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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31편  32편 33편









북받치는 서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병원 앞에서 쪼그려 앉아 울다가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눈물을 훔치는데 대체 어딜 가야할지 모르겠어.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로 걷다가 집에 가긴 싫어서 눈에 보인 카페 안으로 들어갔어. 근데 메뉴판 앞에 서서 메뉴를 고르는데도 망설여졌지. 이제 홀몸이 아니니까. 예전처럼 달달한 음료 같은 거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초코시럽 담뿍 들어간 모카라떼에서 눈을 돌린 후거는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차 종류, 그것도 따뜻한 차를 시키고 우울한 얼굴로 자리를 잡았지. 앉자마자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어. 곽건화. 받고 싶지 않아서 아예 통화를 종료시키자,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와. 끈질기긴. 휴대폰 알람을 무음으로 바꿔버리고 폰을 뒤집어놨어. 그래도 마음이 안 풀려서 손에 얼굴 파묻고 숨만 꼴깍꼴깍 쉬다 알바생이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따뜻한 차를 가져오는데 마시기 전부터 한숨이 튀어나와. 아직 날씨 따뜻한데 이 날씨에 따뜻한 차라니. 뚜껑을 열어 따뜻한 김을 좀 빼고 한 모금 하는데도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데어 버렸어.


알바생 너무해. 나쁘다. 어떻게 이렇게 뜨겁게 만들 수가 있어..?


뜨거운 차가 뜨거운 것에도 우울하고 속상한 나머지 감정을 주체 못해 눈물이 퐁퐁 솟아나. 쳐진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후거는 벌써부터 서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꼬집었지.


이제 임신했으니까 열 달 동안 이 맛없고 혀 아프게 만드는 뜨거운 차나 먹어야하고.. 이제 곽건화가 과자는 절대로 못 먹게 할 거야. 아이스크림도 못 먹게 하고... 나중에 배 나오면 예쁜 옷도 못 입고.. 진위가 배 나왔다고 놀릴 거고.. 학교도 못 다니고... 곽건화 개자식이 나 임신했다고 싫어하는 거 봐. 이제 전화도 안 오잖아!


본인이 진동소리도 듣기 싫다고 무음으로 바꿔서 뒤집어놓곤 진동 소리가 안 들리니 전화도 안 한다고 또, 또 우울하고 기분 나빠졌어. 이래서 사람은 얼굴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아니다. 얼굴로 판단하는 건가? 곽건화 얼굴 값하는 거 봐. 잘생겼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개자식.. 나쁜 놈... 네가 안에 쌌지 내가 안에 쌌냐? 어떻게 반응이 ‘아.’ 이거 하나가 다 일 수가 있어? 어? 너무해. 나쁜 놈... 이런 인간 믿고 어떻게 평생을 살아! 생각할수록 더 화나고 서러워서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 머리를 박고 잉잉 우는데 휴대폰의 램프가 깜빡 깜빡였지. 후거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안보였겠지만.


“후거?”


처음에는 너무 화나서 곽건화의 환청을 듣는 줄 알았어. 그래서 무시했지. 속으로 계속 나쁜 놈, 나중에 못생겨지면 구박할거야. 등의 초등학생도 안 할 욕을 하며 혼자 꽁하게 속앓이를 하는데, 환청이 다시 들렸어.


“후거.”


뭐야. 짜증스럽게 고개를 번쩍 들자마자 후거의 테이블 바로 앞에 건화가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어. 뭐야아. 눈물을 눈꼬리에 매단채로 후거가 입술을 벌렸어.


“전화 왜 안 받아?”

“몰라. 저리 가.”

“울었어?”


짜증나 죽겠는데 왜 친한 척이야? 우리가 그렇게 친해? 이제 아주 막 나가는데, 다행히 난생처음 건화와 통화했을 때 말했던 것과 달리 준법정신과 예의가 투철한 후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않고 여전히 마음속으로 혼자 막나갔어.

건화는 후거가 고개를 팩 돌리고 삐진 티를 내도 옆에 앉아 후거의 턱부터 잡아당겼지. 눈가와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게 누가 봐도 막 울고 있던 얼굴이야.


“만지지 마.”


