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이라는 것은 기표가 표상하는 tool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이미지는 기표의 표상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데리다 였던가? - '의미는 텍스트의 구조안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최종 결론은 항상 유보 상태다. 그것은 언제나 -계속 - 늘 미끄러진다'는 명제가 성립시킬 수 있는 조건은, 그러한 명제 자체가 유포한 모순 때문에 또한 언제나 늘 유보적이다. '의미의 비물질성'은 언어를 통해서는 결코 표상되지않는다. 언어의 장에서 '비물질성' 지속적으로 유보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무리 언어적 형식이 '은유의 축'을 형형하는 '자력장'을 발산하는 쪽으로 유도되더라라도, 언어란 '물질성'과 '관념성' 중의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매몰될 수가 없기 때문에서. 미술에서 '물질에서 사물성을 제거하고 오직 생명력'만을 추출하는 것이 - 이론적으론 가능하더라도 - 시는 언어의 한계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시는 물질을 제거할 수 없다. .
시에서는 '의미'와 '지시 대상'이 명확한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실패를 감내하는 도전'이 된다. 내가 보기에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시인 실패자다.
" 침묵은 말보다 앞서지만, 말로는 침묵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침묵할 수 없는 이유는 '욕망' 때문일 것,
'언어적 인식' 이전에 감각과 마음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져오는 '매혹'이 항상 언어 이전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 그런 욕망은 '이성 - 합리적 사고 '- 이전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 감각을 포착하기 위해서 시인들이 '중독'에 끌리는 것은 불가결하다. 중독이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을 불러오는지를 인식으론 충분히 안다고 치더라도, 시를 쓰는 그 순간 이미 시인은 '중독되어' 있다.
.....나는 지극히....건전하고.....평범하고...상식적인 수준에서...중독되 있을 뿐이다.... <디아제팜> 은 내 감각과 마음을 수면 아래로 강압적으로 끌어 내리진 않는다. 또한 나 자신도 ... .그 이상을 특별히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내 신체의 기관이, 그중에서도 '바라봄'이 '오브제'의 심층 아래 숨겨진 '유혹'에 가장 민감하게, 교응하기 위해선 나또한 수면으로 가라앉아야 한다. 수면아래 감지된 텍스트를 읽어내긴 위해선 '다른 감각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나의 수면 상태 속에 늘 깨어 있다.'
'
"몽유병자를 알아보는 사람은 몽유병자들 뿐이다. '
" 디아제팜이 나를 부른다.. 불편한 감각의 '쾌'에 이제 매몰되어야 할 시간."
나를 지켜보는 모든 분들께 안녕, 깨고 난후에 다시 "안녕:"
근데..잠 들기..싫다...이 상태로..계속...깨어 있고 싶다...
그래, 내가 자는 게 자는 게 아니야.
존나 중2병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