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들어왔듯 데카르트, 니체, 프로이트는 의심의 3 대가라고 불리운다(원래는 데카르트가 아닌 칼 맑스가 들어갈 것이나 자의로 뺏다. 멸공).

그런데 나는 이들이 쓰는 방법을 그 책을 읽은 이들이 정말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일부 독자가 위 3명의 철학자 서적을 읽고 하는 것은, 의심의 3대가가 하는 의심방법이 아니라

마치 요즘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부정선거 음모론식, 또는 타진요식 진실탐구방법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실탐구는 ⓛ 자신의 오감을 통한 대상에 대한 지각에서 시작해서 똑같이 자신의 오감을 통한 대상에 대한 지각으로 끝난다. 그런데 똑같은 현상을 두고도 자신의 오감이 주목한 부분만 본다. ② 증명을 하면, 그 증명에 대해서 또 의심하고 따라서 끝없는 증명이 요구된다 ③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오감으로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상대의 증명은 자명해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여야 확신을 갖고 인정한다 ④ 한편 자신과 똑같은 의심 즉 증명자에 대한 의심을 품은 사람들은 같은 동지이며, 이들을 통해 끊임 없는 의심이 확산되고 계속된다. ⑤ 자신의 상황을 증명자에게 대입시킨다 ⑥ 단어에 묶여서, 단어모양이 달라지거나 처음의 말에서 의미가 벗어나면 말을 바꿧다고 한다. 즉 발화자가 발화 당시에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을 동원하여 표현하여도, 그 빗대어 표현한 단어를 주목하고 빗대어 표현한 대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빗대어 표현한 바에 묶여있다. ⑦ 자신들의 이런 요구는 공공의 이익 보호 혹은 자신의 순수성에서 나왔다며 억울함을 강변한다. ⑧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치부한다. 모르는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오감으로 지각하지 못한 것은 없는 것. 즉 있는 것만 있다. 이는 플라톤이 궤변이라고 하던 프로타고라스의 극단적 상대주의 즉 인간척도설에 해당한다(크라튈로스 참조).




이를 현재 부정선거 음모론식 진실탐구 또는 타진요식 의혹제기를 당하고 있는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의 상황으로 설명해보겠다.


 


① 이들은 저번 이준석 vs 누군지 모르지만 3~4명 즉 일 대 다수 토론에서 전자개표기에 대한 의심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들은 전자개표기 오작동 문제를 핵심내용으로 의심을 전개했지만 이 전자개표기는 오작동하지 않았다. 전자개표기가 오작동했다고 한 이유는 왼쪽 화면에 나오는 투표지의 기호 1번, 기호 2번 출마자의 도장이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전자개표기 프로그램 집계 결과에 선거도장 찍힘에 따른 카운팅 숫자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시각으로 전자개표기를 지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술한 바를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은 분류 현황 정보 상단에 있는 진행 상태 항목에 전자개표기가 투표지를 재확인대상으로 분류하여 카운팅 대상에서 제외하였다는 바를 시각으로 지각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여 지각하고도 그것은 표상에 머물러 집중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단순히 비교하여 카운팅 갯수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보고, 여기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부정선거가 있다는 바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확신하여 이 확신에 묶인 것이다. 그래서 눈알만 위로 올려도 보이는 분류 현황 정보의 진행 상태 항목을 보지 않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주목한 부분만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철학적>이라면서 데카르트나 니체 프로이트를 본다고 하여도 사실 이들은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의심 방식이 자신에게 자연스러워서 이 철학자들을 봤던 것같다. 




