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변증법적 행복과 현대적 의지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논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제시한 ‘물자체’를 쇼펜하우어가 계승하여 ‘의지’라는 개념으로 해석하여, 인식론적 해석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저는 이 ’의지‘의 개념에 집중하여, 삶과 의지는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개념으로 행복을 설명하기에 알맞는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행복을 논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맹목성은 너무나 많은 행복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생명체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의지’의 개념을 계승하여 인간의 의지는 맹목적이지 않은 자의성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재해석한 ‘현대적 의지’입니다. 인간의 자의성을 논문에서 논하였고, 인간의 행복은 결핍을 채우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적 의지’로 재해석한 이유는, 쇼펜하우어가 삶을 살았을 당시 아무리 그가 무신론자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진리‘에 있다고 보았었습니다. 이는 즉, 삶을 살아야할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삶의 이유가 되는 것 중 하나가 ‘행복’따위라면, 만약 그게 삶을 살아야 할 목표라면 저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는 보편성을 전재로 하여 특수성이 없어야 하는데, 저에게 있어서 행복은 특수성이 허용되는, 즉 ‘행복하면 안되는 사람과 행복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가정을 하니, ’진리‘라는 사변적 존재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택하려 했습니다.
허나, [비판](부록2)에서 저는 자크 라캉의 결핍(lack)과 제가 논문에서 논한 결핍(deficiency)를 나누어 비판하는 도중,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 해석에 대한 본능에 대해 알아차렸습니다.
진리의 보편 추구성과 이분법적 분리 본능 분석의 시발점입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즉 맹목적으로 어떠한 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본 것은 ‘인식‘이라는 변수인데, 결핍의 인식은 인식된 순간부터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상태를 ‘불행‘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즉, ’인식’이라는 변수는 본능의 맹목성에서 자의성으로 해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 ‘맹목성을 기반으로 인식을 기점으로 자의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논리학적으로 참과 거짓의 분석은 이성적인 것 같지만, 곧 본능의 발현이자 맹목성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선험적구분과 후험적 구분 등 어떠한 명제나 사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본능의 발현’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선험적 구분과 후험적 구분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명제는 ’과정‘으로서 봐야한다고 논합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선험성과 후험성을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시공간의 틀입니다.
이 과정의 존재가 곧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과정의 정의는 두 개입니다. 하나는 선험과 후험사이에 새로운 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이는 인식론적의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 즉 행복을 위한 과정입니다. 이는 인식론적이 아닌 말 그대로 ‘과정‘입니다.
제가 여태 써온 글들이 대부분 하나로 엮여 새로운 철학적 장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론의 이름을 ’인류인식과정’이라고 임시로 부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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