옆에 앉지도 마. 내 이름도 부르지 마. 중얼중얼 싫고 하지 말라는 말만 내뱉는데도 건화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조금 충혈 된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물었어.


“아까 나 때문에 많이 화났지?”

“화 안 났어. 말 안 할 거야.”

“화 안 났는데 왜 말을 안 해? 그 때 너무 놀라서 그랬어. 속상했지? 미안해.”

“몰라. 다 필요 없어. 아빠 없이 혼자 키우지 뭐.”

“아빠가 여기 멀쩡히 있는데 왜 아빠 없이 키워. 무슨 그런 말을 해.”


후거가 화를 내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또 아빠 없이 키우겠다는 말은 곽건화의 심장을 아래로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말이라 싫었어. 하지만 혼자 키우겠다며 굵은 눈물을 아래로 뚝, 뚝 떨어뜨리는데 그것 또한 건화의 심장을 쥐어짜는 일이지. 하긴 뭐 후거의 행동 중에 건화의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게 뭐가 있을까. 웃으면 예뻐서 심장이 고생하고, 안을 땐 너무 섹시해서 심장이 힘들고...


“내가 잘못했어. 임신했단 말에 너무 놀라고 자학 하느라 그랬어.”

“자학을 왜 해.”

“너 임신 시켰으니까.”

“맞아. 아저씨가 쌌잖아.”

“쌌...”


적나라하게 튀어나온 단어에 짧게 숨을 삼킨 그는 헛기침을 하다 후거의 어깨를 안아 달랬지. 화 많이 났어? 왜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어버려.


“내가 그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저씨는 몰라.”

“미안해. 나도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임신인 건 언제 알았어? 오늘 아침에 알았어?”

“..어제 갑자기 생선 냄새에 헛구역질 나서.. 막.. 테스트기로 쟀는데 두 줄 나와서..”


말이 이어질수록 소리는 작아지고, 두 줄 이야기부턴 거의 들리지도 않았어.


“말을 하지. 어제 혼자 계단 앞에 서서 가만히 있던 거랑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게 그거 때문이야? 왜 혼자 삭히고 있었어..”

“몰라. 다 몰라. 무섭단 말이야..!”


조금 전부터 다시 터질 기미가 보이더니, 결국 완전히 울음이 터진 후거가 건화의 어깨에 눈을 대곤 펑펑 울기 시작했어. 나름대로 후거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고르고 골랐는데, 그마저도 상처가 됐을까 걸려. 어깨춤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한숨을 터뜨린 건화가 후거의 등을 쓰다듬었어.


내가 병신새끼에 머저리지. 피임한다고 신경 쓰긴 했지만 역시나 100% 완벽한 피임은 없으니까. 후거가 반대했어도 그 때 정관수술을 했어야 했어.


동그란 뒤통수를 매만지며 이 어린 것이 애를 뱄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기가 막혀서 자꾸만 어깨에 대고 눈가를 비벼대는 고개를 들게 했어. 젖살이 덜 빠져 둥그런 뺨에 쳐진 순한 눈이 영락없이 어린애 같은데. 거기다 울먹울먹 입을 바르르 떠는 얼굴을 보니 더 그래. 한숨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마음이 아려와 숨을 푹 내쉰 건화가 후거의 모아진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곤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지.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건화도 많은 나이도 아닐뿐더러, 육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지.



***



간밤에 짜릿한 꿈을 꾼 청명은 오전 수업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늘 일어나는 시간과 비슷한 시각에 깨어났어.

밤에.. 꿈에서 아홉 살짜리 명대가 자기만한 곰 인형을 끌어안고 청명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 왜 쳐다보냐고 하니까 변태라서 쳐다본다고 했지. 왜 내가 변태냐고 해명하니 명대는 좀 전처럼 청명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대뜸 팔을 내밀었어.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터라 하얗게 드러난 팔뚝 여기저기에 울혈 투성이야. 그에 놀란 청명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고 명대를 다그쳤는데, 입술을 지그시 문 명대는 눈을 깜빡이고 나니 아홉 살에서 열네 살이 되어서 말했어.

‘교수님이요.’


“아...”


그 부분에서 잠에서 깼어. 얼마나 소름이 돋던지. 익숙지 않은 방안 풍경에 고개를 돌린 그는 옆자리에 곤히 누워있는 명대를 보며 헛숨을 들이켰지.


