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이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적절하지만-왜냐하면 선택된 자도 피조물일 뿐이며, 따라서 그가하는 모든 것이 신의 요구에 비하자면 무한히 뒤처지는 것이기 때문에-그래도 선택의 표지(결과물)로는 불가결한 것이다.
선행은 구원을 얻는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구원에의 불안을 떨쳐버리는 기술적 수단이다. 근본에있어서 이것이 실천적으로 의미했던 것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것,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다. 매순간 선택되는가 버림받는가라는 양자택일의 앞에서 체계적인 자기검토에 있는것이다. 개혁파 교회와 종파에서 점차 명료하게 형성되어간 이 사고방식에 대해서 루터파에서는 '위선'이란 비난을 항상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칼뱅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이고 인간적인 위안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가톨릭과 루터주의자들 처럼 결함과 경솔의 시간을 다른 시간의 고양된 선의지로 보상한다는것을 바랄수도 없었다. 칼뱅주의의 신은 신도에게 개별적 선행을 요구했을뿐 아니라 체계로 끌어올려진 선한 생활을 요구했다. 죄, 회개, 속죄, 평안, 또다시 새로운 죄 사이의 지극히 인간적인 가톨릭의 기복이라든지. 전 생애의 결산을 현세적 형벌로 속죄하고 교회의 구원 수단을 통해 청산한다는 것 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도'의 삶은 오직 초월적 목적인 구원을 향해 있으며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떄문에 현세의 과정에서 철저히 합리화되고 오로지 한가지 관점 즉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라는 관점에서 이보다 더 절실하게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칼뱅주의는 발전 과정에서 적극적인 것을 추가했다. 즉 세속적 직업 생활에서 신앙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로써 칼뱅주의는 종교적으로 지향된 광범한 층의 사람들에게 금욕에의 적극적 동인을 제공했고, 자신의 윤리를 예정설에 근거시킴으로써 수도승의 탈속세적인 종교적 귀족주의를 영원한 과거로부터 신에의해 예정된 성도들의 세속적인 종교적 귀족주의로 대체시켰다. 변경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진 이 귀족주의(예정설)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버림 받은 여타의 인간들과 원칙적으로 메울 길이 없고 밑이 보이지 않는 소름 끼치는 심연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외면적으로 세상과 분리되어있는 중세의 수도승보다 훨씬 더 한것으로서 모든 사회적 감각에 예리하게 패어있는 심연이다. 왜냐하면 선택된 자, 그리고 성도가 갖는 신의 은총에서 보자면 이웃의 죄에 대해 동정적으로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의 표시를 가진 신의 적으로서 증오와 경멸을 보내는 것이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이 때로는 강화되어 분파 형성을 일으킬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금욕적 생활태도가 항상 의거할수있고 또 분명 필요로했던 확고한 규범은 물론 성서를 통해 받았다. 칼뱅주의의 '성서주의' 중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은 신도들에게 결코 도달할 수없지만 타당한 이상적 규범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칼뱅주의에서 감정의 요소를 배제하는 증언
감정이 앙양되면 신앙은 직접적으로 히스테릭한 성격을 갖게 되고, 다음에는 수많은 사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신경병리학적으로 설명되온 바있는 반半의식적 종교적 황홀 상태와 '신과 멀어진' 듯이 느껴진다는 정신적 허탈의 시기가 교체되어 일어남으로써, 결국 청교도의 체계화된 신성한 삶이 인간에게 부과한 냉정하고 엄격한 규율에 정반대 되는 것이 육성되었다. 즉 칼뱅주의자들이 합리적 인격이 '감정'을 막기 위해 세운 '장애물'이 약화된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中
9조 (자유의지에 관하여) 3항: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정신적 선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인간의 구원에관한 무능함을 강조
따라서 선을 완전히 저버리고 죄 속에서 죽는 자연적 인간은 회개할 수 없으며 아니면 회개를 준비할 수조차 없다.
3조 (신의 영원한 결단에 관하여) 3항: 신은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해 당신의 결단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삶으로 예정하셨고 또 어 떤이는 영원한 죽음으로 예정하셨다.
