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규의 첫 시집을 정말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그가 첫 시집 이후, 문예지에 시들을 발표할 때는 조금 걱정이 되었거든요. 거의 긴장감이 없는 시들이 있어서 이게 나중에 시집에 들어갈까 싶었는데 역시 이번 시집에는 없더군요. 그가 자기 시의 완성도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내적 긴장감을 갖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시집 이후, 이번 세 번째 시집에 이르면서 아쉬운 점은 5편 정도를 읽으면서 뭘 읽어도 어떻게 끝날지 알게 되니까 더 이상 읽는다는 것이 무의미해지면서 급격하게 피곤해졌다는 겁니다. 물론 해설에서 김종호 소설가․평론가가 “의미는 탈구되고 형식은 단순해지며 남는 것은 표현뿐이다”라고 적절하게 지적하였는데요, 저는 왜 이런 말들이 이해는 되지만 공허하게 느껴질까요. 역시 이준규의 경우도 5%를 위해 95%가 버려지는 것은 아닌지요. 변주나 배반 없이 반복만이 있었어요. 어떤 대상이든 이준규의 형식 안으로 들어오면 다 같은 물질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무력감이 저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5%를 위해 95%가 버려지는 참고로 저게 2011년 대담인데
2014년 이준규는 변한게 없고 반복 / 네모 이런시집내고 한마디로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를 계속 양산중
대체 60년대 프랑스였나 거기서 이미 실험된거 왜 반복하냐고
자기복제하는 시인이 제일싫음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COPY A
시인들이 말은 거창하게 하면서 스스로의 작품을 무생물로 취급해서 그런 듯. 시를 사람으로 보고 저 평론을 대입해 보면. 지금 시체 공시소 가서 무연고 시신 팔 하나 다리 하나 몸 하나 만들어 꿰매놓은 거거든. 거기다가 가슴에 명찰 하나 달아놓고 '작품'이라고 부르는 거지. 근데, 예부터 지금까지 등단하고 나면 쭉 그렇게 살더라고. 그러다 정치계 어설프게 입문해 평생 먹고 살어.
원래 의미를 살리기 위한 구조여야 하는데. 구조주의 근간이 구조 탓에 의미의 훼손이 있어 변화를 주자는 건데, 철학 없이 쓰는 시인도 문제. 시 하나 넣고 돈 뽑고, 시 하나 넣고 돈 뽑고. 문단이 ATM이니 그러는 탓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