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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서리치게 추운 초한이 끝나고 부쩍 메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은 모처럼의 따뜻함에 기지개를 폈다. 정우는 새로 산 코발트 색 파자마를 입고 해가 중천에 떠서 방 안 햇발이 가득할 때까지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발 언저리엔 그가 읽다 만 물리학개론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미세한 것들을 제외하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아침이다. 만들다 만 프라모델들이

방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먼지가 다닥다닥 붙은 스웨터 세 벌이 상냥하게 프라모델들을 덮어주고 있었다. 믿기 힘들 정도로 20대 남자의 방다웠다. 보통 프라모델을

하는 이들을 별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또 유달라 보이기도 하겠다만,

방의 상태로만 추측하자면 주인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겨울에 길 구석진 곳에서 핀 코스모스처럼 깊은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냉장고를 열면 풍겨오는 프레온 가스와 뒤섞인 반찬냄새처럼, 익숙한 듯 하다가도 거부감이

드는 그러한 수순을, 차분히, 그리고 더 차분히 밟아왔었다. 막 버려질 준비를 하는 싱싱한

음식물 찌꺼기와도 같은. 하지만 세상은 그를 멸시 섞인 우러러봄으로 대접했다. 길가에서

노숙하는 영화배우를 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정작 정우는 자신이 영화배우와 비슷한

자존감을 지닌 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자신을 그저 하수구에 버려질

역겨운 운명으로 여겨왔었다.

길조를 가져다 줄 것 같은 잡새가 시끄럽게 짹짹댔다. 방역 담당자가 시끄럽게 기계를 웅웅대며 지나갈 때도 죽은 듯이 자던 그가 옅게 눈을 떴다. 눈을 뜬 채로 여전히 자고 있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곤 잠에서 깼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행복하거나, 악몽이었거나, 어쨌든 강렬한 인상을 남긴 꿈을 꾸었던 것처럼, 그는 한참동안이나 침대 맡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는 온 몸이 근질거렸다. 하얗고

창백한 다리를 모기가 물린 것처럼 한동안 벅벅 긁어댔다. 그 강렬함이 소름처럼 돋아난 듯이,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긁고 나서는, 족히 200만원이 넘을 것 같은 외양의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바탕화면엔 일반인이라면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복잡한 아이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자바, 일러스트레이터 등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파일들 뿐 아니라, 그가 대학교수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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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시켜 주기로 약속했던 논문 파일도 그에 못지 않게 많았다. 스핀 수와 자기홀극에

대한 논문을 한번 쭉 훑고 나서는 두둑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폈다. 그의 파일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그의 머리도 여전히 똑똑했고, 세상은 여전히 지루하게 톱니

바퀴처럼 맞물려 한없이 돌아가고 있다.

좋다, 매우 좋았다. 영혼 없는 좋음. :D

일관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지구의 물리작용은 영원히 일관성을 유지하며 우리를 평안하게 해 준다. 지금 땅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저 할머니를 보면서 지구를 떠

받치고 있는 태양에게, 태양을 일직선상에 유지하게 해 주는 은하 세계에게, 그리고 그러한 우주를 창조해주신 창조주 빅뱅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말 그대로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인 인간이, 그저 원자같은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물어뜯고 덤비는 것을 묵인한 채, 더 큰 톱니바퀴처럼 탈 없이 돌아주고 있지 않은가.

조립하다 만 아파치 프라모델을 갈기갈기 다시 찢었다. 서로 물고 뜯는 사람들을 따라하기라도 하듯이. 그 자신도 사람이긴 했지만, 원령공주처럼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인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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