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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삶 속에서 우리들은 되돌아보고 나서야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현상은 의식적인 범위 내에서 보았을 때, 무척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어떠한 한 사건이 일어나는 데에도 무수히 많은 현상들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의식적으로 무언가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실상 불가능의 영역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상에서 인과관계는 사적인 자기의 위치성이 만들어낸 환영이지만, 위치성에 사로잡힌 사적인 자기는 인과관계가 허구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적 세계가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식 수준에 따라서 달리 다가온다는 사실은 윤회라는 한 가지 차원에 머무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 안에서 인간의 존재는 저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를 찾아간다. 스스로와 어울리지 못하고 적합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적대감과 부정한 기운을 느낀다. 


 본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무의식적 갈증은 무척이나 뿌리 깊은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상위 차원에 대한 맹목적 동경은 끌림의 형태로 나타난다. 더 많은 에너지와 사랑에 대한 열렬한 소망은 외부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오기를 바라는 의존적 심리를 자아내며, 이러한 태도는 끝내 사적인 자기의 자멸로 이어진다. 사적인 자기에게는 무척이나 불행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영적인 길에서는 행운이고 복된 일이다.  더불어 단순히 감각적인 부분에서 설명할 수 없는 끌림과 거부의 감정은 인간의 존재에게 오감을 넘어선 차원의 능력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의식적인 판단을 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내려진 결정은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에 대해 뼛속 깊이 실감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자 하는 일말의 호기심이 대상적 세계 안에 온갖 불행과 악행의 원천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된 것처럼 무지한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지 못하고 신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윤회의 세계는 사적인 자기의 입장에서 볼 때, 알 수 없고 신비로운 것들로 가득 찬 유원지로 비친다. 환을 참되다고 여길 때, 사적인 자기는 무지의 늪으로 잠식해 들어가고 스스로가 슬픔과 불행을 한 아름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언제나 더 많이 알고자 하고 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느끼고자 하는 마음은 대상적 세계와 분리된 채, 새롭고 신비로움이 가득한 모험을 끝없이 열망한다. 더 많이 원하는 것이 일종의 습으로 자리 잡아, 도무지 현 상황에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고 끝내 스스로가 파괴되기 전까지 욕망을 멈추지 못하게 된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마야의 환영에 사로잡혀 절망과 회의의 수렁 속에서 절규한다.  