5항: 인류 중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은, 세계의 토대가 세워지기 전에 신이 당신의 영원하고 불변적인 의도와 은밀한 결의와 임의적인 의지에 따라 그리스도 중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선택한 자들로서 이는 순순하게 자유로운 은총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 예를 들어 신앙이나 선행 또는 이것 중 하나에 대한 지속 그 밖의 피조물에게서 볼 수있는 다른 어떤 것 등에 대한 기대가 그러한 선택의 조건이나 원인인 것은 결코 아니다.
10조(유효한 소명에 관하여) 1항: 신은 당신이 정하신 생명으로 정하신 자들, 오직 그들만을 당신이 정하신 알맞은 시간에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유효하게 소명하심을 기뻐하신다. 그리하여 신은 그들의 돌처럼 굳은 마음을 치우시고 보다 신선한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고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그들을 의로움에 정하신다.
5조(섭리에 관하여) 6항: 의로운 심판자이신 신꼐서 그 이전의 죄 때문에 눈멀게 하시고 모질게 만드신 악하고 신 없는 자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신은 그들로부터 그들의 오성을 밝히고 감동케 할 수있는 당신의 은총을 거둬들이셨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갖고 있던 천성도 거둬들이사 그들의 타락이 죄악의 기회를 만들 그러한 대상과 그들을 관계시키며 더 나아가 그들을 자신의 욕정, 세계의 유혹, 사탄의 힘 등에 맡겨버리신다.
종교적 구원 감정이라는 현상이 다음과 같은 확고한 인상과 결부되어있다. 즉 모든 것은 객관적 힘의 유일한 작용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그 자신의 가치에 따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의식의 끔찍한 발작으로 폭발되는 강력하고 희열에 가득찬 확신이 아무런 매개없이 그들을 엄습하여, 이러한 엄청난 은총이 자기 자신의 노력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이나 기원의 공적이나 성질에 관련될 수 있다는 생각의 가능성을 근절시켜버렸던 것 같다.
예컨대 신에게 버림받은 자가 자신의 운명이 부당하다고 호소하는 것은 짐승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불평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메울 수 없는 심연으로 신과 갈라져 있으며, 신이 당신의 위엄을 영광케 하기 위해 다른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오직 영원한 죽음만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있는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저주받았다는 사실뿐이다. 이러한 운명의 결정에 인간의 공적이나 죄과가 함꼐 작용한다고 생각 하는 것은 영원한 과거부터 부동의 것인 신의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결정이 인간의 관여로 변경될수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불가능한 생각이다. 신의 결정은 번복될 수 없으므로 신의 은총은 그 은총을 받을 자가 잃을 수 없고, 그은총을 거부당한 자가 얻을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그 격양된 비인간성을 통해 그 장엄한 결론에 몸을 맡긴 한 세대의 감정에 낳은 결과는 무엇보다도 전대미문의 개인적인 내적 고립감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에게 결정적이었단 삶의 관심사, 즉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인간은 태초로 부터 정해져있는 운명을 향해 홀로 길을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설교자도 도울수없다. 왜냐하면 오직 선택된 자만이 신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례가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신이 명령한 것이므로 엄수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의 은총을 얻는 수단이아니라 단지 주관적인 신앙의 '외적 보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도 도울수없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를 멀리하는 자는 결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에 속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교회밖에선 구원이 없다'라는 말이 유효하지만, 신의 버림을 받은 자도 (외적인) 교회에는 속하며 또한 속해야 하고 규율에 따라야 하지만 그것은 구원을 얻기위해서가 아니라(이는 불가능하다) 그들도 신의 영광을 위해 신의 계율을 지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조차 도.움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 죽은 것에 불과하며, 신은 영원한 과거부터 선택된 자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것 즉 교회와 성례에 의한 구원의 절대적 폐지는 가톨릭과 구별되는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었다.
독실한 청교도는 매장을 할때에도 모든 종교적 예식의 흔적마저 거부했고 이웃을 노래나 음악도없이 매장했다. 그것은 단지 마술적.성례적 종류의 구원효과 즉 '미신'을 믿지 않기 위해서였다. 신이 은총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자에게 다시 은총을 얻게 해주는 마술적 수단이 없을 뿐 아니라 도대체 수단이라는 것이 있을수 없었다.