② 하버드를 졸업하지 않은 고졸이라고 주장하고, 졸업장을 내밀어도, 그 졸업장의 진위를 의심하며 졸업장은 위조된 것이라고 한다. 위조인 이유는 시각으로 졸업장을 지각했을 때에 똑같은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사람의 졸업장과 색깔, 모양, 전공학위 적시 여부 등등이 다르다는 둥 의심거리가 끝도 없이 무한대로 명륜진사갈비마냥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명륜진사갈비라는 프랜차이즈 가맹업장은 사실 무한으로 먹으면 점주가 눈치를 주면서 다음에는 그 손님을 안받는 소상공인이 운영한다는 점에서 명륜진사갈비보다 더 하다. 그리고 이는 타진요 사건과 동일한 방식이다. 타블로는 한국에 있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증명을 다 했으며, 그것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되자 직접 스탠퍼드로 가서 공중파 제작진을 대동하고 증명을 계속했다. 졸업장을 직접 가서 다시 받거나, 그 학교에서 타블로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등등. 그러나 타진요는 그렇게 증명해도 의심을 계속 제기하며 끝이 없었다. 타블로가 타진요사건 때 공중파에 출연해서 한 말 "이건 못믿어서가 아니고 <저>를 안믿는 거잖아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은 이준석을 싫어한다. 그것이 사안에서는 종국적인 원인이다. 그런데 말이지..일본인은 관동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조선인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들이 이준석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난 그것을 보면 좋겠다.




③ ⑤은 ⑥과 연계해서 보면 좋다. 사실 ⑥은 ②에도 해당되는 비슷한 것이다. 즉 이들은 한국에서 졸업장을 주는 방식 즉 자신이 경험한 한국 상황에 묶여 있으며 따라서 한국 학위 상황에 빗대어서 '복수전공'이라고 하면서 복수전공제도에 빗대어 표현하면, 우리나라 "복수전공제도"를 떠올리면서 이준석 당신은 복수전공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하버드는 복수전공이 없었다며 이는 조인트 뭐시기라고 한다. 즉 이들은 이준석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전공제도도 있고 부전공제도(전공인정x)도 있고, 우리나라에 없는 학위제도도 있다.③⑤이들이 자명하다고 보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상황에서 보았을 때도 자명해야하는데 이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의심만 하는 것이다.


이들이 왜 이럴까? 이럴 때 <바퀴 없는 자동차나 발 없는 사람>예시를 가져오면 좋다. 인간이 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 그 인간은 자신의 오감으로 지각하지 못한 것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렇다. 어떤 이가 현대 문명사회에서 자신의 눈으로 이동수단인 자동차만 지각해봤다고 하자. 그리고 이 사람에게 말(horse)을 설명해야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그 어떤 이는 말(horse)을 tv로도 무엇으로도 지각해보지 못했다. 어떤 이에게 시청각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말을 설명하려고 사람과 자동차에 빗대었다. 다음과 같이. 말은 자동차'처럼' 이동수단이야. 그런데 말은 자동차와 '다르게' 바퀴가 없어. '너의 몸'을 보면 다리가 있지? 말은 너'처럼' 다리가 있는데, 다리 밑 발가락이 달린 발에 발가락 '대신' 발굽이 있어. 그 발굽이 자동차의 바퀴를 대신해. 자동차의 엔진은 말의 심장과'같아'. 자동차는 기름을 먹는데, 말은 건초를 먹어. 말의 눈은 너의 눈과'같아'. 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같아'. 이런 설명을 하면 말(horse)을 생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어떤 이는 말을 어떻게 상상하는가? 그 어떤 이는 상대방이 음성으로 설명해줬고 그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자신의 신체 그리고 자신이 눈으로 지각한 자동차에 '빗대어' 말을 상상한다. 따라서 그 말은 말이 아니라 "바퀴나 발 없는 <자동차나 사람>"이 된다. 이 사람은 말에 발굽을 상상하지도 못한다. 왜? 발굽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자신의 눈으로 지각한 적이 없으니까. 여기가 의심의 시작점이다.


타진요식 그리고 부정선거 음모론식 진실밝히기도 이와같다. 이들이 이준석 또는 타블로의 졸업장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원리는 항상 똑같다. 즉 자신의 지각적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들은 한국의 복수전공 제도와 부전공제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에서 빠져나와 하버드에 조인트 컨센트레이션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역시 이준석이 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그의 전공을 컴퓨터과학과 경제학 두 개로 병기했다고 ⑦ 이는 공공의 이익에 반하고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리곤 강의 수강 내역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는데 이준석은 전공과목 몇 개 부실하게 들었기에 어떻게 그게 전공으로 인정되냐며 여전히 다시 우리나라 학사제도라는 상황에 얽매인다. 그들의 음모론 혹은 의심제기 방식은 항상 이렇게 자신의 <상황의존적>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우물 안 개구리.