사적인 자기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가 무엇인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마야의 환영에 사로잡히면서 평화와 고요를 깨뜨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애초부터 존재한 적이 없던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붙드는 순간부터 운명이 그려내는 멜로드라마가 상연되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모습을 다채롭게 바꿔서 보여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마야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대상적 세계 안에 갇히도록 마음에게 미끼를 던진다. 눈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자기 자신에게 에너지와 관심을 쏟기를 바라는 마야의 환영은 갖가지 감각적 미혹을 전면에 내세워 사적인 자기라는 위치성에 얽매이게 한다. 실질적인 주체가 아닌 객체는 언제나 주체의 관심을 받아먹고 산다는 점에서 제 스스로가 무척이나 나약하고 의존적이라는 것을 버젓이 드러내고 있지만, 지각의 환상에 사로잡힌 실재는 스스로가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세계 안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는 실재가 마야라는 환영에 얽매이면서 속박의 장에 제 스스로 갇힌다. 자유와 사랑을 가두는 철창은 허구이지만, 그것이 참되다고 믿는 마음이 감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착각하게 한다. 대상적 세계를 단 한순간에 창조하고 파괴할 정도 강력한 생각의 힘은 상상 속의 감옥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낸다. 스스로가 갇혀있다고 있는 믿음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상상의 감옥을 세운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유와 사랑을 발견할 수 없는 마음은 외부로부터 온갖 주의와 관심을 얻어내기를 갈구하며, 스스로에게 찾을 수 없는 사랑을 타자로부터 구하려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이미 사랑 그 자체인 존재가 무지로 인해 사랑을 갈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점차 거짓이 진실을 대체해간다. 분리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전개되는 모든 세간적 활동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업보를 낳을 뿐이며, 그 업보에 따르는 대가는 좋든 싫든 사적인 자기의 몫이다. 즉각적으로 그 자리에서 해소되지 못하는 업보는 언제나 기억의 창고 속에 인상을 남기고, 진실을 가리는 무지의 장막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사적인 자기가 쌓아 올린 업보가 해소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축적될 때, 점차적으로 세간적 삶 속에서 의도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균형과 조화가 흐트러질 때, 대상적 세계에서는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이러한 중용의 법칙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각자가 스스로가 처한 의식 수준에 따라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적절한 문제지를 부여받는다고 볼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적 세계는 마음 안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의 세계다. 왜냐하면 대상적 세계가 바로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의식 수준과 그에 해당하는 의도와 목적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대상적 세계는 다채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 마야의 환영이다. 마음은 사적인 자기를 붙들고 그것이 참되다는 믿음으로부터 에너지와 관심을 받아먹고 자라난다. 영에서 멀어지고 물질에 가까워질수록 대상적 세계는 나와 분리된 채로 받아들여진다. 스스로가 특별하고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이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보편적 의식에 대한 무지로 이어지고 이는 윤회의 세계 안에 존재를 가두는 힘으로 작용한다. 모두가 '그'이지만, 사적인 자기는 '나'만이 옳고 참되다는 분리와 구별 안에서 살아간다. 순진하고 무지한 마음은 지각의 환상이 만들어낸 거울의 세계 안에서 일체가 자기 자신의 반영에 자니자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이 오고 가는 기나긴 꿈속에서 거듭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고 대상적 세계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죄와 공덕이라는 업보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라는 판단이 실상 사적인 자기가 지니고 있는 상대적 관점임을 깨닫지 못하는 윤회의 세계 안에서는 스스로의 생존을 돕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반면, 스스로의 생존에 해를 가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상에서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그'이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를 알려는 충동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대상적 세계는 물질에서 보편적 의식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점진적 진화와 창조를 그려내고 있는 한 편의 영화다. 지상적 존재는 

스스로가 지닌 유한한 생명력을 창의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존재론적 의무를 떠안고 있다. 분리에서 연결로의 이행을 도모하는 이러한 창조의 전 과정은 신이 스스로가 신임을 깨닫는 목적을 담고 있다. 이전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에는 매번 기존의 한계와 제약을 넘어서는 창의성의 획기적인 구현을 요구한다. 이전 단계에서 단순한 부정으로 보이는 것이 실상 다음 단계에서 더 큰 맥락으로의 긍정을 내포한다. 자기부정의 표면은 단순히 종의 번식을 이어나가기 위한 성적 충동이지만, 그 심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즉 불멸을 향한 앎의 의지다. 힘은 더 큰 맥락으로의 도약을 위해 쓰일 때, 부분을 완전히 전체에 녹여낼 수 있으므로 무의식적 억압의 잔재를 남기지 않는다. 이는 사적인 자기가 완전히 해소되어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보편적 의식이 완전히 몸과 분리되어 차원이 없는 절대에 안주한다. 


 드넓은 대양은 무수한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무한대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다. 사적인 자기는 대양에서 일어나는 파도의 일렁임에 지나지 않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정체가 대양임을 자각하면서 드넓은 대양에 흡수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구와 이를 달래주는 일을 사적인 자기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중대한 사안이 된다. 스스로가 본래 드넓은 대양을 알지 못하고 파도의 일렁임에만 완전히 매몰된 존재에게 개별적 육체는 세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육체의 본성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급급한 상태는 완전히 무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이며, 신이 물질 속에 파묻혀서 그 실체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종종 직면하게 된다. 물론 일체는 신이고, 신은 어디에나 깃들어 있지만, 이는 내면에 오로지 신만이 존재할 때에 인식 가능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욕구를 채워주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이러한 욕구에는 다함이 없고 결국 스스로가 끝내기 전까지 욕구의 이어짐은 줄기차게 계속될 거라는 점이다. 육체의 생존을 포기하고 완전히 무욕의 상태에 들어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욕구를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모두 다 욕구에 얽매이는 것은 똑같다. 다만 여기서 주안점은 욕구는 몸과 마음에 해당하지, 본래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욕구가 기능한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욕구보다 앞서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욕구를 이해하고 아는 자는 욕구에 종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를 아는 자는 존재에 종속될 수 없다. 물질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창조와 진화의 여정은 실상 기나긴 꿈에 지나지 않다. 왜냐하면 지옥과 천국, 깨달음 그 모두가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꿈이 바로 생시와 깊은 잠, 꿈에 해당하며, 지고의 실재는 그 너머에 '상태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보편적 의식의 출현은 더할 나위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결국 그마저도 미묘한 분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실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능력에는 다함이 없지만, 이마저도 일시적인 것에 자니자 않기 때문에 덧없이 사라질 꿈에 불과하다. 결국은 세계도, 나라는 존재도 모두 꿈에 해당하므로 인생의 총합은 그 누구든 간에, '영'이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본질적으로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이 모두 똑같다. 꿈은 제 아무리 무엇을 덧붙여도 꿈일 뿐이다. 


