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가 없는 바다

 


chapter 1. 지우

여름은 세상의 따뜻함을 모조리 회수해갔다. 그 자리를 밀고 들어온 가을은 파릇한 식물들에게 야릇한 긴장감을 몰고 왔다. 가을비에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길거리에 만개했다. 나는 그 위를 아프지 않을 만큼 살포시 밟고 지나갔다. 옅게 고인

빗물이 내 신발의 발목을 살짝 적셨다. 나는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민지의

집에 가는 길 내내 나름대로 감상에 젖어 있었다.

민지의 집은 집이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는 언덕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그

길을 수십 번이고 걸어 다녔기 때문에 절대 잊지 않았다. 걸어가는 중간 중간마다 관찰할

수 있는 자연의 신비를 마음속 도감에 펼쳐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코스모스를 비롯해서,

울음을 멈춘 늙은 매미, 먼 길 떠나기 전 담장에 앉아 잠시 쉬는 고추잠자리, 사시사철

올곧게 푸른 소나무의 솔방울까지. 비어있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채워갈 때마다 그녀의 집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민지의 집 앞에 들어서려 할 때 겨울을 나려고 분주하게 이동 중인 개미들을 내려다보았다.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끄는 개미가 무엇인지 모를 물체를 이고는 개미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는 털퍽 앉아 그 행렬을 눈으로 따라갔다. 내 존재를 감지했는지 개미들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고, 나도 그에 맞추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마침내 분주하게 흔들리는 내 눈동자가

푸른색 스니커즈에 닿았다.

-오늘은 일찍 왔네 지우! 추운데 뭐하고 있어. 들어가자

-그래 으히히. 오늘 너 주려고 이거 가지고 왔어.

나는 인중의 절반 쯤 흐른 콧물을 닦으며 가져온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좋은 기색을

억지로 숨기지 않았다. 빨간 색 하트문양과 초록색 클로버문양이 뒤섞인 꽤나 기세 좋은

포장지에 둘러싸인 선물이었다.

-뭔데 이런 걸 가져왔어. 또 계절이 바뀌었다고 기분 좋아서 나한테 선물 주는 거구나.

-으헤헤 그런 거 뿐만이 아니야. 오늘 너 냄새가 더 좋다.

민지는 일단 날씨가 쌀쌀하니 안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네델란드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서양식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는 핑크색 밍크코트가 선반 위에 잘 개켜져

있었다. 신발장에 나와 있는 신발이 두세 켤레밖에 되지 않는 것이 꽤나 쓸쓸했다. 나는

그녀의 호의에 기분이 좋아져 거실로 향하는 내내 연신 그녀의 용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니? 저번처럼 초코우유 줄까?

-이번엔 딸기우유 마시고 싶은데. 히히

-데워 줄까 아니면 차게 마실래?

난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그러고는 필살 애교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녀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찬찬히 거실을 살폈다. 몇 십번을 온 집이지만, 그 특유의

고풍스럽고 아담한 분위기가 여전히 새로웠다.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소박해

보이는 삼성 벽걸이 티비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손님처럼 벽에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요즘 가정에선 정말 보기 힘든 레코드판이 백일홍 화분 옆에 놓여 있었다. 방금까지 사용한

흔적도 보였다. 레코드 판 옆에는 이미자와 김광석의 노래가 숨을 죽인 채 재생되길 대기하고

있었다.

-, 오늘은 특별히 두 잔을 주겠어.

-고마워 헤헤. 오늘은 어떤 수업을 할 거야?

그녀는 아까보다 더 방긋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교과서 느낌을 풍기는 책을 한 권 가져왔다.

-저번 주 주말에 어디까지 나갔더라. 그래 맞다, 나눗셈을 배웠지. 그럼 이번 시간에는 도형의

면적을 구하는 것을 배울 거야. 여기서 깜짝 퀴즈. 15 나누기 5?

나는 갑자기 주변의 중력이 나를 향해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 여파로 딸꾹질이 났고,

몸에는 소름과 비슷한 돌기가 솟아올랐다.

-이크..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문제를 냈나보네. 그 때 우리가 키세스 초콜릿으로 나눗셈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었잖아. 기억 안 나? 이번에는 그냥 먹지 말고. 잘 봐.

그녀는 꽁지가 쏙 올라온 귀여운 초콜릿을 연신 흔들어대며 나에게 나눗셈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었다. 나는 가끔 그녀를 바라보고 웃어주며 이해하는 척을 열심히 했다.

주말의 오후 하늘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구름에 가려졌던 햇살이 다시 거실의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었다. 햇살이 내 볼을 타고 그녀의 눈가에 흘러 들어갔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나에게 열심히 평행사변형의 넓이를 설명했다. 나는 숫자나 곱셈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폭포 같은 머리칼과 볼록 솟아오른 볼로 자꾸

눈이 갔다.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체리 같은 입술이 탐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말소리보다 나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었다. 그녀가 잘 이해했는지 나를 한 번씩 바라볼

때마다 그 쿵쾅 소리는 화창한 하늘에 뜬금없이 천둥이 내리치듯 온 몸에 내리쳤다.

-, 그럼 여기까진 이해했으리라 믿고, 그럼 문제를 한 번 풀어보실까?

-, 민지야. 으헤헤.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오면 안 될까? 으헤헤

-으이구, 이 녀석. 문제 풀 시간이 되니까 또 화장실 간다고 핑계 대는구만! 갔다 와!

수십 번의 만남과 수천 번의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이 설렘은 처음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보면 볼수록 설렘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진화해갔다. 자연 풍경이 담긴 도감 대신에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수십 개의 스케치북이 내 마음속을 가득 채워갔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그녀에게 잘 보이도록 머리를 매만졌다. 콧물을 지우고 세수도

해 보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눈에

묻은 얼룩을 지워보고, 코에 난 여드름을 아무리 짜 봐도, 한 폭의 수채화같은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만족스럽지 못했다. 차라리 그녀의 내면을 닮고 싶어 변기에 앉아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언덕을 뛰어 올라올 때보다 세차게 가슴이 뛰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좀 더 똑똑해지면 그녀가 나를 사랑해 줄까? 머리를 힘차게 때렸다. 이 몹쓸 장애인아.

너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한 대 더 때렸다. 그녀는 상냥하고 착하잖아. 너같이

모자란 놈이라도 혹시 알아? 그녀가 연민이 섞인 사랑을 베풀어 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