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5.115) 2020.04.06 11:31:59


작성자-Nemuru_machi


주말은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현지 선배하고 데이트를 약속한 날이기도 하고.


평소처럼 적당히 입는게 아니라 인터넷같은 곳을 참고해서 데이트 전날에 쇼핑도 했다.




라이트 컬러 데님에 베이지 아우터 & 팬츠. 돈은 꽤 깨졌지만 이걸로 선배 옆에 서도 딱히 욕을 먹지 않을 정도는 된 걸까?


머리는 평소대로 하기로 했다. 염색은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항이니. 간단히 가르마 펌정도만 하고..




데이트라는게 이렇게 두근거리는 거 였나? 수학여행 가기 전날의 초등학생처럼 기대로 잠을 조금 설쳤다.


덕분에 살짝 늦게 일어난 탓에, 분주하게 부랴부랴 준비를 마쳤다. 아침은 안먹고 스킵하는 걸로 하고.. 어라 지갑에 돈이 남아있던가.


없으면 가면서 현금을 좀 뽑자.. 하고 생각하며 대충 부모님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어디가냐?"




우연히도 집 앞에서 녀석과 마주쳤다. 솔직히 저번 야자때를 생각하면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정말로 이럴 때 이 녀석과 마주칠 줄은.


녀석도 데이트를 가던 길이 었는지 뭐 다른 일을 하던건진 몰라도 적당히 꾸며입고 있었다. 연회색 니트에 검은 일자 팬츠. 검은 컨버스가 퍽이나 어울렸다.


위쪽엔 오버사이즈 자켓을 입어서 평소의 이미지에 가녀리단 인상을 덮어 씌우고 있었다.




"데이트. 너도 데이트 가는 거잖아."




"... 그렇지 뭐."




녀석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게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아닌가?


어색한 분위기를 넘기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선배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가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선배가 매우 두근대고 있는 캐릭터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귀엽잖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녀석이 나를 툭 건드렸다.




"응?"




"그렇게 좋냐."




"뭐 인생 첫 여자친구고? 솔직히 말해서 그 때 이후로 연애에 신경쓰는거 처음이고. 고백 받은 만큼 기분 좋은거지."




속 시원하게 내 기분을 털어 놨다.




"....그래."




녀석은 기분 나쁜 듯 고개를 내게서 돌려버렸다. 한결 선배랑 싸웠나? 그런 기미는 안보이던데. 이건 좀 걱정 되는데.


뭐.. 내가 물어볼 녀석은 아닌가. 입을 다물고 선배와의 카톡에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어라, 재하하고 민주아냐?"




오랫만에 듣는 목소리다. 높고 가벼운 톤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학원에 가는지 가벼운 스웨트 팬츠에 후드티를 입은 여자애가 한 명 서있었다.


묘하게 둥글둥글한 얼굴을 보니 아, 기억났다. 분명 중학교 동창이다. 그리 자주 말한 적은 없어도 같은 반이라 몇가지 일로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었다.




"오 송미희. 맞지? 오랫만이다?"




"우와아.. 그렇네! 엄청 오랫만이네! 너 결국 민주하고 사귀는건가? 오늘 데이트?"




"읏.."




무심코 던진 말에 나와 녀석을 슬쩍 확인한다. 서로 꾸미고 나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겠네 이거.




"그런 거 아냐."




미희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약간 차가운 목소리. 이건 실수했나, 라고 생각했지만 녀석의 평판을 생각하면 이 편이 나을테지.




"나랑 얘는 진작에 그런 감정 해소 했으니까. 나도 여친있고, 얘도 남친 있어. 지금은 우연히 마주친거고."




"아-"




미희의 얼굴이 난처해진다. 그래서 적당히 웃어주면서 신경쓰지말라고, 그렇게 덧붙혔다.




"몰랐던 거잖아?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되고. 이게 별다른 진전이 있는 관계같은게 아니야. 그냥 친구고."




마침 내가 타야할 버스가 왔다. 먼저 버스가 멈추길 기다리며 남은 두사람을 바라 봤다.




"그럼 먼저 갈게. 신경쓰지마."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탔다.




* * *




어젯 밤엔 악몽을 꿨다. 분명 선배랑 보내는 하루하루는 매우 충실한 하루일텐데, 이상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점심 시간 후의 간식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되거나, 야자시간의 잡담이 줄어들거나 같이 하교하는 것도 줄었다.