“.....”


잠깐의 돌이킨 기억으로 명대가 왜 여기서 알몸으로 그의 옆에서 누워 자고 있는지 깨달은 그는 다시 한숨을 꺼뜨렸어. 그래서 그런 꿈을 꿨구나.. 하... 내가 어린애를 데리고...

아홉 살짜리 명대가 새삼 새록새록 머리에 들어오니 죄책감은 땅을 파고들었지. 어제 명대가 냈던 신음소리,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허리의 뒤틀림 뭐 그런 것들도 함께 말이야. 피부가 까만 편인 청명과 다르게 명대는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도 그렇고 옷자락에 숨겨진 살갗은 그보다 더 하얬어. 그 하얀 몸뚱이가 정액 범벅이 돼서...


“...”


거기까지 떠올린 청명은 다시 자기비하를 하며 이를 꽉 깨물었지. 고작 어제 일 좀 떠올렸다고 순식간에 목까지 빨개진 그는 눈만 굴려 천장에 달린 조명등을 보다 고개를 슬쩍 돌렸어. 살짝 입술을 벌리고 잠든 명대가 보였지.

어른인 척 하지만 아직 애 일 뿐인데. 명대와 자신의 나이차를 되새겨보자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지. 명대가 태어났을 때 쯤 청명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어. 명대가 걸어 다닐 땐... 중학생이었지. 생각해보니까 더 심하잖아. 그렇네. 명대가 아직 뭣도 모를 초등학생 때 청명은 이미 성인이었으니까.

심각하네.

명대가 따라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명대와 몸을 섞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 더, 더 심각하게 느껴져서 지독한 현타와 싸우다가, 그래도 잠든 명대는 떼쓰지도 않고 억지 부리지도 않으니 마음 놓고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어. 명대가 깨지 않도록 작은 움직임으로 일어나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옆에 시계를 보는데, 얼마 안 지난 줄 알았는데 벌써 이십분이나 지난 시계에 청명의 입술이 꾹 다물었다 떨어졌지.


방을 나선 청명은 가볍게 씻고 나온 후 아침 준비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도달했어. 가정집엔 어울리지 않을, 위생사가 착용할만한 하아얀 앞치마도 걸치고 리본을 묶은 후 그는 마치 수술을 앞 둔 의사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투명한 비닐장갑도 꼈지.


준비를 끝낸 그는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고 투명한 볼에 계란을 깨는데, 분명 집에서 아주머니가 하는 것도 곁눈질로 봤는데 왜. 왜. 자기가 할 땐 계란 껍데기가 우수수 계란 속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 두 개를 깼는데 안에 들어간 껍데기가 더 많은 것 같아 짜증스럽게 손으로 껍질을 하나하나 집는데 비닐장갑을 끼니 당연히 안 잡히지. 잡으려하면 도망가고, 도망가고. 결국엔 장갑을 벗어던지고 집게로 하나하나 빼다가 그마저도 안에 들어간 게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 쯤 거름망을 떠올리곤 그걸로 계란을 거르는데.. 이게 또 생각만큼 계란 껍데기만 빼고 쑥쑥 나가질 않는 거야. 대체 이유가 뭘까. 넓은 그릇 위에 계란 껍데기들과 계란을 거름망 위에 부어 놓은 채로 한참 쳐다보는데도 안 돼.


“하아...”


요리가 군사훈련이나 애들 가르치는 것 보다 더 힘든 것 같아. 이제 시작도 안 했는데...

걸러지는 계란을 10분간 쳐다보고 있었지만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 아예 계란 세 개를 더 꺼내서 거름망 위에다 깨버렸어. 여전히 고청명의 계란 깨는 솜씨는 최악을 달렸고, 계란 다섯 개를 써서 겨우 두 개 반 정도의 분량을 만들고는 거름망 채로 싱크대에 집어 넣어버렸지. 그리곤 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올리브유를 그야말로 튀길 수준으로 부어버렸어.


좀 많나.


