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한층 더 무덥다.

 

세간에서 지구온난화가 그리 심각하다 떠들더니, 요즈음엔 정말로 오존층이 파지지-하고 녹아내려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직사광선이 따갑게 사람을 저격하고, 그늘에서조차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라 하루하루가 아찔하다.

 

특히 옥탑방의 더위엔 자비가 없었다.
오로지 사막, 한 낮의 태양과도 같은 그것이 사람을 말려 죽일 듯한 기세로 집 위를 떠돌았다. 밤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종일 흡수된 태양열이 떠날 줄도 모르고 스물스물 방안을 핥았다. 시원한 환경이란 게, 특수 계층이나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기분전환이나 할 겸, 가볍게 나간 마실길에서 형형색색의 전단지가 눈 앞에 운명처럼 휘날렸다. 집 앞에 새로 개장한 전자상가의 광고. 특히 붉게 으스대는 파격세일이란 네 글자가 강렬했다.

 


***

 


"이건 어떠세요? 세련된 디지털 형식이구요. 리모콘으로도 조종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기존의 선풍기가 미풍, 약풍, 강풍. 이렇게 3개 옵션만 있는 데 비해 이건 초 강풍이라는 4단이 새로 추가되었걸랑요. 제가요, 물건 팔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번 써보면 정말 추천드릴 수 밖에 없는 제품이란 걸 고객님도 금새 아실 겁니다. 하하."

 

"그럼 이걸로 할게요."

 

"후회 안하실 거에요. 일주일 내에 반품 가능하구요. 아, 맞다. 리모콘은 따로 사셔야 하는데."

 

"괜찮아요."

 

침을 사방에 튀겨가며 속사포로 뱉어내는 영업사원의 기세가 반, 관심 없는 기계들이 웅웅거리는 이질감이 반.

나는 더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장사꾼이, 그리고 선풍기가 다 비슷하지 뭐.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장박스를 풀어헤쳤다. 설명서를 펼쳐 간단한 조립을 했다. 콘센트에 코드를 밀어넣었다.

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잽싸게 해치웠다.

 

선풍기에 전원이 돌자 단조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미풍을 선택하셨습니다.

 


1단이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다. 디지털 형식이라서 그런지 옵션에 따라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는 게 신선했다. 좋은 세상이야.

아직은 바람이 간지럽다. 그럼 센 걸로 해 볼까.

 


-강풍을 선택하셨습니다.

 


후욱, 한층 강한 바람이 주변의 종이들을 어지러이 날려 보낸다.

확실히 시원했다만, 내가 원하는 완벽한 세기엔 아직 미치지 아니하였다.

 


-초강풍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이쿠."

 

나는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고, 판매사원이 그토록 강조했던 4단 버튼을 눌러 보았다. 작은 옥탑방에 예상치 못한 태풍이 몰아쳤다. 방이 통채로 날라갈 지경이었다. 기계가 내는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놀랍도록 거대했다. 선풍기 앞에 고개를 쭉 빼고 있다가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 했다. 켁켁, 마른 기침이 튀어나왔다. 기세가 대단한 건 인정할 만 했지만, 앞으로 이 기능을 쓸 일은 그닥 없어 보였다.

 


-약풍을 선택하셨습니다.

 


나는 결국 내게 맞는 세기를 찾았다. 어중간한 게 제일이지.
알맞게 서늘한 바람이 옥탑방의 더위를 조곤조곤 잠재웠다.

 


***

 


그 날 이후로, 나는 선풍기 앞에서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남은 일을 하고, 잠을 잤다. 다시 말해, 모든 일상을 함께 했다.

나는 기계가 선사하는 놀라운 쾌적함에 살짝 반했던 것도 같다.

 

지체된 퇴근에 헐떡이며 옥탑방으로 돌아오던 날,

넥타이를 허겁지겁 풀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톤이라곤 없는 무색한 소리가 음절로만 펼쳐졌다.

 

"덥지 않니?"

 

나는 벙찐 표정으로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헤메었다.

방 안을 저벅이며 이곳 저곳 살피다 보니 어느 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았다.

 

"땀이 나지 않니?"

 


-강풍을 선택하셨습니다.

 


전원을 넣지도 않은 선풍기가 갑자기 우웅대며 바람을 내보낸다.

맺힌 땀은 금새 날라갔지만, 등에는 더위가 원인이 아닌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나오지 않니?"

 


-약풍을 선택하셨습니다.

 


별안간 바람의 세기가 바뀌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선풍기가 말을 하고 있었다! 기계가 나한테 말을 걸다니!
혹시 인공지능이라도 탑재된 건가 하고 설명서를 뒤적거렸지만 어디에도 그런 귀띔은 없었다.

 

다시 전자상가에 찾아가려고 하다가, 기계가 방금 해낸 놀라운 일들을 되새겨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바꾸었다.

 

선풍기는 의외로 수다쟁이었지만 특별히 해를 끼치는 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손발이 척척 맞는 친구였다.

 

예를 들면, 땀이 쩔어 들어온 내게 "덥지 않니?" 하고 땀을 식힐 때까지 강풍을 틀어주었다가, 조금 쌀쌀해졌다 싶으면, "춥지 않니?" 하며 바람을 줄여주었다. 요 신통방통한 기계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디테일한 질문까지 가능해졌다. 자기 전에는 "네가 잠 들고 10분 후에 꺼 주는게 어떠니?" 라던가, 담배를 태우는 내게 "내 앞에서는 재가 날리지 않니?" 까지도.

 

나는 한번도 "됐어" 라거나 "아니." 라는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법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선풍기는 내가 원하는 그대로의 요구만 딱 딱 말하고 나아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실로, 흐뭇한 여름이었다.

 


***

 


불벼락이 떨어졌다.

 

오랫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보기 좋게 망해버리고, 그 덕에 상사에게 웬종일 깨졌다. 별 볼일 없던 후배는 경멸하며 비웃었다. 여자친구는 꼴도 보기 싫다는 말로 이유 한점 없이 나를 내쳤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병원에 실려갔다는 어머니의 안부 아닌 안부전화와, 월 말에 납부한다고 번번히 말을 했음에도 억세게 전화요금을 독촉하는 통신사의 안내원까지 모두 나를 성가시게 했다.

 

열쇠를 깜빡 잊고 두고 온 탓에, 다시 집 앞에서 회사까지 다녀와야 했고, 낑낑대며 돌아온 집에 그나마 엔돌핀인 맥주와 담배는 동이 나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 실수로 문지방에 찍힌 발톱이 피를 쿨럭이며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말을 걸던 선풍기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한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발톱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나서야 그 수다스럽던 녀석이 오래 참았다는 양, 첫 말을 떼었다.

 

"얼굴이 너무 빨갛지 않니?"

 


-약풍을 선택하셨습니다.

 


바닥에 철푸덕, 드러누운 내 앞에 적당한 바람이 살랑살랑,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람. 하루를 되감아 본다. 정말 운수 사나운 날이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나는 잠을 청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졸음이 밀려온다. 꿈의 도입부에서 서성이던 무렵, 가물가물한 잠결 위로 웃음기 살짝, 머금은 기계음이 쏟아진다.

 

"죽고 싶지 않니?"


코 앞에서 맞춤형 바람을 낳던 선풍기가, 언제나 그랬듯, 내 마음 속을 훔쳐 질문을 캐냈다.

 

 

 

 

'초 강풍을 선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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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112550&volumeNo=8

 

네이버에두 올렷삼..마는 관심을... 전 옜날앤 진짜 선풍기 틀구자면 곧 뒤지는줄알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