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생각하는 삶이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로는 맹목성에 지배당하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으로부터 ’이유‘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즉, 나는 이유가 없는 맹목적인 본능에 따르는 인간이 되고싶은 게 아니였습니다.
이 ’이유‘가 있어여만이 삶에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이유가 있어야 비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살 ’이유’가 없는 삶은 저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저에게 있어서 ’이유‘란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체가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신‘이 존재해야만이 인간의 삶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종교’라는 개념보다 ’신’의 존재의 ’요청’에 가까운 사람이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는 즉, 삶의 ‘이유’란 저에게 있어서 사변적입니다.
제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유는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삶을 살아야 하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진리‘란 자고로 보편성의 극치, 즉 특수성이라는 것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모두에게 삶의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예시로서, 행복이란 행복해서는 안되는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 행복을 추구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생각하면 이는 특수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삶은 고통이다‘라는 전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 이유로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맹목적으로 삶을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쇼첸하우어의 사상을 오독한 것이 아닌,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진리’의 보편성을 약간은 배제하여 나에게만 적용된다면 그래도 살만한 의미가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 나름대로의 ‘진리‘는 ’사람은 죽는다’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즉, 맹목적인 삶을 거부하는 인생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은 ’자유’의 가치가 상당부분 저에게 있어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자유‘의 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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