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붙들린 여전사
사반트는 귀족 그 자체인 남자였다.
사반트는 자신의 영지 한가운데에 우뚝 선 웅장한 성 같은 사내였다. 이제 갓서른을 넘긴 사반트는 크고 각진 얼굴에 적당히 마무리 된 검붉은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목은 앞에서 보면 머리 보다도 굵었다. 거대한 가슴은 앞으로 힘있게 떡벌어져 있었고 언제든지 상대에게 죽음의 일격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는 팔은 웬만한 여자의 허리 이상으로 두꺼우면서도 길었다. 되바라진 그의 손이 헬바드를 드는 순간 싸움터는 피바다로 변하곤 했다.
사반트의 광활한 영지는 가끔씩 사반트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침략을 당하거나 각종 명목으로 강압적인 수탈을 할 때가 아닌 이상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사반트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적에 대해 무자비 했으며 그 자신 탁월한 전사였다. 사반트는 후작이었음에도 스스로 선봉에 서서 적진에 돌격할 정도로 용감했고 그만치 강했다. 사반트는 백작 지위를 물려 받았지만 그것을 후작으로 올릴만치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인간 말고도 수많은 종족들을 다스리고 그들 사이의 충돌들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반쯤은 악당이고 반쯤은 기사인 이런 사내가 통치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악당이나 기사나 그 나물에 그 국밥일 수 있지만 때때로 둘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법인데 사반트에게서는 이 둘은 기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사반트가 깔끔하게 제단된 옷을 입고 수많은 백성들의 고혈과 마법사의 마법과 드워프의 세공술로 빚어진 거대한 발코니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스르륵 다가왔다. 육식 동물과도 같은 육감으로 사반트는 뒤돌아보았다.
"메리안인가..."
메리안은 사반트의 부인이었다. 실권을 여러 영주들에게 빼앗긴 왕이 자신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영주들에게 뿌리듯이 준 여러 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정략 결혼한 배우자에게 사반트는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사반트는 메리안을 내칠 생각이 없었다. 메리안 또한 사반트가 주는 호화롭고 안정된 생활에 안주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메리안의 안색은 어딘지 평소와는 달라보였다. 비장감 마저 깃든 메리안의 얼굴에 사반트는 약간의 의아심을 품었다. 메리안이 말했다.
"내일 출전하신다면서요"
"그래요. 부인도 나와서 나와 군대를 배웅해주길 바라오. 개선할 때도 연도에 나와 수많은 군중을 위무해 주시오"
두껍고 걸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댓다. 사반트의 목소리는 그냥 내어도 보통 사람 보다 훨씬 컷다. 저절로 남을 주눅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출전을 취소해주십시오. 그들은 그저 산중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약한 겨레에 불과합니다. 그들을 학살한다고 후작 님께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런 자들이 지도에 새겨져 있다는 것 자체가 이 나라의 치욕이오. 옛날 어떤 귀족의 부인은 하잘 것 없는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발가벗은 체로 자신의 영지를 돌았다더군. 부인은 그럴 수가 있소?"
발가벗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은 미천한 평민 이하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교육 받아 왔고 그렇게 믿고 있는 그녀였다. 사반트와 단지 아기를 얻기 위한 섹스를 할 때에도 메리안은 불을 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반트와 메리안의 사이엔 5살 난 남자 아이와 3살 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메리안은 어째서 사반트가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이르족을 공격하는 걸 반대한다고 제가 왜 옷을 벗고 나서야 하죠?"
"산중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쓰레기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는 말이 우스웠기 때문이오. 그들을 치지 않겠다는 건 번영을 포기하는 행위요. 번영을 포기한다는 건 지금의 가멸진 생활을 포기한다는 뜻이요. 그대가 걸친 비단옷, 루비 목걸이,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벗겠다는 거요. 평생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태어나서 부터는 아버지에 기대어 지금은 나에게 빌붙어 지내는 당신이 가멸진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한다고 보시오? 그건 발가벗고 나서는 것이요."
"난 후작님에게 왕국과의 동맹을 제공하고 있어요."
"부인, 당신은 동맹의 상징일 뿐이요. 뭔가 당신이 나서서 행하는 일은 없지 않소? 부인이 끝끝내 세이르족을 구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난 동맹에 약간의 교란을 줄 수도 있소이다."
메리안의 말문이 막혔다. 사반트가 빙긋이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나와 내 조상들은 영지의 위안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소. 지금까지의 전철을 보더라도 이 전쟁은 정당하오. 다시는 그런 말 입 밖에도 내지 마시오."
다음날 아침 일찍 침략자의 군대는 출격했다.
