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선에서 2마일 남쪽에 위치한 큰 섬인 백령도는 황해도 최서남단으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져 있다. 대청도, 소청도, 그리고 백령도의 세 섬이 이루는 군도 중에서 백령도는 가장 크고, 최북단의 섬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백령도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섬을 점거했다. 1950년 7월 첫째 주 UN군 함정이 서해안에 도착함으로써 북한이 탈취된 섬을 활용하는 것은 저지되었지만, UN군은 10월 초 클라크 대위의 비정규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섬을 탈환하지는 않았다. 12월 초, 육지의 피난민들이 해안의 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령도는 한국 해군의 통제 하에 주요 피난민 중심지가 되었다. 피난민과 함께, 의용군(유격대) 병사들도 도착했다.
버크 소령과 해군 첩보대의 문기섭 소령은 무기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황해도 남서부와 서해안 군도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무기 수송대와 함께했다. 무기와 탄약은 육지의 의용병들을 돕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으므로, 버크는 섬의 방어를 목적으로 무기를 백령도의 유격대에게 넘겼다.
다 비슷한 내용이다. 서해는 해군/해병대가 8240과 관련이 깊다. - dc App
시끄럽고 41중대는 51년 3월 28일에 서북도서로 왔다 저기 클라크 대위 보이지? 인천 팔미도 원산공작의 클라크 맞다 니 방식대로 따지면 8240은 모든 UN군 한국 육해공 관련이 깊다 해병대 장교도 육군에서 훈련시켰으니 육군이 제일 관련이 깊네 그쵸? 이제 자라 되도 안한거 자꾸 들고오지 말고
자라
41중대 이야기 아니다. 41중대와 백령도 기지 해군 해병대는 다르다. 그리고 41중대 이야기가 나와서 한다면 미 특수전사에서 레드윙은 50년 말 창설이다. 중요한 건 서해쪽 8240에는 해군/해병대가 모집, 운용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 - dc App
@특갤러1(118.235) 해병 중대는 1951년 4월 23일 백령도에 상륙하여 이 섬의 군사시설을 방호하기 위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1951년 1월 17일 해군 함정 제704정에서는 백령도 등지에 있는 청년들의 훈련 을 위해 해군 본부로 10명의 해병대 장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은 대원들은 백령도를 비롯한 도서경비와 북한지역으로 침투작전을 전개했다. - dc App
미 8군 유격사령부 창설후에도 해병대의 교육은 이어졌다. 유격사령부에서는 미군과 백령도 주둔 한국군 해병대의 부사관들을 비롯한 국 군의 지원을 받아 유격대 간부들에게 정보, 무전기 조작 및 정비, 개인화기, 전 투집단 편성, 보급 및 공수 낙하, 파괴 등에 관해 훈련을 실시하였다. 백령도 작전기지사령부는 유격부대의 편성 초기에 각 부대 간부들에 대한 훈련을 실시 했다. - dc App
@글쓴 특갤러(106.101) 1951년 1월 16일 육군정보장교 김종벽대위가 이끄는 연풍부대가 해군703호 협조아래 월사리 전투에서 많은 수의 적사살 무기 노획 포로를 생포하였다 이제 자라 되도 안한거 그만 가져오고
네가 적은 건 창설 과정에서의 내용이다. 미8군 유격사령부 창설 배경 미군 당국이 유격대 활동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 해군이 서해안 도서에서 공산군에 대항하는 유격대 활동을 알리고, 탄약지원을 요청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51년 1월 8일 한국 해군 95.7기동전대장은 해주와 사리원 등 황해도 서쪽으로 후퇴해 온 약 1만 명의 의용군이 일제 99식과 38식 소총․소련제 소총․약간의 카빈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일 제와 소련제 무기의 탄약 보급이 가능하는 지를 미 제8군사령관에게 문의해 왔 다. 이 무렵 미군은 동부지역에도 원산과 전선 사이에 소규모의 유격대가 존재 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 dc App
당시 동․서해안에는 해군 제61함, 301․302 ․306․518정 등과 미군 구축함 등 유엔함대가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안을 경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격대에 대한 함포와 함재기 지원과 공군 지원이 가능했 다. 또한 해군 소속 해병대 병력이 백령도, 교동도, 원산 영흥만 여도, 신도 등 주요 도서를 장악한 상황 역시 북한지역에 대한 유격전을 안정적으로 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 dc App
1951년 1월 중순 맥기 대령은 극동군사령부로부터 게릴라부대의 편성, 지원, 통제권을 승인받았다.16)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게릴라 작전에서 공군과 해군의 지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극동군사령부로부터 해군과 공군 지원을 승인받아 유격대원의 지원을 위한 무기와 탄약은 미 제8군으로부터, 통 신과 기동력은 미 해군과 한국 해군으로부터, 유격대원들의 식량은 유엔 민간원 조위원회(UN Civil Assistance Commission)으로부터 확보하여 2주만에 지원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미군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민간인 유격대가 조직되었다 - dc App
1. 통제기구 가. 사령부 미 제8군사령부는 서해안 지역의 반공무장대를 적지 내륙으로 침투시켜 유격 전을 전개할 계획아래, 1951년 1월 중순에 서해안 유격군사령부 윌리암 에이블 기지(William Able Base)를 창설하였다. 유격대에 대한 통제는 처음에 미 제8군에 서 담당했다가 미 극동군사령부로 이관되었다. - dc App
교육훈련 서해도서로 피난 나왔던 청년들은 고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를 갈망 했지만 게릴라전을 잘 몰랐다. 유격대원들은 군사훈련다운 훈련이나 교육을 받 아보지 못했다. 실전을 통해 대원들의 희생을 치뤄가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던 것이 현실이었다. 유격사령부에서는 미군과 백령도 주둔 한국군 해병대의 부사관들을 비롯한 국 군의 지원을 받아 유격대 간부들에게 정보, 무전기 조작 및 정비, 개인화기, 전 투집단 편성, 보급 및 공수 낙하, 파괴 등에 관해 훈련을 실시하였다. 백령도 작전기지사령부는 유격부대의 편성 초기에 각 부대 간부들에 대한 훈련을 실시 했다. (창설후, 서해 레오파드에서 실시한 교육훈련이다) - dc App
초기 윌리암 에이블이 레오파드가 되고 레오파드 밑에 동키가 있다.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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