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자고로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존재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것과 인과관계의 산물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존재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존재는 결핍이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의 기저입니다.

대상(동물)의 기저는 결핍과 그것으로 인한 맹목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신생아, 갓 태어난 동물 등 선험적으로 주어진 본능이 아니라면 형용될 수 없는 행동에는 인과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결핍입니다. 

즉, 맹목성은 결핍의 산물입니다.

여기서 결핍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오독할 여지가 있기에, 제가 생각하는 결핍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결핍은 가치중립적 상태의 ‘본능’이며, ‘존재’의 기저입니다. 결핍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입증으로는, ‘인식’전까지 결핍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결핍은 인식되는 순간부터, 언제 채워질지 모른다면 이는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입니다. 

 제가 불행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다시 한 번 신생아를 생각해 보자면, 소통의 수단의 부재로 인한 울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신생아는 결핍이 생기면, 행동으로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울음의 기저에는 결핍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핍‘의 존재의 기저로서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아야합니다. 인간의 기저가 결핍인데, 기저의 기저를 찾자면, 이는 ‘원인’입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핍이 있습니다. 무궁무진한 원인의 결과로 인해 초래된 결핍은 불행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의 기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앞서 말 한듯이, 누군가의 결핍이 낳은 산물입니다. 아이를 갖는 욕망이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을 저지하기 위한 산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그 전에 나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이 나를 필요로 하였는가? 반복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 다릅니다. 필요로 하는 대상의 차이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으로는 두 개가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으로는 ’의지‘의 맹목성의 발현이고, 두 번째로는 과학적으로 세포의 에너지 공급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존재란 결핍을 메우기 위한 맹목적 운동이며, 이러한 존재의 필요성은 형이상학과 과학, 그 어떤 논리로 보아도 부정하기 어려운 '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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