자기가 해놓고도 이건 좀 오버인 것 같아서 또 절반을 싱크대에 붓고, 불도 올리지 않은 채 기름 팬위에 계란을 부은 후에야 렌지 불을 제일 강하게 맞춰놓고 싱크대에 대충 버린 비닐장갑을 버렸어. 그 후에 간을 해야겠다 싶어 소금을 찾는데.. 이게 누나가 다 알아서 해줬으니 청명은 자신의 집이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라. 한참을 소금을 찾다 겨우 찾았는데 또 문제가 생겼지. 굵은 소금과 작은 소금 중에 뭘 넣어야할지 모르겠어. 이런 거 까진 본 적 없는데...


“하...”


어제도 명대가 온다고 뭐라도 해보려고 하다가 망해서 치우는 도중에 명대가 오는 바람에 큰일 날 뻔 했는데... 앞치마를 맨 허리 위로 손을 올린 채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금을 구별하다가, 그냥 고운 소금으로 선택했어. 그리곤 기름을 통 크게 부어버린 것과 다르게 이번엔 소심하게 그 큰 손으로 한 꼬집도 안 되게 쥐어서 계란 위에 대충 뿌리고 TV에서 봤던 것처럼 젓가락을 들어 휘저어 보는데.. 분명 TV에선 이렇게 하니까 계란끼리 작게 뭉치면서 스크램블이 됐었단 말이야. 근데 청명의 계란들은 이미 밑바닥이 진한 갈색이 되고 위쪽도 거의 다 익은 채라 찢어지기만 할 뿐이었어. 뒷목에 땀이 흐르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지. 또 망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어.


대체 왜 계란 구워주는 기계는 없을까. 토스트는 토스트기가 해주니까 빵만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할 말을 잃은 그는 얼른 불을 꺼버리고 이마를 움켜쥐었어. 젠장. 요리라도 좀 배워 볼 걸. 대체 왜 아무도 요리가 이렇게 어렵다는 걸 알려주지 않은 거지? 알았다면 경제학 배우기 전에 요리 학원이라도 다녔을 거야.


밥을 할 엄두는 나지도 않고 성공할 거란 자신도 없어서 토스트라도 하려던 건데. 그냥 빵만 내는 게 답일까. 과연 명대가 토스트기로 익힌 빵 조각을 ‘아침밥’으로 생각해줄지 모르겠어.


‘난 애인이 아침밥 차려주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던데.’


언젠가 명대가 했던 말 때문에 이 난리를 시작한 건데... 역시 사람은 하던 일이나 해야 해.


노란색과 갈색으로 배색 된 넝마 계란부침을 보며, 대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막막했어. 누가 봐도 실패한 건데. 푸후우우...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데 그 때 방문이 열리더니 명대가 알몸에 이불을 걸친 채로 바닥에 질질 끌고 나왔지.


“교수님 뭐 해요?”


갑작스런 명대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청명이 허둥지둥 넝마 계란을 치우다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놓쳐서 철재와 철재가 부딪치는 바람에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가 주방을 울려서 명대의 졸린 눈에서 졸음이 몽땅 날아갔지. 반쯤 감겼던 눈이 크게 뜨이며 깜빡였어.


“흐응?”


고청명이 당황해하는 걸 본 명대가 가까이 다가와 앞치마를 맨 청명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턱을 올렸어. 청명의 어깨 너머로 물에 잠긴 계란부침이 보였지. 저걸 왜 버려?


“이거 뭐예요? 계란 뭉치?”

“...쉬고 있어. 왜 벌써 일어났어.”


짧게 한숨을 쉰 그는 달라붙은 명대의 팔을 떼어내고 몸을 돌리는데, 명대는 자꾸만 싱크대에 처박힌 팬에 관심을 뒀어. 저게 뭔데요?


“계란 뭉치.”

“..흐음..”


어쩐지 좀 삐진 말투라 상황이 훤히 보였지. 마음 같아선 더 놀리고 싶은데 고청명이 진짜 삐질까봐 그냥 웃기만 하고 더 이상 계란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어. 대신 힘이 들어간 청명의 입술에 뽀뽀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물었지.


“꿈에서 나 안 나왔어요?”

“..꿈 안 꿨어.”

“흐으응, 너무하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대신 어깨를 움찔하며 거짓말을 했어. 명대가 목을 울리며 그에게 매달려 애교를 펴도 감추고 싶은 게 있는 남자인 청명은 자꾸만 명대를 방으로 돌려보내려 했지.


