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서 ‘인식‘이란 크게 네 가지 차원으로 분리해서 분석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차원의 인식은, 직관에 의한 표상의 인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은 대상이 어떠한 작용, 예를 들어 무언가를 시야를 통해 확보하거나, 만지거나 기타 상호작용을 통하여 대상을 일차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인식은, 일차원적 인식으로부터 무언가 ’가치‘ 혹은 ’의미‘가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예시로서, 죽음을 아는 것은 일차원 적 인식이지만, ‘죽고싶다’는 2차원적 인식이다.
이는 ’이유‘로부터 발생하는 인식인데, 죽음은 경험할 수 없고, 사변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는 주관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표상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사변적인데 주관할 수 있는 이유는 ’인식‘에 있다.
그렇기에,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주관의 한계다.
세 번째 인식은, 인식의 인식이다.
말장난 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예시로서 “나는 왜 죽고싶어 하는 것일까?”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세번째 인식의 이유는 ‘정합성‘, 즉 ’이유’를 찾는 형식의 인식이다.
즉, 주관한 객체와 표상의 객관된 표상의 객관이다.
”그렇다면, 의지의 객관인 표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표상에 대한 객관을 통한 이유를 뜻하고 있는 것이기에 두 차원 낮은 단계의 질문이다.
네 번째 인식은, 세 번째 인식의 인식이다.
여기서 부터는 정합성, 즉 이유를 찾는 이유에 대한 해석을 하는 대상의 분석이다.
즉, 이는 쉽게 말해 논리학은 세 번째 차원의 인식이고, 이를 생각한 대상의 사고의 이유를 찾는 고찰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은 표상의 의미를 찾고 이를 해부한 대상의 고찰의 관찰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높은 단계의 인식은 존재할 수 있으나, 그것에 대한 의미와 이유는 세 번째 인식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네 번째 인식부터는 의미의 부재이다.
그렇다면, 이 ‘인식’을 서술하고 있는 나는 다른 차원의 인식으로 인한 고찰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있어서 나는 세 전째 인식에 있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이 세번째 인식에 대한 질문은 네 번째 인식에 속하게 된다.
네 번째 인식이 대한 고찰은 다시 두 번째 인식으로 내려간다.
그렇기에 ‘인식‘의 한계는 네 번째 인식에서 끝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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