이렇게 보았을 때 어떤가? ⑧에서 말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과 똑같다. 즉 자신의 오감으로 대상을 지각한 것 외에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있는 것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있다고 파악한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나는 모르는 게 없어! 다 알아" 또는 "네가 설명만 잘해주면 다 알아먹어!" 상대방입장에서 당연한 것처럼 풀어 설명해주는 사람만 똘똘해지고 상대방은 계속 자신이 겪거나 들은 상황의 당연함에만 얽매인다. 이준석의 졸업장은 없고, 졸업장이 있어도 위조된 것이며, 위조되지 않았어도 전공은 2개가 아니다. ⑦한편으로 설령 그가 전공이 2개라고 하지 않았어도 기관이 이를 공표했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해했다. 즉 이를 믿고 투표한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다. 그러므로 어쨋든 이준석은 잘못이다. 아무리 봐도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식 억지 주장이 아닌가? 이미 플라톤도 거의 프로타고라스를 궤변론자라고 치부하고 있다. 요즘에 말에 대한 책임 운운하면서 지적하는 이들을 자세히 관찰하자. 음모론자의 향기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타진요식 의심제기자 또는 요즘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은 순수하다. 물론 그 중에는 열등감을 내비추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열등감마저도 순수함의 일종으로 치부한다. 순수한 사람은 정말로 공익을 위해 자신이 외치고 있다며 순수성을 사방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2026년에서 뒤로 갔을 때 약 2,516년 전인 기원전 490년 경쯤의 프로타고라스가 지금 2026년에 그들이 하는 궤변을 했고, 이러한 궤변은 이미 이후 나타난 플라톤이 지읏같다며 호통을 쳤다. 비슷한 '암송' 시인 마저도 국가에서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조차 현실아닌 다른 세계 운운하지만 이데아론은 우상숭배가 덜하고 환상을 배제하여 객관을 추구한 이론이다. 추방하라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 니체, 프로이트라는 의심의 3 대가들의 방법을 음모론자들이 차용했는가? 아니다. 이들은 2516년 전에 있었던 프로타고라스의 극단적 상대주의와 인간척도설을 쓰고 있는 못배운 궤변론자들이다. 그들에게 객관성이 있는가? 없다. 그들의 의심은 종말에 이르러 3번 동그라미같이 자명해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이준석은 그들에게 이미 악마화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리탐구 혹은 진실탐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악마화하는 것에 총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들입장에서는 악마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악마를 악마라고 했을 뿐이겠지. 처음 그 사람이 맘에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작하든 아니면 ④내편이 그 사람을 싫어하고 이에 전염되었든 각각의 이유로 이미 싫은 사람이 정해져 있고 거기에 더하여 그 싫은 사람을 '악마'로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의심이 동원되며 어떤 이는 철학사상까지 동원한다.


후자 즉 철학사상을 동원하는 자의 경우에는 철학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확신 즉 자신의 토대가 되는 무언가를 공고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확신의 토대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자신의 오감이며, 둘째 대중적으로는 신이 엄존하는 계열의 종교일 수 있다. 특히 개신교계열에서 음모론자들이 많아 보인다. 철학은 토대를 계속하여 깨부순다. 그래서 철학에는 일시적이면 몰라도 장기간으로는 답이 없다. 답이 없으므로 철학자들은 비판받거나 그의 철학사상은 비판적 '계승'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백두선생이 모든 철학자의 사상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도 밝힌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을 한다면서도 자신에게 불변하는 그 진리를 깨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에서와 달리 그러한 진리에 복종한다. 그들은 무언가에 복종할 대상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거나 복종하고 있지 철학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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