 앎이 문제의 시작이다. 보편적 의식의 출현이 생기에게 무척이나 버거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존재하려는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고 삶을 향한 의지를 긍정한다. 삶을 향한 의지가 자연과 존재에 사로잡힘으로써 시작된 시공간의 출현은 지고의 실재에게 수많은 제한과 속박을 부과했지만, 결국 그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해체의 수순을 밟는다. 사적인 자기가 부여한 업보의 장과 인간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집단의 장은 최종적인 관점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임이 밝혀진다. 결국 그 모든 것을 붙든 것은 존재를 향한 사랑에 다름 아니며, 신이 스스로를 알려는 충동으로부터 시작된 이원성이다. 끝없이 무한한 시간 속으로 나아가는 의지가 스승의 은총에 힘입어 갑작스레 멈추면서 기존의 흐름을 역행한다. 감정적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는 지옥의 차원을 지나고, 인간의 존재로서 더할 나위 없는 풍요를 누리는 천국의 차원도 지나간다. 완전한 지복, 신과의 합일을 체험하는 깨달음의 차원도 결국 일시적인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완전한 전멸에 이른다. 갑작스러운 동요와 함께 시작된 생의 충격은 드러난 기쁨의 원천이지만, 결국은 실재와의 분리일 뿐이다. 보편적 의식이 스스로를 완전히 자각함에 따라 만개한 연꽃은 영롱한 자태를 선보인다. 지복의 산물인 육체를 생시의 꿈에서 구현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는 신을 향한 일관된 헌신과 숭배를 통해 매 순간 지복을 드러낸다. 다만 무의식적 억압에 따른 무지의 축적이 스스로가 이미 지복의 상태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다. 삶 속에서 온전히 지복이 드러나기 전까지, 삶은 온통 신이 전해주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신이 스스로가 신을 보고 있는 자각의 상태가 바로 지복이다.  

 

 완전히 신과의 합일 속에서 앎 그 자체가 된 존재는 더 이상 생각과 감정의 일렁임이 일어나지 않는 신성한 무관심 속에 있다. 스스로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아는 완전한 수용과 내맡김 속에서 보편적 생명기운은 즉각적으로 허공 속으로 녹아들어 분리의 느낌과 구별 의식을 자아내지 않는다. 거짓된 위치성을 붙들지 않는 단순하고 간결한 태도는 가을밤 서늘한 공기처럼 집착과 미련이 없는 청량한 기운을 품고 있다. 보편적 의식이 벌이는 역동적인 춤사위 사이를 오고 가는 절묘한 부드러움은 완전한 자기 이해에 도달한 초연한 태도로부터 비롯되는 신적 성품이다. 초점 없는 눈동자 속에 담긴 강렬함이 세계를 극복한 그의 의지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그 어떠한 위치도 고수하지 않는 능동적이고 열린 마음은 매 순간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창조와 파괴의 파노라마를 본다. 의식의 빛과 함께 찾아오는 존재의 맛은 겉보기에는 달콤함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시큼한 맛을 품고 있는 레몬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에서 그에 상응하는 지복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