“왜 이래요. 나 다 깼는데.”

“더 자.”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눈을 얇게 뜨고 청명의 뺨을 잡아당겨 눈을 마주하며 묻는데, 명대의 시선에 청명의 두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 옆으로 향했지. 모아진 명대의 입술이 위쪽으로 올라갔어.


“없어.”

“그럼 나 아침 먹을래. 계란 덩어리나 먹어야지. 물에 담긴 거. 교수님 방식의 수란이에요?”

“그건...”

“사람 성의를 봐서 먹어야죠. 음식인데.”

“음식 아니야. 음식물 쓰레기야.”

“....”


단호하게 나온 그의 음성에 명대가 결국 졌어. 사실 먹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싱크대에 빠진 계란을 정말로 먹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





밥은.. 어쩔 수 없이 토스트기로 구운 식빵과 버터랑.. 물이었어. 우유도 없더라고. 청명이야 아무거나 다 먹는다지만 명대는 이런 걸로 안 될까봐 좀 신경이 쓰였는데, 정작 명대는 아침먹자고 해놓곤 아침에는 관심이 없고 고교수의 다리사이가 궁금했나봐. 옷도 안 입고 이불만 칭칭 감은채로 빵 조금 뜯어먹더니 그마저도 손도 안 대고 긴 다리를 뻗어 청명의 사타구니를 발로 지그─시 눌렀지.


“....”


찬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애써 혼자서라도 이성을 차려보려는데 쉽게 되지 않아. 왜냐면 명대가 그걸 원하지 않으니까.


“밥은 이따 먹어요.”

“명대, 어제 했잖아.”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 밥 안 먹는 거 아니잖아요.”

“.....”


역시. 늘 느끼는 거지만 도대체가 명대에게 말로 이길 방법이 없어.

어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서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니, 얼마 지났다고 갑자기 바뀌는 게 어이가 없지. 물론.. 명대에겐 이 쪽이 더 어울렸지만.


그가 물잔을 식탁 위에 내리자마자 명대가 의자 밑으로 쑥 내려갔어. 의자 위에는 이불만 덩그러니 남았지. 식탁 아래로 들어간 명대에 청명이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끼고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서려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명대가 청명의 발을 붙잡았지. 발목이 잡히자마자 놀란 그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도로 앉았어.


“식탁 아래에서 뭐 하는 거야?”

“어제는 교수님이 해줬으니까 오늘은 교수님이 받을 차례예요.”

“...잠깐만.”


대충 뭘 할지 감이 왔어. 명대에게 잡혀 의자에 앉은 그는 피하기 위해 몸을 물렀으나 그 덕에 명대가 수월하게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준 수준이었지. 식탁과 그의 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명대는 청명이 입은 트레이닝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리곤 속옷 속에서 성기를 꺼내 입에 물었어. 식탁 위에 오른 고청명의 손이 파드득 떨렸지. 32년 인생 최대 위기에 가까웠어.


“명대, 하지..”

“싫다고 하면 저 상처받아요.”


귀두 끝을 입술에 댄 채로 말하자 거절을 전하는 청명의 말과 달리 성기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가며 딱딱해졌어. 솔직한 제 성기의 반응과, 상처받는다는 명대의 말이 합쳐져 결국 아무 말도 더 꺼낼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고. 조용해진 그가 마음에 들어 눈을 곱게 접어 웃은 명대는 청명의 성기 끝에 키스하더니 기어코 입을 벌려서 크기가 커진 것을 앙 물고는 혀로 핥기 시작했어. 핏줄이 선 기둥을 핥고 입 안으로 더 밀어 넣으면서 이에 닿지 않게 조심했지. 청명은 살면서 처음으로 받는 펠라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어. 그것도 띠 동갑인 어린 애인한테. 마음은 아닌데, 정말 아닌데 명대의 애무에 아래가 발기하니 죽을 맛이었어. 명대에게 이런 짓을 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대로 두자는 마음이 충돌했지.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막 일어난 아침처럼 눈을 굴려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짚어. 완전히 크기를 키운 그것은 축축하고 뜨거운 입안에서 희롱 당하다가, 명대가 절반을 물고 있던 것을 입에서 빼고 혀만 내밀어 뿌리부터 핥아 올렸어. 뜨끈한 이마 위를 짚은 손가락이 마디마디마다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더니 그가 곧 한숨처럼 뜨거운 숨을 뱉고는 명대의 머리가 식탁에 부딪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잡아 끌어당겼지.


