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일종의 ‘가짜 전쟁’이지만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공격성이 실제 폭력으로 발현되는 것을 막고, 안전한 방식으로 배출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완충 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축구나 야구, 격투기 같은 종목에 몰입하는 동안 사람들은 경쟁·투쟁·승부욕이라는 본능적 충동을 현실에서가 아니라 경기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이것은 사회 전체로 보면 폭력을 줄이고 일상의 갈등을 완화하는 기능을 한다.


포르노 역시 비슷한 맥락의 대체물이다. 가짜 성행위를 통해 남성의 성욕과 공격성을 어느 정도 배출할 수 있다. 성욕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 사회·윤리적 비용이 크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는 안전한 소비물이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안정에 유리하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공격성과 성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선행 욕구 혹은 도덕적 욕망이 존재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고, 그런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도덕성에 만족감을 느끼며, 동시에 평판을 얻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문제는 이 선행 욕구는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면 개인에게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시간을 쓰거나 돈을 쓰거나, 혹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드라마나 예능, 연예인의 서사 같은 데 몰입함으로써 일종의 ‘가짜 선행’을 소비하고 그것으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드라마 속 착한 주인공을 응원하면서 마치 자신도 그와 같은 도덕적 선택을 한 사람처럼 느끼고, 비극적 인물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얻는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에게 과도하게 감정 이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비극적 서사에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를 “정의로운 시민” 혹은 “착한 사람”으로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선행 시그널링’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평소에는 그런 태도를 실제 관계나 행동에서 보여주지 않으면서, SNS나 여성 앞에서만 과하게 상냥한 척하는 행동은 결국 ‘보여주기용 선행’에 가깝다. 실제 약자를 돕는 것도 아니고, 성평등을 위한 구체적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선한 남성이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데 그친다. 그래서 비판을 받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훨씬 더 많다.


SNS에서 난민·아동·사회적 약자를 위해 ‘좋아요’만 누르면서 실제 후원이나 봉사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행동


기부 캠페인 방송을 보며 감동받고 울지만, 뒤로는 기부 한 번 하지 않는 행동


유명인의 사생활 문제에 분노하면서 정작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아무 관심도 주지 않는 행동


학생·20대가 정치적 도덕성을 자랑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약자에게 무관심한 행동


이 모든 것은 선행 욕구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가짜 선행 소비물’ 속에서 소모되는 현상이다.


스포츠를 통해 공격성이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게 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이익이다. 그러나 선행 욕구가 드라마·연예인·SNS 같은 대체물에 소비되면 사회는 그만큼 손해를 본다. 선행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져야 공공의 이익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짜 선행만 소비하고 자기만족을 얻으면, 실제로 필요한 선행이 사라진다. 그래서 이 현상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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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에서 이런 현상은 왜 빈번할까? 


1 ‘실제 도덕성’보다 ‘자기 이미지’가 더 중요한 사회 구조


사람들은 실제로 약자를 배려하는 것보다 ‘나는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


현실의 약자는 불편함을 주기 때문에 외면된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사회 부적응자 정신질환자와 같은 현실에서 마주하기 쉽지만 불편한 약자는 사회가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안전하게 동의할 수 있는 ‘이상적 약자’를 만들어낸다


정치적 논란이 없는 ‘순수한 희생자’이며 완벽하게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


이 ‘이상적 약자’는 사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희귀한데, 사람들은 이런 대상에게만 감정이입을 하고 “나는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유지한다.


2. 특히 한국에서 그 현상이 강한 이유


-체면 중심 문화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집단적 시선 의식

한국에서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내 도덕성은 ‘남에게 보여지는 형태’로만 존재한다.


-도덕적 행위보다 도덕적 연출이 더 유리함

실제 약자를 도와봤자 피곤하고 보상이 없다.

반면 “이상적 약자에게 말 몇 마디 해주거나 SNS에서 좋은 말 하는 것”은 싸고 편하다.


-모순을 직면하기 싫어함

“나는 착한 사람인데 현실 약자를 왜 싫어하지?”라는 질문은 불편하니까,

애초에 ‘적합한 약자’만 골라서 배려하고 나머지는 외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속인다.


3. 그래서 한국 사회는 ‘선별적 연민’을 구조적으로 장려하며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현상이 생긴다.


-약자를 위하는 척은 열심히 하는데 실제 약자는 돕지 않는 것이다.

-불쾌한 약자는 약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언론·교과서에서도 ‘깨끗하고 말 잘 듣는 약자’만 홍보한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소비하며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