모든 피조물이 신과 무한이 멀리 있고 또 무가치하다는 단적인 이론과 결합되어 이러한 인간의 내면적 고립은 한편으로 문화와 주관적 종교성에 내재하는 모든 육체적,감정적 요소에 대한 청교도주의의 절대적인 부정적 태도의 근거가 되었고 따라서 모든 감각적 문화 일반에 대한 근본적 혐오의 근거가 되었다.
예정설도 결국은 우리가 분석하려는 신에 대한 믿음의 배타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예를 들어 특히 영국의 청교도적 문헌에 현저히 나타나는 인간적 도.움이나 우정을 신뢰하지 말라는 경고가 그러하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믿지 말라는 깊은 불신을 온건한 백스터 조차 권하고 있으며, 베일리는 아무도 믿지 말고 자신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것은 절대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단적으로 충고하고 있다. 오직 신만이 믿을수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분위기와 관련해서, 루터 주의와는 정 반대로 칼뱅주의가 극성인 지역에서는 칼뱅 자신이 단지 성례가 오해된 소지가 있다고 하여 위험시했을 뿐인 개인적 참회가 소리도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사건이다. 그러한 종교심의 작용방식의 징후로서 의의가 있다. 그러한 또한 그 윤리적 태도에 대한 심리적 발달 자극으로서 의의가 더 크다. 감정적으로 강화된 죄의식을 주기적으로 '진정시키는' 수단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리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우선 내세來世가 더 중요할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현세적 삶의 모든 관심보다 훨씬 확실했던 시대에 이러한 이론이 감수되었는가 하는것이다. 분명히 하나의 문제가 모든 신자에게 떠올랐을 테고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뒷전에 밀어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즉 나는 선택되었는가? 선택되었다면 나는 그 선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칼뱅)는 원칙적으로 타인의 행동을 보고 선택되었는지 버림받았는지를 알 수있다는 생각을 신의 비밀에 관여하려는 주제넘은 시도라며 비난했다. 선택된 자는 외적으로 현세에서 버림받은 자와 구별되지 않으며, 선택된 자의 모든 주관적 경험도 '끝까지' 지속되는 신앙이라는 유일한 예외 말고는-'성령의 장난'에 따라-버림받은 자에게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선택된 자는 신의 보이지 않는 교회 안에 있는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광범한 층의 평신도들에게는 구원의 '인식'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되었고 예정설이 확립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선택된 자'에 속함을 인식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이 곧 제기되었다. (중략) 첫째는 자신을 선태된 자로 여기고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서 거절하는 것이 단적으로 의무화된다. 왜냐하면 자기 확신이 결여되었다는것은 불충분한 신앙의 결과이고 따라서 은총이 불충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음을 '확실히 하라'는 사도의 권고가 여기서는 일생의 투쟁에서 자신의 선택됨에 대한 주관적 확신과 증명에 도달하라는 의무로 해석되었다.
둘째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위한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 부단한 '직업 노동'이 엄명되었다.세속적 활동을 통한 '선행'의 수행은 그러한 확신이 입증되는 매체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서 소명(직업)에서의 성공은 선택받은 자들 중 하나라는-결코 그 하나가 되는 수단이 아니라-'신호'가 되었다. 부의 축적은 착실하고 근면한 경력과 결합되는 한에서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즉 부가 지탄 받는 것은 오직 게으른 사치나 자기 탐닉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경우 뿐이다.
더욱이 프로테스탄트의 도덕적 책임은 누적적이다. 즉 가톨릭의 삶을 통하여 반복되는 죄, 회개, 용서의 순환이 프로테스탄티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극단적인 비인간성의 행태로 이 이론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엄청난 일관성에 빠져버린 한 세대의 삶에 한 가지 결과를 낳았음이 분명하다...그것은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었다'
출처-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 자본주의정신, 앤서니 기든스의 해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나의 생각:
장로교는 개신교의 분파중에서도 가장 실천주의적이며 철저하고 지속적인 종교윤리의 판단기준을 지닌 엄격주의자들
장로교에서 교회의 역할은 외부인과의 단절로서 내적고립감에 빠진 선택받은 성도들의 교감을 위한 사교모임, 기독교적 윤리와 금욕적인삶의 실천과 현세의 충실한생활을 서로를 감시하는 효과를 가짐 (죄의사함과 회개의 감정행위를 고조하기위한 위한 마법적인 장소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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