그것과 별개로 농구부는 이번 도대회를 위해 벌써부터 강화 훈련이 시작되어서, 등교 시간도 앞당겨져 버렸다.


결국 녀석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할 시간은 1교시 시작전의 아주 짧은 시간 정도 였다.




저 녀석, 여자친구를 사귀더니 매 쉬는 시간마다 폰을 붙잡고 있느라 이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이번 주말엔 데이트 같은게 아니라 녀석과 게임이라도 하려고 새 게임을 사놨는데, 결국 제대로 같이 게임하자고 말하지도 못했다.


이번 주말에, 그 선배랑 데이트를 한다고.




원래 주말에 내가 놀자고 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으면서.




처음으로 거절당했다. 왠지 기분이 불쾌했다. 그 선배라는 사람이 그렇게 좋냐고 쏘아주고 싶지만


결국 나랑 걔는 친구고,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




"민주야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아.. 아뇨. 그냥 컨디션이 안좋아서요. 선배."




결국 같이 점심을 먹던 한결 선배가 걱정이 된 건지 내게 물어왔다. 그냥 정말로 단순히 컨디션 문제인거니까.


얼버무리거나 변명하듯 대답이 나왔다. 선배의 얼굴에 든 걱정에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스트레스로 복통이 너무 심해서 학교를 조퇴했다.




침대 안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는데...




[미안. 나 선배랑 사귀니까 앞으로 말 걸지 말아주라.]




재하가 내게 사과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결국 당황하고 말았다.


내게 고백하던 때처럼 힘이 들어간 눈동자에 가슴이 두근 거렸다.




[생각해보니까 여태 차인 상대랑 친하게 지내다니, 어지간히 마음 써주고 있었네. 너.]




대체 무슨 말이야. 우린 친구잖아. 라고 생각은 해도 결국엔 난 남자친구가 있고 한결 선배도 재하에 대해 꽤 신경 쓰고 있었다.


결국 재하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재하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내가 아는 김재하가 아닌 것 같았다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입 밖으로 내뱉으려고 말해보지만, 내 입에선 단 한 글자도, 미약한 소리도 나가지 않았다.


묘하게 후련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재하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떠올리고 말았다.


한결 선배에게 들었던 재하랑 필요 이상으로 붙어다지지 마, 라는 말에 재하에게 했던 말. 그걸 내가 재하에게서 듣고 있었다.


중간에 찬 상대와 차인 상대가 바뀌긴 했어도, 상황 자체는 똑같았다.




[단순한 친구로 남자. 이런 미묘한 관계는 좀 싫네. 나 간다.]




'가지마'




내게 뒤돌아 서며 재하가 손을 흔든다. 계속 걸어간다. 그러다 그 여자와 팔짱을 끼고 내 시야에서 멀어진다.


아, 나 무슨 짓을 했던거야. 이런거였어? 거절당한다는거 이런 기분이었어? 몰랐어. 이렇게 괴로운줄은 몰랐어.




[그래. 미안했어.]




내 입에서 얼빠진 말이 나왔다. 미안했어, 라니.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여자랑 계속 멀어질 뿐.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거 위험해.


내 앞에서 재하가 그 여자 이야기를 하고 그 여자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 여자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하고.




속이 탄다. 분노와 질투로 돌아버릴 것 같다.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손 안에서 무너진 기분.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필사적으로 표정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면서 재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괴로운 경험이 계속 쌓여간다. 차라리 친한 척하지 말걸 연을 끊을 걸. 후회, 자기 혐오. 여러가지 감정이 휘몰아 친다.


행복한 두 사람과 다르게 나는 계속 혼자라서 그게 너무 괴로워서...




[우리 단순한 친구잖아? 나 너 이성으로 안보이고.]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널 그렇게 밀어내는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렇게 가지마, 내 눈앞에서 그 여자랑 행복해 하지마.


내가 잘할게 내가 더 잘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미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될 일은 없을테니까.]




그러지 마-!!







"하아...하아.."




식은 땀에 범벅이 된 채 깨어났다. 밖이 어둡고, 집안이 고요했다. 스마트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결 선배로부터 5건. 재하로부터 2건. 둘다 내가 괜찮은지 묻고 있었다. 다만, 재하에게선.. 데이트 코스에 대한 질문도 첨부 되어 있었다.




"알게 뭔데!"




스마트폰을 집어던졌다. 침대위에 무릎을 감싸안고 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나.. 대체 뭐하는 건데.."




자신을 알 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