“왜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명대를 무릎위에 앉히고 색이 옅은 입술 위에 입 맞추며 마른 어깨를 쓸어 만졌어. 애초에 옷을 입지 않고 이불만 덮어쓰고 나왔던 몸이라, 그 이불을 놓은 지금은 완전히 알몸이었지. 아마 명대는 처음부터 이런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 말을 뒷목으로 삼키고 진하게 파인 쇄골 위에 입술을 내리자 명대의 손이 뒤로 향해 침 범벅이 된 그의 성기를 잡았어. 풀어주지도 않고 바로 삽입하려 들기에 그가 명대의 양손을 잡아 저지했지.


“응, 아응.. 좀, 놔 줘요..”


오랄을 해줄 때부터 뒤가 허전해서 미칠 것 같은데, 넣지도 못하게 하니 안달이 나서 죽겠어.

그 때 청명이 명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더니, 비어있는 나머지 손으로 벌어진 엉덩이의 구멍을 매만지다가 손가락 하나를 삽입했어. 이미 젖은 구멍이 쉽게 그를 반겼고, 순식간에 손가락 두 개가 밀려들어왔지. “흐으, 하아...” 숨소리만 할딱이며 최대한 손가락을 끝까지 받아들이기 위해 아래에 힘을 뺐어. 사실 굳이 손가락으로 풀어 줄 필요도 없었는데 굳이 친절을 보이는 고청명 때문에 명대만 죽을 맛이었지. 진짜 당장 안 넣어주면 확 깨물 의향도 있었으나 다행히 청명은 오래 가지 않아 자신의 것을 명대의 구멍에 댔어. 그 쪽도 마냥 편한 건 아니었거든. 벌름대는 구멍 위에 댄 것이 금세 안으로 쑤욱 밀려들어오고, 넓게 벌려지는 구멍에 “아윽..” 신음한 명대는 어느새 풀린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넓게 어루만지며 할딱였어.



***



마음이 풀린 줄 알았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다시 삐진 티를 내는 터라 건화가 좀 고생을 하고 있었지. 잘못 한 걸 아니 더 쩔쩔매고 있었어.


“먹고 싶은 건 없어? 밥 먹어도 괜찮아? 아침엔 입덧 안 했잖아. 근데 보통 지금부터 입덧 해?”

“내가 어떻게 알아? 의사야?”

“그래.. 그렇지. 잠깐만.”


시무룩하게 대답해놓곤 후거를 끌어안은 채로 놔주지 않고 휴대폰을 잡았어. 후거가 버둥대며 주방 가겠다고 해도 절대 안 놔줬지. 결국 혼자 낑낑대다 포기하고 건화의 다리를 베고 누우려 하자 그제야 건화가 팔을 풀어줬어. 이대로 주방으로 도망치면 쫓아와서 또 안 놔줄 것 같아서 그런 귀찮은 짓은 안 하기로 했어. 잠귀신이 들렸는지 자꾸 잠이 와. 헉. 잠귀신이라고 생각하니까 엄청 무섭다.


“아저씨 근데 회사 안 가도 돼?”

“안 가. 쉴 거야.”

“짤리면 어떡해..?”

“못 잘라.”

“하긴..”


아저씨를 자르진 못하겠다. 이제 아기도 있는데 직장을 잃은 가장을 보게 될까봐 겁났다가, 시아버지가 그 회사 주인인걸 생각하고 안심했어. 그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지. 내가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는 건.. 다 임신해서 그래. 원래 임신하면 졸음 쏟아진다 그랬어. 가만히 눈을 감고 조는데, 건화의 손이 배 위에 닿았어. 티셔츠 위로 배를 올리곤 천천히 위 아래로 쓸어줬지. 그 감각에 눈을 뜬 후거가 눈만 들어 건화를 올려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아 빠르게 눈을 깜빡였어.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 뚝뚝 건화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지. 다리가 차가운 감각에 휴대폰을 내린 그는 후거의 눈이 그렁그렁 한 걸 보고 놀라 붙들었어.


