, 더 낮은 수준에서 진동하는지, 아닌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개념이 낮은 수준에서 진동한다면, “덴마크에 썩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내적인 안내를 불신하도록 만듦으로써, 사람들이 단지 외적인 권위, 혹은 적어도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그리고 선형적인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여러분의 직관적인 자극(prompting)을 결코 통제할 수가 없으며, 이들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외적인 권위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들이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모든 외적인 권위들 하나하나를). 또한 추락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여러분의 이성적인 마음을 앞지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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