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주체가 서로 다른 표상물 사이의
관계표상을 표상물로 삼는 순간부터,
그 관계라는 층위의 피상적 층위차원에
무의식적으로 종속되는 차원 스키마가 형성이 된다.
사고 주체는 물론, 이 표상물에 대한 담론이
질서를 갖추고 공론화되어 퍼지기까지
해당 차원 스키마는 사회 전반에 걸쳐
당연시 여겨지게 되며,
사실상 그 존재 자체도 비가시적으로
은폐되어 버리는 숨겨진 청사진으로 기능한다.
차원스키마는 차원 내의 표상물로 작용하는
개별 요소들의 이데아에서 비롯되는,
개별적 선험성의 개입을 가능한 배제하게 되며,
오직 해당 차원의 피상적 맥락으로 역학을 구성하고
일정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모형을 구성한다.
이 대표적인 모형의 예시가 바로 변증법이다.
융이 제시한 심리적 휴리스틱 모델 중
Ni(직관내향화)의 개념이 이러한 비가시적 패턴에 대한
인식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차원 스키마의 구조와 역학에 대하여,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해당 차원에 깊이 동기화된 사람일수록,
향후 일어날 일이나 귀결될 결론을
예측하는 직관이 발달했기에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동기화될수록 통찰력 있다는건 전혀 동의 안됨 인간에게 아방가르드 현대 예술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점이기도함
개인적으로는 동기화될수록 파괴에 대한 감각 역시도 비례해서 커진다고 느낌. 왜냐면 구조에 동기화될수록 그 구조를 지탱하는 무게중심점을 잘 파악하게 되고, 그것이 무너지는 그림 역시 머리 속에 그려지기 용이하니까
동기화로써 얻는 보상체계에 길들여진 경우라면 님의 말의 시사점이 있다고 봅니다.
@ㅇㅇ 맞아 근데 그 또한 이미 시스템 세팅된 서사일수 있자나 변증법적 ㅋㅋ
@ㅇㅇ 굿
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는 같다고 생각함. 갑각류가 탈피를 하듯, 결국 기존의 스키마가 깨져야 새로운 스키마를 만들 수 있기 때문. 이런식으로ㅡ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인데, 학자들이 굳이 분리시킨 이유가 뭘까. 그리고 바로 그런 관점에서, 동기화는 통찰력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생각함. 통찰력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뿐, 바로 그렇기에 오직 통찰력이라는 운동만이 있을 뿐. 어떤 틀에 갖힌 기준을 세우고 통찰력의 급을 나눌 수는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종합.
사실 저도 잘 모름. 구조주의랑 후기구조주의가 정확히 뭔지 모르는데, 그냥 해본 말 ㅋㅋ
본문에서 이야기한 통찰은, 구조와 탈구조라는 초월적 관점에서 보단 일반적으로 특정 구조가 가치천장 및 회로로 기능하는 한정된 세대 내에서 통용되는 표현으로 쓴것임. 한마디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먹고, 영화도 많이 본 놈이 클리셰도 잘아니까 야 너 고기좀 먹어본놈이구나 소리듣는단 이야기. 진정한 의미의 통찰이란 깊이와 범위를 확대한다면 그 말이 맞지.
@대수확 구조주의는 사회든 사유든 그냥 이미 어떤 회로나 물길에 따라 진행방향이 정해지듯 되어 있단거고, 반대로 탈구조주의는 단순히 우리가 선행하는 구조에 의해 후행적으로 배열되기만 하는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 그 흐름을 역행할수도 있고 구조가 포괄못하는 다양성과 변수를 창출할수있단 의미로 생각함
@대수확 전자로 치면 사실상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기에, 개인의 자율적, 주체적 운동이 별 의미가 없음. 관념이란 거대한 물살에 기투하는 정도니까. 반면 후자는 개인의 역동성이 가능. 특히 의미규정이 시공간적 제한을 넘어간단 측면에서 변증적인 구조에 의존하기보다, 개인들의 의지가 이데아를 완성해나가는 주체로 기능할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인듯 싶음.
@대수확 단순한 무자비적 해체주의나 상대주의 움직임은 들뢰즈, 샤르트르, 데리다같은 이들이 결국 가리키는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 모더니즘과는 별개의 반권위적 정념에 가깝다고 생각함
@ㅇㅇ 친절한 전개 감사.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발전된 형태인듯한 인상을 받네. 그냥 느낌상, 후기 구조주의에 마음이 감.
@대수확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해상도가 더 구체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함. 양쪽 어디에 무게를 두든지, 상호 보합적으로 진자운동하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