사반트는 직접 선봉에 서서 성 안에 사는 부르주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땅엔 기병과 보병이 깔려 있었고 공중엔 와이번, 그리핀, 페가수스를 탄 정예군이 하늘을 갈랐다. 소의 머리에 거인의 몸집을 한 미노타우로스, 돼지 머리에 다소 작고 땅딸한 사람 몸집을 한 오크 등 수많은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종족들도 보병대에 섞여 사반트의 깃발 아래 움직였다. 5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다. 영지의 생산을 관장하던 마법사들 몇몇까지도 부를만치 큰 규모였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통해 수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다. 마법은 마법책 및 혈통을 통해 전수되고 이는 피와 문자에 대한 환상을 자아냈다. 노동력과 생산 수단이라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장악하고 있기에 국가 경제에 기여도가 남다른 마법사들마저 동원했다는 것은 이 전쟁을 사반트가 벼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사반트는 군대를 급격한 속도로 전개했다. 사반트는 엄청나게 무거운 갑옷인 풀 플레이트 메일을 두르고 있었고 한 손에는 낫, 창, 도끼가 달린 병기인 길고 무거운 헬바드를 들고 있었다. 거기에 더 하여 롱 소드, 바스타드 소드, 팔치온, 브로드 소드를 각각 한 자루씩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그러나 사반트의 모습엔 피곤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적진인 세이르족의 영지에 다가갈수록 사반트의 육중한 몸에는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사반트가 탄 거대한 백마도 지침이 없었다.
세이르족의 영지에 도달하기 하루 전 사반트는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메리안에게 이번 원정은 힘의 낭비에 불과하다고 설득 당한 한 기사가 사반트에게 물었다.
"이번 원정에서 우리는 막대한 돈을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 작디 작은 겨레에 이토록 큰 힘을 쓰시는 것입니까?"
"내 목표는 세이르족을 정복하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들의 멸종이다"
"멸종은 너무 가혹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최근 50년 동안 우리 영지에 해를 미친 적이 없습니다"
"바로 그 죄값을 물으려는 것이다. 내 할아버님께서 그들을 대파했지만 목숨만은 붙여주었었다. 내 땅에 그런 약한 놈들이 설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민다. 우리가 저들의 씨를 확실하게 말릴수록 우리의 용맹은 여러 국가에 널리 퍼질 것이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들은 것과는 좀 다르군요."
"방금 말한 것은 내게 마음 속 깊이 추구하는 이유이다. 남쪽 마을들에 대한 지배력 강화, 자원 약탈, 농지 개척, 노예 수급 등 보다 현실적인 이유들을 난 제시했어. 힘의 낭비? 너는 매우 먼데다 밀림으로 뒤덮인 땅을 치는데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고 예상하는 것인가? 공격자는 수비자 보다 힘이 3배는 세어야 할 뿐더러, 적에겐 지리적인 잇점이 크기 때문에 공격자인 우리는 적 보다 3배 보다 훨씬 더 강해야 한다. 도전 없이는 얻는 것도 없고 그런 정신이 없이 세상에 바로 설 수는 없는 법이다. 세이르족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놈들을 치는 이유다."
기사는 침묵했다. 사반트는 이미 자신의 영지에서 장애인과 정신병자 1만 6천 명을 찾아내어 산 체로 파묻어버린 적이 있다. 인간이 오우거나 트롤의 먹이로 얼마든지 전락해버릴 수도 있는 세상에서 인간을 생존할 수 있도록 몰아가기 위해 그 같은 가혹함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시시때때로 몬스터는 조직 되곤 했고 그때마다 피보라가 인간 세상을 휩쓸었다. 그것을 막아 스스로 빗장이 되기 위해 사반트와 그의 조상들은 엄청난 노력을 경주해 왔다. 물론 그렇다고 사반트의 행동에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다. 보다 온전하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건만 사반트는 강경책을 고수해 왔다.
세이르족은 높고 험준한 산맥에 자리 잡고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워낙에 남쪽 끝에 있었기 때문에 세이르족이 사는 지역은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사반트는 미노사우르스와 오크에게 각각 배틀 엑스와 팔치온을 들려 맨 앞에 세워 밀림을 뚫고 가게 했다.
앞쪽에서 비명이 울렸다. 사반트는 길다란 헬바드를 휘둘러 성가신 나뭇가지들을 베어낸 다음 손수 그곳으로 향했다. 여러 호위병들과 기사들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상당수의 괴수와 보병들이 살해되어 있었다.
"적들은 나무 위에 있다. 공중병들을 움직이고 바실리스크를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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