“왜 울어?! 배 아파?”

“흐, 아니..”

“그럼 왜 울어? 다시 병원 갈까?”


호들갑 떨며 벌떡 일어서서 다시 나갈 채비를 하는 건화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저었어. 손등으로 대충 눈물을 쓱쓱 닦고는 우물우물 이야기했지.


“전에 아기 유산한 거 생각나서..”

“.....”


후거의 입에서 유산이란 단어가 나오자, 끔찍했던 그 때의 기억이 절로 떠올라 입매가 꿈틀댔어. 둘 다 의식적으로 그 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지.


“사실.. 나 오늘 임신이면 지울까 생각도 했었어..”

“...왜 그런 고민을 혼자 했어.”

“그냥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겠어서.. 흐, 흐으...”


겨우 그쳤나 싶었더니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 이젠 어깨 까지 떨며 우는 후거를 보며 건화가 그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앉아 숙인 후거의 얼굴을 올려다봤지.


“근데, 근데 병원 가니까.. 지우겠다는 말도 안 나와서.. 지우기 싫은데 낳는 건 무섭고...”

“....내가 진짜 쓰레기야. 내가 다 나쁜 놈이야. 내가 죽어야하는데...”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한참 병원에서 서러웠던 것을 토로하며 건화의 양심을 바늘로 콕콕 찌르고 있었는데 오히려 건화가 이번엔 더 앞서나갔지. 혼자서 죽어야한다며 스스로를 욕하고 있었어. 아까 카페에서 자학이 어쩌고 하더니 전화통화 하면서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눈물이 쏙 들어간 후거가 딸꾹질을 하느라 어깨를 들썩이며 건화를 쳐다봐.


“너 나이 생각하면..”

“내 나이가 뭐가 어때서. 한창인데. 끅... 아 딸꾹질...”

“후거 몇 살이야.”

“스무 살.”

“.....”


알고는 있는데 후거 입에서 들으니까 죄책감들이 수배로 몰려들어와 골프채로 건화를 마구 내려치는 것 같았어. 도둑놈. 도둑놈 자식. 한 번 유산시켜놓고 몇 달 지났다고 또 임신을 시키냐. 네가 인간이냐. 골프채가 사람으로 변신해서 건화를 후드려 패고 있었어.


정말 마음 같아서는 후거 앞에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은 기분인데, 그건 후거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 차마 그러진 못하고 후거를 꽉 끌어안고 토닥였지. 미안하다는 말도 꾹 참고.


“앞으로 혼자 그러지마. 그런 건 같이 대화해야지.”

“알았어..”

“아기는.. 아기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후거 너야.”

“안 지울 거야.. 지우기 싫어.”

“알았어.. 아픈 거 있으면 혼자 삭히지 말고 다 이야기해. 알았지?”

“응.. 근데 나 학교는 어떡하지?”


학교 이야기를 하니 잠깐 멈췄던 건화의 뇌내 폭력이 또 시작 되는 기분이야. 아.. 대학 졸업하고 아기 가지기로 했는데..... 그 때 그렇게 후거 생각해서 말했는데 이게 뭐야. 맞아도 싸지 진짜...


“..한 달 있으면 방학이니까..”

“그럼 배도 안 나올 테니까 그냥 다니면 될 거 같은데.”

“조심히 다녀야해. 친구랑.. 명대랑 붙어 다녀.”

“윽. 싫어. 이제 태교해야 하는데 좋은 거만 보고 다녀야지. 명대새끼는 아냐.”

“태교 한다는 사람이 욕을 해?”

“으음.... 몰라. 태교에는 잘생긴 아빠 얼굴이 최고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명대새끼는 욕이 아니라 고유명사라고 대답하려했는데 굳은 건화의 얼굴에 살살 눈치 보며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음 짓더니, 곧 건화의 광대뼈 아래쪽에 그늘진 부분에 쪽쪽 뽀뽀하고 말했지. 건화는 한숨을 쉬면서도 ‘아빠’라는 말이 나쁘진 않아 그냥 후거를 끌어안고 뺨을 마주 비볐어. 


앞으로 고생길이 훤해. 후거도 애고, 후거 뱃속에도 애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